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원시림 사이로 대자연의 정기를 가득 담은 바람이 비를 몰고 달려온다. 강한 바람에 비가 흩날린다. 바람 잦은 마을이라는 과펑짜이(刮風寨)는 아직도 우기(雨期)가 끝나지 않았다. 산성비와는 거리가 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신(新)6대 차산을 대표하는 라오반장(老班章)의 모차(毛茶) 가치를 가벼이 눌러버리는 과펑짜이는 고(古)6대 차산의 자존심이다.
이우차(易武茶)다운 섬세함과 이우차답지 않은 강렬하고 중후한 맛을 동시에 내재한 과펑짜이는 생산량 1t 미만이라는 희소성만으로도 보이차 애호가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그중에 고수차(古樹茶)라 인정할 만한 차는 200㎏ 정도에 불과하다. 봄철의 과펑짜이는 총성 없는 전쟁터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좋은 고수차를 구하기 위해서 돈을 잔뜩 들고 다녀도 구할 수 있는 좋은 모차는 극소량이다.
고6대 차산의 시발점인 이우고진(易武古鎭)에서 마헤이짜이(麻黑寨)까지 오면 포장도로가 끝난다. 동쪽으로 24㎞를 1시간30분, 비포장 험로를 따라가면 과펑짜이가 나온다. 고차수가 있는 지역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시작이다. 과펑짜이의 특징은 마을 주변에는 고차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10여년 전에 심은 어린 차나무 밭만 마을 초입에 형성되어 있다. 이것만 보고 실망하면 안 된다. 진짜 보물은 깊은 산속에 있다.
해발 1203m에 있는 국경마을 과펑짜이는 용견 반호(龍犬盤瓠)를 시조신으로 모시는 소수민족 야오족(瑤族)이 모여 산다. 야오족어로 ‘잊지 말자’는 뜻의 달노절(達努節)은 조상을 모시는 새해맞이 전통 명절이다. 야오족은 그들의 새해 첫날인 음력 5월 29일에 모여 옥수수술과 음식을 함께 하며 동고무(銅敲舞)와 화포 쏘기 놀이를 한다. 굽이치는 산골짜기 아래 형성된 3개의 자연부락에 147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사람 741명 중에 226명만 차업을 기반으로 수입을 올린다. 차농도 자신이 관리하는 차밭에 따라 수입이 천차만별이다. 다른 차산처럼 마을 전체가 부유해지기에는 아직 요원하다.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빈부의 차이도 커서 점심을 굶는 아이들도 있다. 이들을 위하여 점심값과 교복을 지원하는 선한 사람이 있다. 과펑짜이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하여 학습교재와 학용품을 매년 기부하는 그는 베이징(北京)에 사는 한국인이다.
과펑짜이에서는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한 변경마을이라는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라오스의 저렴한 찻잎이 아무런 제지 없이 무시로 중국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라오스산 찻잎은 해발고도와 생태환경이 달라 등급과 맛이 많이 떨어진다. 인근 산지에 따라 맛과 질이 확연히 다른 이 지역의 차는 모두 과펑짜이라는 이름으로 팔리지만 모차의 출생 서열에 따라 산지 가격도 엄청 다양하다. 차산지를 정확히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욱 타당해보이지만 상업적 논리는 가끔 합리적 사고 위에 군림한다.
왜화(倭化)되지 않은 고차수를 만나기 위해 마을 동쪽으로 최소한 4시간을 더 가면 차핑(茶坪) 지역의 고차수 다원이 나온다. 비교적 길이 좋은 바이샤허(白沙河)도 마을 남쪽으로 6시간 거리다. 과펑짜이를 유명하게 만드는 주인공인 차왕수(茶王樹) 지역은 거리도 멀지만 가는 길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안면 있는 차농이 주선하여 어렵게 오토바이 교통편을 구했다. 빗속을 뚫고 길을 나섰다.
▲ 야오족 복장을 한 과펑짜이의 여인.
과펑짜이에서 가장 유명한 차왕수 지역까지 가려면 마을 서쪽으로 꼬박 6시간 동안 이동해야 한다. 오토바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경사가 급한 산길은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야만 갈 수 있다. 길을 만들어가며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는 산행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등산로가 아닌 곳의 산은 사람에게 결코 쉽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뱀과 같은 야생동물의 위협도 있지만 살인 진드기와 같은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건장한 남자도 가기 힘든 험로가 곳곳에 도사린다.
이런 오지를 이미 10여년 전에 찾아와 솥단지 하나 둘러메고 산상에 올라 야숙(野宿)을 하며 고수차를 만들어간 전설의 여주인공이 있다. 고수차에 대한 개념이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조차 미미하던 시절에 미모의 여승이 장삼(長衫) 자락 휘날리며 솥단지 둘러메고 차왕수 차산에 나타났다.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여승의 국적은 한국이었다. 중국에서 결혼하여 자녀도 두었지만 뜻한 바 있어 출가하여 티베트불교인 라마교의 승적을 갖고 있다. 차산 중 오지에 속하는 과펑짜이에서도 제일 험난한 차왕수 차산에 올라 현지인과 함께 숙식을 하며 산 위에서 차를 만들었다. 마을 사람 얘기로는 그가 차왕수의 고수차를 직접 만들어간 첫 외지인이라 한다.
경사 60도가 넘는 비탈길을 넘어 원시림을 헤치고 나오니 고차수가 산개한 지역이 나타났다. 야생차(野生茶)나무처럼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내버려둔 황산(荒山)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야방차(野放茶)나무가 널려 있다. 차상도 찾지 않는 우기의 차산을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이우차왕(易武茶王)으로 불리며 인기 있는 과펑짜이 차(茶)도 짝퉁이 판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한국 영화가 있었다. 1980년대 도시 개발의 그림자인 투기 바람을 풍자한 이장호 감독의 수작이다. 투기 바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과펑짜이에 광풍노도와 같은 투기 열풍이 아닌 훈훈한 순풍이 불어주기를 바란다. 차상의 주머니만 두둑해지는 것이 아닌 차농과 소비자도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투자와 윤리적 소비를 통하여 차농과 차상 그리고 소비자가 함께 웃는 접점을 위하여 오늘도 현장에서 영감(靈感)을 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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