차순호(⾞順號)1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20:54 Posted by 거목

2003년판 차순호 

보이차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게 하였던 차가 바로 차순호(車順號)입니다. 동경호와 함께 보이차를 대표하는 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들이 바로 보이차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차인 호급(號級) 보이차입니다. 1900년대 초 청나라 말기에 그동안 황실에 차를 바치던 공차(貢茶) 제도가 사라진 후부터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거의 대부분 호(號)로 끝나기에 당시의 차를 속칭 호급차(號級茶)로 부릅니다.
호급 보이차 중에서 가장 유명한 호급차가 차순호와 동경호 이외에 복원창호(福元昌號)와 송빙호(宋聘號)가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이차의 4대 천왕(四大天王)입니다
이외에도 동흥호, 홍창호(홍태창호), 동창호, 정흥호, 경창호 등 100여 개가 넘는 호급차들이 최상급인 골동급(骨董級) 보이차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급차를 생산하던 개인 차창은 1956년 중국의 국유화 정책에 따라 모두 없어지고, 호급차 자체도 지금은 거의 구할 수 없을 뿐아니라 가격도 1편에 1억 원이 넘습니다.

차순호의 유래


다른 모든 호급차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차순호 역시 수많은 창건 연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비교적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차순호와 관련해 전해지고 있어 그 창건 연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차순호의 창시자는 차순래(車順來)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무에 개인 차창을 연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험에 합격하자 감사의 의미로 황궁에 자신이 만든 차를 직접 긴압하여 바쳤습니다.

차순호 본가 고택 전경 

그런데 이 차를 음용한 황실에 소문이 펴지게 되고, 결국 황제까지 음용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그 맛에 반해 차순래에게 '서공천조(瑞貢天朝)'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그로 하여금 공차(貢茶)를 생산하게 하였습니다.

차순호 본가에 있는 편액. 그러나 이 편액은 황제가 내려준 편액이 아니라 2006년에 대만 사람들이 다시 만들어준 것임. 

황제에게 편액을 직접 하사받는 동시에 황실에 공품을 독점적으로 받치게 되면서 차순호는 일약 보이차의 가장 중요한 차장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차순호는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보이차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차순호 고택에 전해지는 보이차 긴압석. 아마 이 긴압석으로 황실에 직접 긴압하여 바쳤을 것으로 추정. 

차순호 고택에 전해지는 보이차 긴압석. 아마 이 긴압석으로 황실에 직접 긴압하여 바쳤을 것으로 추정.
차순래가 황제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보이차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한 이 시기에 관해 중국의 거의 모든 자료에서는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 재위 기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순래가 차창을 개설한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험을 보았으니 차순호의 창건 연대도 도광제 재위기간으로 추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국내 자료에서도 이렇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순래의 후손 중의 한 명인 차지결이란 분이 만든 차순호에도 황제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해를 1839년으로 표시하고 있어 차순호의 설립 연대를 도광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2009년 차순호 차장의 차순호 칠자원차 

위의 사진에서 보면 편액 위에 조그만 글씨로 '1839년 도광황제 어사(御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차순호의 1800년대 초 설립 설과 차순호 설립 200주년, 혹은 170주년 등 많은 설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순래에게는 3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3남인 차덕삼(車德三1880~1935)이 이무에서 가장 중요한 차창으로 발전한 가업을 승계하여 차순호를 운영합니다.
그런데 차덕삼은 1880년 생으로서 1800년대 초에 부친이 차순호를 설립하였다면 연대가 이상하게 됩니다. 차순래가 1837년에 과거를 보았다 하고 그 조금 전에 차순호를 창립하였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인데, 차순래가 20살에 차순호를 창립했다 해도 그로부터 약 50년 후에 막내인 차덕삼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입니다.
이렇게 본대면 차순호의 설립 연대는 180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고, 구체적으로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재위 1875∼1908) 시기의 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광서제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나 양어머니이자 숙모인 서태후가 섭정을 하다가 1898년 경부터 직접 통치(親政)를 하게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 27세입니다. 친정 이전이라도 적어도 성년이 되어 차를 품평할 수 있다면 광서제의 나이 20세가 되는 1890년 전후까지는 그 시기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차순호의 성립연대는 1894년설, 혹은 1901년설 등으로 하는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서공천조(瑞貢天朝)' 편액의 유래에 대해 혼동이 많은 것은 그것이 사료(史料)에 의해 의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 편액의 후계자나 가족들의 기록, 그리고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차순호는 차덕삼의 장남인 차순래의 3대손 준의(遵義 1911-1963)에게 이어지고 다시 4대손 순예(循禮 1931-2004), 5대손 지신(智新 1948~)으로 이어지며 가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차지결(車智潔 ?)이라는 분은 바로 5대손 차지신의 동생입니다.

그런데 차순호의 역사에서 매우 불행한 사태가 5대손인 차지신과 차지결 형제 사이에 발생합니다. 바로 과거 차순호의 영광을 가져온 황제의 편액을 둘러싼 투쟁인데, 일설에는 차지결이(혹은 친척이라는 설도 있음) 무장한 사람들을 이끌고 본가에 가서 형이 보관하고 있던 편액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이때가 2005년으로 그 편액을 빼앗은 사람은 경홍(景洪)에서 이무 차순호 차창을 내고 본인이 진정한 차순호의 승계자로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지신은 편액을 빼앗겼으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대만의 차인들이 곤명(昆明)에서 복제품을 만들어 2006년 본가에 걸어주었느데, 현재 볼 수 있는 편액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8년 11월 차순호 본가. 가운데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겸리 대표자 

현재 차순호는 장손인 차지신이 본가인 차순호 고택에 살며 '이무차씨지신고택방(易武車氏智新古宅坊)'이라는 차창을, 그 동생인 차지결은 '이무차순호차장(易武車順號茶莊)'이라는 차창을 운영하며 각각 차순호의 정통을 잇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서공천조' 편액은 동생인 차지결이 소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이들의 친척이 소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마도 공개하면 자신이 탈취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감추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누가 과거 가장 중요한 호급차의 하나였던 차순호의 그 전통 제다 방법을 전수받은 진정한 차순호의 계승자인가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겸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차순호는 2003년에 만들어진 차입니다.
호급차의 명맥이 끊어진 이후 많은 곳에서 호급차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동일한 이름으로 호급차를 만들어 왔는데, 차순호 역시 마찬가지로 차 씨 가문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곳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겸리의 차순호는 '이무차씨차장(易武車氏茶莊)'이라는 차창에서 만들었는데, 이 차창이 과거 차 씨 가문에서 설립한 곳인지의 여부도 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차 씨 가문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모든 차창을 국유화 한 1956년 이후 2002년까지 차순호를 판매하지 않았고, 집에서 마실 산차만 생산하였습니다. 자가소비 이외에 정부 관리들이 방문하거나 특별히 중앙정부에 상납할 것들만 만들다가 2003년 부터 소량의 고차수 보이병차를 전통 방법으로 생산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이 전통 제다법이 현대까지도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연구 과제입니다)
2003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차 씨 가문의 차순호가 어떠한 것이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겸리의 보이차가 공교롭게도 2003년도에 구입한 것으로서 혹시 이때의 차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정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겸리의 이 차순호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상급 원료로 만들어져 당시 가격으로도 매우 고가에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호급보이차들 중에서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차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송빙호의 경우만이 그 제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만에서 '진순아호'라는 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 진순아호 참조
따라서 옛날의 호급 보이차의 이름을 가지고 시중에 나와 있는 차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겸리의 이 차순호도 어떠한 경로로 만들어진 차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래된 보이차인 것만은 틀림없으며, 이무 차산이 가지고 있는 특질, 곧 광서 황제가 묘사한 차순호 고유의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서 황제는 차순호를 어떻게 평가하였을까요?


차순호의 특징


단지 황제가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차순호가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막 즉위한 황제가 시골구석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편액을 하사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광서 황제는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황제였습니다. 그는 차순호를 시음하고 다음과 같은 평을 하였습니다. .
"찻물이 맑고 진하고(湯清醇), 맛은 투텁고 깊으며(味厚釅), 회감이 오래 유지되니(回甘久), 마음과 몸을 정화시켜준다(清心脾). 과연 서품(매우 뛰어난 차)이로다!(乃茗中之瑞品也!)"
<청심비(清心脾)는 심장과 비장을 맑게 해준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으로 해석하였으며, 심장과 비장에 스며든다(沁心脾)로 품평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호급차가 보이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희소성 뿐 아니라 바로 보이차에 대한 표준을 세운 것이라고 할 때, 광서 황제의 차순호에 대한 평가 속에 보이차가 가져야 할 차의 기준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탕 색이 맑고 진하며, 맛이 두텁고 깊으려면 차의 원료가 어떠해야 하는가? 막 재배한 대지차나 재배차가 이러한 색과 맛이 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지차의 경우에 갓 만들어진 차의 탕 색이 흐리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지차의 어린순에 있는 솜털의 영향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탕 색이 진하려면 차의 내재 성분이 충만된 고수차여야 합니다. 이것이 고차수의 운남 대엽종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보이차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원칙일 것입니다.

차순호 우린차. 맑으면서도 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일반적으로 이무차산의 차의 품질은 찻물이 유하고 순활하며, 구감이 맑고 답니다. (易武茶湯水柔和順滑,口感清甜) 이무정산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함이 입안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맛은 두텁고 깊다는 '미후엄(味厚釅 )'의 경지입니다.
이무 차산의 차는 또한 고삽미가 비교적 적고 회감이 상대적으로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苦澀感較弱,回甘較好).
회감(回甘)은 단맛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으로 이는 바로 단맛을 느끼게 되는 당(糖) 맛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회감은 차를 마신 후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난후 다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단맛을 의미하며, 당(糖) 맛은 보다 직접적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단맛을 의미합니다.
찻잎 속에 있는 성분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시간적 간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맛을 바로 느끼지 못하고 일정 시간, 그러나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느껴지는 이 회감이야말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이 회감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래간다는 것, 즉 황제가 언급한 '회감구(回甘久)'의 상황은 차 안의 성분들이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내포성이 매우 좋다는 것인데, 이는 탕 색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그 맛이 매우 오랫동안 성분 사이의 일정한 조합에 의해 회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회감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차가 가지고 있는 성분이 매우 중요한데, 이 역시 이무의 차산이 가지고 있는 원료의 특징입니다.

차순호 황금색 엽저. 이무차산의 특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차 
차순호 엽저 말린 것.이무의 어린 잎을 위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음.

차순호 뿐 아니라 이무에 존재했던 수많은 호급차 차창들이 이러한 이무 차산의 고차수가 가지고 있는 특질에 매우 충실한 차였기에 오늘날까지 골동 보이차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이 광서 황제가 '서공천조'를 하사하게 된 동기로 되었다고 판단되며, 이는 오늘날 소위 고차수 보이차가 구현하여야 할 핵심가치일 것입니다.
보이차를 공급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차를 제조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고, 수요하는 소비자 측면에서는 이러한 기준으로 만들어진 차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차를 만날 때 비로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청심비(清心脾)'의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러한 차야말로 진정한 '서품(瑞品)'으로의 자격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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