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하늘은 맑았다. 원시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도회생활에 지친 세포를 깨워 저절로 미소 짓고 춤추게 했다. 에어컨 없이 차창을 활짝 열고 마주하는 산바람이 전해주는 싱그러움은 ‘행복’ 그 자체였다. 티엔츠푸얼(天賜普洱, 하늘이 내려준 선물 보이차)을 촬영하는 중국 CCTV제작팀과 함께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했다. 티엔츠푸얼은 30여 년 전부터 중국 국사(國師, 나라의 스승)로 존경받는 쉬지아루(許嘉璐潞)가 총지휘를 하는 대형인문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보이차의 역사와 미래를 담아 제작되는 티엔츠푸얼은 4개 팀이 각 1부를 책임제작하고 있었다.

 

 

 

차조신(茶祖神)을 모신 파아이렁사(帕嗳冷寺)가 있는 망홍(芒洪)촌에서 동북방향으로 1시간정도 4륜구동차를 타고 산길을 올라가니 유서 깊은 부랑(布朗)족 전통마을 웡지(翁基) 고채(古寨)가 나타났다. 웡지는 부랑족 언어로 ‘미래를 점치는 신성한 장소’라는 뜻이다. 전망이 탁 트인 명당자리에 있는 웡지는 세계최대 고차수(古茶樹)단지로 이름난 망징징마이차구(芒景景邁茶區)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락이다.

 

 

 

연평균기온 19.4℃, 연평균강수량 1800mm로 차나무가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웡지는 북회귀선이 지나가는 저위도 고산지대기후 특성답게 일교차가 크고 운무가 수시로 짙게 덮여 찻잎 품질이 좋다. 1800여 년 전 부랑족 선조 파아이렁(帕嗳冷)이 윈난(雲南) 북쪽에서 남하해 새로운 정착지로 정하고 차 재배를 처음 시작한 곳이 웡지다. 망징산(芒景山)해발 1700m 고지에 위치한 웡지를 중심으로 파아이렁은 산허리를 개간해 차를 재배하며 부랑족 마을을 넓혀갔다.  

 

전설에 의하면 차나무 증식과 재배기술 보급에 집중하던 파아이렁이 억울하게 죽은 후 거대한 악룡이 웡지마을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차나무를 파 해쳐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됐다. 불심 깊은 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마을 입구에 앉아 불경을 큰소리로 읊기 시작하자 행패를 멈추었다고 한다. 두려움 없이 불법을 설파하는 스님에게 감복한 악룡이 잘못을 뉘우치고 커다란 측백나무로 변해 마을 수호신이 됐다. 평온을 되찾은 마을은 망징산 고차수단지 중심부락으로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이 설화는 파아이렁 죽음을 애석해하는 집단과 누명을 씌워 파아이렁을 죽음에 이르게 한 파벌 사이에 벌어진 내부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을 축약해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웡지는 차재배역사 발원지답게 부랑족 전통가옥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습기에 취약한 1층은 기둥만 세워 창고로 사용하고 주거와 취사 공간을 포함해 칸막이 없는 통구조로 된 2층에 전 가족이 함께 거주한다. 장작더미 위에 솥단지를 걸쳐놓고 취사와 난방을 해결한다. 연장자는 집 안쪽에서 자고 나이가 어릴수록 출입문 가까운 곳에 잠자리가 정해진다. 가옥 외벽에 걸린 거대한 등나무 씨앗과 표주박은 웡지가 원시림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급경사를 이룬 지붕은 나무기와로 얹혀져있다. 지붕 끝에는 두 개의 떡잎과 새로 돋아나는 찻잎 새순을 상징하는 세 갈래 조형물이 장식돼 있다. 이 조형물은 차나무와 부랑족이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웡지는 세계최대 고차수(古茶樹)단지로 이름난 천년만묘고차원(千年万亩古茶园) 핵심부락답게 전망 좋은 2층에 차 마시는 공간을 마련한 집이 많았다. 예단할 수 없는 산속 날씨답게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잠시 야외촬영을 중단하고 티타임을 가졌다. 새장을 걸어둔 운치 있는 차실에서 원주민이 직접 만든 보이차를 마셨다. 대량생산을 위해 밀식재배한 차나무로 만든 차와 전혀 다른 생태환경인 고산지대 원시림 사이에서 숨 쉬는 수백 년 된 고차수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만든 고수차(古樹茶) 매력은 남달랐다. 황금빛 찻물이 뿜어내는 쌉쌀한 맛 사이로 혀끝에 매달리는 부드러운 단맛은 달큼했던 첫 키스를 옛 기억에서 호출했다.

 

 

웡지에서 맛볼 수 있는 부랑족 전통음식은 찻잎으로 버무린 나물과 볶음요리를 비롯한 찻물로 지은 밥과 찻잎을 넣어 향긋하게 끓인 닭곰탕이 있다. 싱싱한 찻잎튀김과 달걀전에 송송이 박힌 찻잎은 향과 맛 모두 ‘양손 엄지 척’이었다. 그중 가장 독특한 메뉴는 깊은 산 맑은 개울에서 잡아온 민물 게를 숯불에 구워 갓 따온 싱싱한 찻잎과 함께 나무로 된 아담한 손절구로 찧어 밥과 함께 먹는 것이다. 촬영 일정상 아쉽게도 시식을 못했지만 다음 방문할 때 버킷리스트 1번으로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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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마셨던 만송

차 이야기/보이차 산지 2020. 2. 29. 18:37 Posted by 거목

지금도 많은 보이차 애호가들도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만송 보이차를 최상의 품질로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이차산의 투어는 운남성의 아름다운 산세, 고산에서 나오는 산나물로 만든 소수민족들의 현지음식, 마셔도 싫증이 나지 않은 고차수 보이차는 행복과 힐링 그자체이다.

보이차 전문가에게 보이차 중에 최고의 보이차를 선택하라고 하면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지정되어 매년 황제에게 진상되었던 이무지역의 의방에 속해 있는 만송(曼松)보이차라고 한다. 필자도 보이차를 연구하기 위해 운남성 보이차산을 18회를 다녀왔지만 만송차산을 다녀오기는 6회 정도로 매우 적은 편에 속한다.

이무차산 의방의 만송마을은 서쌍판납주 맹랍현(勐臘縣) 상명향(象明鄕)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불과 3년 전까지도 이무를 거쳐 상명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15km를 약 40분 정도 좁은 산길과 개울물을 건너 굽이굽이 돌아가면 나오는 20세대가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까지 포장도로가 되어 있어 자동차로 불과 20분이면 갈수 있고 현대식 주택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 이무차산 의방의 만송마을은 서쌍판납주 맹랍현(勐臘縣) 상명향(象明鄕)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만송(曼松)마을을 가면 꼭 올라가야 하는 왕자산(王子山)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여름철에 샌들을 신고 40분이면 가는 거리를 필자는 등산화를 신고도 힘들게 올라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산에 길도 없이 열대우림을 숲을 헤치고 가야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왕자산 정상에는 도굴로 흔적도 없는 무덤이 있는데 청나라 시대에 왕자가 피난 왔다가 목숨을 잃고 묻혀서 왕자산이라고 부르고 있는 슬픈 역사가 있는 마을이다.

지금도 많은 보이차 애호가들도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만송 보이차를 최상의 품질로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만송보이차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 운남성에서 출판된 ‘판납문사자료선집(版納文史資料選輯)’에 소개된 이후 많은 보이차 애호가들이 만송보이차를 찾으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책의 내용은 보이차를 마시려면 ‘의방 보이차 중에 만송 보이차의 맛이 제일 좋고 만송 보이차를 맛보고 의방 보이차를 맛보아야 한다.’ 또한 ‘청나라의 황제는 6대 차산의 보이차 중에 만송 보이차를 공차로 지정했고, 다른 마을에서 생산되는 보이차는 필요 없다.’고 라고 기술되어 있다. 책의 내용 진위여부를 떠나서 ‘청나라 황제가 6대차산 중에 만송 보이차를 공차로 정했다’라는 문장만으로도 중국의 황실, 고위관료, 상류계층 사람들은 만송 보이차가 어떻게 황제의 입맛을 사로잡아 황제가 입이 마르도록 칭송했는지 궁금증이 더해지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황제의 보이차’라고 불리게 되었다.

보이차 전문가에게 보이차 중에 최고의 보이차를 선택하라고 하면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지정되어 매년 황제에게 진상되었던 이무지역의 의방에 속해 있는 만송(曼松)보이차라고 한다.

만송 보이차는 해발 1,340m 이상에서 자라는 대엽종 중에 소엽종으로 찻잎을 채집하여 만들며, 향기가 좋고 마시면 쓴맛보다는 단맛이 입 안 가득 번져오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본 사람은 평생 동안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또한 만송 보이차는 생산량이 매우 한정적이어서 구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살수 없는 귀한 보이차로 대접을 받고 있다.

1956년 중국정부가 수립되면서 개인 차창이 없어지고 서쌍판납주에서는 국영차창인 맹해차창이 만송 보이차를 소량 생산하였지만 워낙 교통도 좋지 않고 찻잎 채집도 많지 않고 구입하는데 고가로 회사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자 왕자산 산꼭대기에 위치한 만송 마을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찻잎구매도 중단하였다. 그러자 만송마을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수령 300년 이상 된 차나무를 베어내고 곡식을 심게 되면서 차산이 크게 파괴되어 황폐화 수준이었다. 그리고 왕자산 꼭대기에 위치한 만송 마을은 원인도 모르고 식수가 고갈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어렵게 되자 1984년에 정부의 도움으로 산꼭대기 마을에서 걸어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 아래쪽 계곡 언덕에 새로운 촌락을 꾸려 이주하였는데 그때 집집마다 몇 그루의 고차수 차나무를 가져다 심은 것에 의존하고 왕자산의 차나무는 만송주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2004년부터 보이차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만송 보이차를 찾았지만 이미 차나무는 깊은 열대 우림 속에 묻혀 버리고, 황폐화된 차산의 차나무는 보기가 힘들었다. 

2004년부터 보이차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만송 보이차를 찾았지만 이미 차나무는 깊은 열대 우림 속에 묻혀 버리고, 황폐화된 차산의 차나무는 보기가 힘들었다. 만송 주민들은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원래 살았던 산꼭대기 마을로 올라가 옛 차산을 찾아냈지만 험한 열대우림 수풀을 헤쳐 가며 흩어져 있는 차나무에서 찻잎을 채집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6~7시간 동안 찻잎을 채집해도 매우 소량이었다. 저자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에 5년간 6차례 만송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중에 2차례 동네 청년들의 안내를 받으며 험한 산길을 2시간동안 걸어서 왕자산을 꼭대기의 옛날 마을이 있던 곳에 가보니 소학교 운동장은 물론 마을의 흔적도 사라지고, 집터와 그릇 등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주변에 여기저기 몇 그루의 차나무만 일행을 반겨주었다. 내려오는 험한 길옆에 외지에서 온 대기업들이 밭을 일구고 새로 심은 차나무 밭을 보았는데 몇 년 후면 어린 차나무에서 채집한 찻잎으로 만든 품질이 떨어지는 만송 보이차를 비싸게 판매 될 것을 생각해보니 너무 안타깝고, 허망한 세월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만송 보이차는 매우 귀한 것으로 순료 100%로 만든 보이차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특히 구매할 때 유의해야 하며, 춘차와 추차, 그리고 고수차와 소수차의 가격 차이도 10배 이상이니 구입할 때 꼭 확인해야 한다. 

만송 마을에서 1년 동안 생산되는 쇄청모차는 대략 20-30kg 정도라고 하며, 봄이 되면 상명향에는 만송 보이차를 구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허다해지면서 더욱더 품귀현상으로 빚고 가격이 치솟고 있다. 만송마을은 과거부터 대엽종 중에서 찻잎이 작은 소엽종이 주를 재배되었고, 만송 보이차는 쓰고 떫은맛이 연하고 단맛과 향기가 좋아 타 차산과 차별화가 되었다. 사실 만송 보이차는 대·소엽종이 혼생하였지만 대엽종 보다는 대엽종 중 소엽종의 품질이 우수하여 소엽종이 빛을 보게 되었다.

만송 보이차의 분명한 특징은 찻잎의 상당수가 진한 녹색이고 두꺼우며, 토양은 주로 자홍색(紫紅色)의 간석토(􁞧石土)이며, 운무가 항상 산허리에 걸쳐 있어 아미노산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며, 일 년 동안 강수량도 적정하며, 천혜의 자연조건, 즉 떼루아를 갖고 있다.

만송 보이차는 외관이 단단하며 검고 밝으며, 찻물 색은 연한 금황색이고, 우린 찻잎은 황록색으로 균일하며, 산야기운이 강해 찻잔에 남는 향이 매우 좋고, 입안에 한모금을 마시면 쓰고 떫은맛은 약하고 떫은맛은 짧으며, 찻물에는 다른 지역의 보이차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단맛이 있고 회감이 빠르고 기분 좋은 인상을 준다. 찻물의 질감이 풍부하고, 달고 매끄러우며 내포성이 좋다.

만송 보이차는 매우 귀한 것으로 순료 100%로 만든 보이차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특히 구매할 때 유의해야 하며, 춘차와 추차, 그리고 고수차와 소수차의 가격 차이도 10배 이상이니 구입할 때 꼭 확인해야 한다.
 

보이차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가짜 노반장보이차 구별법 4가지

노반장 마을 입구에 있는 정문 2016년 모습(사진 좌측) 과 새로 건축한 2017년 정문 모습(사진 우측)

010년부터 매년 노반장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마을이 현대적으로 바뀌고 있었지만 2017년 2월에 방문하였을 때 노반장 마을은 현대 문명의 이기로 더 많은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서있는 맹해 진승호 차장과 계약한 노반장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담은 대형 광고판도 바뀌었고, 마을 정문의 건축물의 모양도 전통적이지만 건축에 사용된 자재는 어디에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현대적인 것이었다.

2013년, 노반장 마을입구에 있는 진승호차장에서 계약한 농부얼굴 모습을 담은 광고판 (사진 좌측) 과 2017년 광고판 모습 (사진 우측)


차산 마을 중 유일하게 있는 중국 ‘운남은행’은 그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마을 중간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은 마을 회관으로 바뀌면서 식당, 편의점, 주민들의 공동체 시설로 바뀌었고, 집집마다 현대식 건축과 시설로 오지마을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10년 전의 노반장 마을은 차산 중에 가장 가난하고 문명의 혜택이 없었던 오지 마을이었으나 2008년부터 맹해에 위치한 중국 10대 차장 중 하나인 진승호 차장이 노반장의 보이차산을 계약하고 상품화하면서 보이차 시장에 두각을 나타냈다.

맹해 진승호 차장 모습과 진승호 차장에서 생산하는 노반장 보이차


노반장 보이차를 설명하기 전에 신 육대차산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자.

중국 청나라시대에 황제로부터 각광을 받는 구 육대차산은 청나라 말기 의방지역에 기노족의 침입으로 일어난 화재, 그리고 전염병 말라리아의 창궐로 보이차를 만들 수가 없자 보이차의 중심지역이 흔들리면서 맹해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였다.

사실 청나라시대에는 황실에서 의방, 이무지역의 보이차를 공차로 지정하면서 맹해 지역의 보이차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였다. 그 이유는 맹해 지역은 금단의 땅으로 해마다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1년 청나라가 망하고 이무지역에서 말라리아를 피해서 맹해 지역으로 이주해온 농민들은 이무지역의 보이차 노하우를 맹해지역에서 선보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하나, 둘, 셋 보이차 차창이 생기게 되었고, 드디어 1937년에는 20여개의 차창이 문을 열었고, 이무지역과 비교할 정도로 빠른 성장하였고, 품질도 인정받게 되었다.

1938년에 운남성 정부가 남나산에 시험차창을 세웠고, 바로 그 다음 해에 중앙정부에서 불해차창(佛海茶廠)을 건립하였으며, 또한 국민당 정부가 중국다업공사를 운남성경제위원회와 합작으로 설립하면서 이무지역의 전성기는 점차 사라지고 맹해 지역이 새로운 보이차 산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11년 청나라는 망하고 1912년 쑨원에 위해 공화국이 1920년에 장개석에 의해 거의 통일을 이루었으나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1949년에 공산당 모택동이 집권하면서 청나라의 문화를 청산하는 의미에서 보이차 생산지도 자연스럽게 이무지역에서 맹해 지역으로 옮기면서 포랑산 지역의 차산이 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국경지대에 있는 미얀마로 가는 도로를 건설하면서 인도나 티베트로 갈수 있는 새로운 도로를 맹해 중심으로 개발하였다. 그리고 신 육대차산은 청나라시절 공차가 아닌 관계로 포랑산의 산림과 고차수의 차산이 잘 보존되었고, 구 육대차산보다 생산량도 많아 다양한 개성의 보이차를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노반장 차산과 마을, 고건충사장 모습


맹해 지역의 대표적인 차산은 포랑산으로 운남성 서쌍판납주 맹해현(勐海縣)에 위치하고 있으며, 맹해 시내로부터 80km지만 최근 포장도로를 만들고 있지만 비포장도로도 아직도 많아 자동차로 2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서남쪽은 미얀마와 접해 있으며, 보이차가 생산되는 면적은 1,016km2에 달한다.

포랑산은 차나무를 최초로 재배한 포랑족 복인(濮人)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현재 소수민족 1만여 명이 살고 있으며, 포랑 차산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교목형 고차수 산지인 반장(班章), 노반장(老班章), 신반장(新班章), 노만아(老曼峨) 마을이 있으며, 열대우림 기후로 무덥고, 원시삼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포랑산 차산에서 가면 다양하고 개성 있고 특별한 보이차를 만날 수가 있다.

포랑산 지역의 차나무는 모두 교목형 대엽종에 속하며, 차 맛이 쓰고 떫은맛이 매우 강하며 진한 향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또한 회감이 빠르고 생진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중국에서는 이렇게 강한 차의 기운을‘패기(覇氣)가 있는 차’라고 부른다. 포랑산 보이차의 품질은 매우 우수하고 찻잎이 견실하며, 독특한 꽃 향이 있으며, 마시고 난 뒤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이 특징이다. 포랑산향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에는 교목형 고차수가 자라고 있으며, 고차수 분포가 매우 넓고 포랑산이라는 이름의 교목형 고차수가 많이 집중된 마을은 반장촌위원회가 관할하는 노반장, 신반장, 노만아 3개의 마을로 3개 마을의 교목형 고차수 찻잎 생산량은 전체 포랑산향 고차수의 90%이상을 차지한다.

이중에서 노반장 보이차는 보이차의 최상급 품질로 인정받고 있으며, 보이차 애호가이면 꼭 소장하고 싶은 보이차로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노반장은 포랑산향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맹해에서 차동차를 타고 타락(打洛) 방향의 도로로 10km 정도 가면 산 입구에 들어선 후부터는 20km는 자갈로 깔은 포장도로의 산길을 따라 덜컥 덜컥거리는 4륜 자동차에 익숙해질 때가 되면 황토색의 비포장도가 나타나면서 오지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7-8km를 산속 깊숙이 들어가면 노반장 마을 입구에 도착하는데 까지 2시간 정도가 걸렸다. 몇 년 전까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갔는데 지금의 도로사정은 매우 양호한편이다.

노반장 마을 전경과 마을 주민들 모습, 노반장 마을은 소수민족 합니족(哈尼族)이 살고 있는 촌락으로 114가구에 460여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씨족 공동체 마을이다.


노반장 마을은 소수민족 합니족(哈尼族)이 살고 있는 촌락으로 114가구에 460여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씨족 공동체 마을이다.

노반장 마을은 10년전 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고 보이차가 알려지지 않아 맹해 지역에서 가장 가난한 촌락이었고, 노만아 차산이 더욱 유명하였다. 노반장 차산은 보이차 생산에 최적의 자연 생태적 떼루아를 갖고 있으며, 수령 300년 이상 된 고차수가 잘 보존 되어 명품 보이차 생산지역으로 잠재성을 갖고 있었다. 2005년부터 진승호 차장에서는 새로운 보이차 생산을 위해 여러 차산을 물색하였으나 노반장의 차산을 찾게 되었고, 2008년부터 노반장 마을주민과 계약을 하고, 본격적인 보이차 생산은 물론 마케팅에 주력하면서 노반장 차산에서 찻잎을 채집하여 만든 보이차가 애호가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노반장 차왕수 1호, 노반장은 해발은 1,700m이고, 차산의 열대우림 생태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차나무는 모두 표준 대엽종으로 나무가 굵고 크며 찻잎이 다른 차산과 구별되고 있다.


노반장은 해발은 1,700m이고, 차산의 열대우림 생태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차나무는 모두 표준 대엽종으로 나무가 굵고 크며 찻잎이 다른 차산과 구별되고 있다. 즉, 야생 생태환경은 노반장보이차의 품질을 좋게 하고, 타 차산의 보이차와 비교도 안 되는 차기(茶氣)를 갖고 있으며, 강한 산야 기운을 느끼게 하면서 노반장 보이차가‘보이차 중의 차왕’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노반장보이차는 봄(春), 여름(夏), 가을(秋) 차의 외형이 모두 같다. 만약 여름차(夏茶)를 건조시킬 때 날씨가 좋지 않아 잘 건조되지 않았다면 외형과 우린 잎의 색이 균일하지 않고 일부는 약간 갈색으로 변한다. 노반장보이차의 향기, 단맛, 회감은 봄차(春茶)가 여름차(夏茶)나 가을차(秋茶)보다 좋고, 쓰고 떫은맛은 여름차(夏茶)나 가을차(秋茶)가 봄차보다 약하다. 그러므로 노반장 보이차는 여름차(夏茶)와 가을차(秋茶)가 봄차(春茶)보다는 부드럽고 쓴맛이 적어 마시기 좋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소장용이 아니고 마시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여름차(夏茶)를 선호한다.

노반장 보이차 제조방법 중 살청(殺靑)하는 방법은 조상 대대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법을 사용하여 타 차산의 보이차보다 오래 동안 보관이 가능하고, 차를 마시고 난후에 회감을 빠르게 나타나게 한다.

노반장 보이차의 원료는 한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보이차 시장에는 노반장 보이차라고 적힌 보이차들이 매우 많다. 순료 100%의 노반장 보이차들은 주로 애호가들이 소장하므로 시장에 판매되고 있는 진짜 노반장이라는 보이차도 100% 순료로 만든 보이차가 아닐 수가 있으므로 의심해봐야 한다.

보이차 시장에서 팔리는 가짜 노반장보이차를 구별하는 방법에는 크게 네 가지를 유의 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첫째, 노만아와 신반장 보이차를 병배 하여 만든 보이차는 노반장 보이차의 맛과 비슷하다. 노반장 차산과 이웃한 노만아 보이차와 신반장 보이차는 외형과 구강촉감이 노반장 보이차와 매우 비슷하여 전문가나 현지인들이 아니면 외형과 향기, 단맛, 회감에서 구별이 쉽지 않다. 노반장과 노만아, 신반장의 주요한 품질의 차이는 쓰고 떫은맛의 지속도와 회감에 있다. 즉, 보이차의 쓰고 떫은맛은 노만아가 제일 길고, 그 다음이 신반장이며, 노반장 보이차는 가장 먼저 없어지면서 단맛의 회감이 빠르다.

둘째, 경홍시의 맹송 고차(苦茶: 쓴차)를 기본으로 하고 다른 지역의 보이차를 병배 하여 만들고 있다. 맹송의 차산은 같은 포랑산에 있으면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차는 노만아, 맹송의 2개 차산에서 일부 생산되고 있다.

즉, 가짜 노반장 보이차가 만들어진 배경은 노반장 보이차를 마셔보지 못하고 이론적으로 쓴맛에 대해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쓴맛 후에 빠른 단맛의 회감이 노반장의 보이차라고 인식하면서 가능해졌다. 이런 보이차들은 비교적 쉽게 차이를 알 수 있는데, 외형을 보면 노반장 보이차처럼 찻잎이 크고 튼실하지 않으며 더구나 노반장 보이차처럼 새순이 크고 솜털이 많지 않다. 두 지역의 보이차를 마셔보면 쓰고 떫은맛에서 더욱 분명한 차이가 나는데, 단맛이 없으면서 쓰고 떫은맛은 더 오래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가짜 노반장 보이차의 향기는 꽃 향이 적고 강하지 않으며, 순료 노반장 보이차에 비교하면 현저하게 떨어지고 회감도 일반적이다. 우린 찻잎의 색은 균일하지 않고 잎이 크고 튼실하지도 않다.

셋째, 찻잎이 굵고 튼실하며 쓴맛이 강한 대지차로 만든 노반장 보이차이다. 이런 보이차는 노반장 보이차와는 외형과 구강 촉감이 분명하게 달라서 쉽게 구분할 수 있으며, 쓴맛 후에 단맛의 회감이 매우 부족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보이차 시장에는 노반장 숙차도 나와 있는데 이런 보이차를 보면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저‘허허 세상에 !’하고 웃고 지나치면 된다. 만약에‘정말로 노반장 보이차를 발효시킨 숙차이지요?’라는 질문이라도 한다면 보이차에 대해 너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당해 바가지를 쓸 수도 있다.

넷째, 노반장 보이차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싸게 판매하는 경우도 의심해보아야 한다. 해마다 보이차 생잎 가격이 산지별로 나오는데 2017년 노반장의 봄차(春茶) 고수차 생잎 1kg 원가는 중국현지에서 중국화페 7,000위안으로 칠자병차를 만들 때 2.5kg이 필요하므로 총 17,500위안이 되며, 17,500위안을 7로 나누면 한편 당 2,500위안이 된다. 그리고 쇄청모차를 긴압하고 포장하는 비용과 인건비등이 추가됨으로 비용이 또 올라간다.

여기에 생산자인 보이차장의 이윤, 마케팅비용, 유통경비등을 추가하여야 하고, 국내 시장에서 유통될 경우를 보면  해당 수입사의 비용과 소비자까지의 유통단계에 따른 경비등을 포함하면 노반장 보이차 진품의 소비자 가격은 상당히 높게 책정될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시중에 노반장 보이차가 싸게 유통되는 것이 있다면 순료 100%가 아닌 병배된 노반장 보이차이거나 소수차 혹은 대지차를 병배한 노반장 보이차이다.

노반장 32호 고건충 사장과 노반장 32호 보이차, 노반장 보이차 중에 ‘노반장 32호’보이차는 현지 마을의 동네의사로 있는 고건충씨가 자신의 집 호수를 브랜드로 내걸고 품질 뿐만 아니라 가격에서도 매우 정직하다.


최근에 노반장 보이차는 진승호 차장의 제품은 믿을 수가 있지만 브랜드의 가치로 가격이 매우 비싼 것이 단점이고, 노반장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는 가격이 진승호 차장보다 약간 저렴하지만 품질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노반장 보이차 중에 ‘노반장 32호’보이차는 현지 마을의 동네의사로 있는 고건충씨가 자신의 집 호수를 브랜드로 내걸고 품질 뿐만 아니라 가격에서도 매우 정직하다.

노반장보이차를 시음해보면 쇄청 모차를 사용하여 외형은 검고 밝으며, 잎이 단단하게 말려있고 새순이 굵고 솜털이 많다. 산야기운은 매우 강하며, 야생꽃 향, 과일 향이 일품이며, 향기는 산야기운의 향이 뚜렷하고 순수하며, 난꽃향과 화밀향(花蜜香)에서 나는 비슷한 향이 나타나고, 잔향이 강하고 오래지속 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맛은 쓰고 떫은맛이 강하고 쓴맛이 빨리 단맛으로 변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며, 떫은맛이 없어지면서 침이 자연스럽게 고인다. 후운은 회감이 뚜렷하고 오래 지속되며 매끄러우며, 찻물색은 금황색으로 맑고 밝은색이 돋보이고, 우린 잎은 황록색으로 균일하고 윤기가 난다.
 

 

운남성 보이차 4대 명품 '

의방의 만송 보이차,

포랑산의 노반장 보이차,

임창지구의 빙도 보이차, 석귀 보이차'

 

 

많은 보이차 애호가들이 품질 좋은 보이차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고 현지를 방문해 본적이 없으니 보이차를 판매하는 차장, 보이차 동호회에서 알려주는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명품 보이차는 해발이 1,500m이상 되고 천혜적인 자연조건 속에 고수차(古樹茶;차나무 수령이 100년 이상 된 차나무에서 찻잎을 채집하여 만든 차)로 쇄청모차이면 안심해도 좋다.

운남성에서 보이차의 4대 명품이라고 하면 서쌍판납(西双版納)에 위치한 구(舊)육대차산에 속하는 의방의 만송 보이차, 신(新)육대 차산에 속하는 맹해 포랑산의 노반장 보이차, 그리고 임창지구의 빙도 보이차, 석귀 보이차라고 한다. 사실 임창지역에서도 쌍강 맹고 고수차는 꾸준하게 지명도가 있어 보이차 애호가들에게 사랑을 받아 왔지만 반면에 동쪽 방동 지역의 고수차는 그동안 알려진 것이 없어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석귀 보이차가 최근 몇 년 동안 인기가 많아졌지만 생산량은 매우 적어서 고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여전히 맛과 품질 때문에 많은 보이차 애호가들이 소장하기 위해 찾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석귀 고수 보이차는 1㎏의 쇄청모차 가격이 200만원을 넘어가는 기록을 세우면서 빙도 보이차와 더불어 임창 지역의 위상을 높였고, 서쌍판납(西双版納)의 노반장, 만송, 괄풍채 등의 차산 가격을 위협하기도 했다.

필자도 석귀(昔归)차산을 2015년, 2016년에 2회 방문하면서 해발이 1,000m 조금 넘은 석귀 보이차가 왜 유명한지에 대해 떼루아에서 답을 찾았다.

석귀 차산은 뒤로는 망록산(蟒鹿山)이 위치하고 앞에는 한강보다 넓이가 큰 란창강이 흐르고 있어 차산은 높은 산허리를 휘감는 구름과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로 좋은 고차수가 나올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풍수상으로  배산임수의 좋은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석귀 보이차를 마시면 건강하게 장수를 누릴 수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더욱더 각광을 받았다. 필자가 만나 본 그 곳 원주민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석귀 보이차는 란창강 유역의 적홍토양과 망록산의 광천수가 풍부하고 품질이 좋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맛과 우려낸 차안에 많은 미네랄이 있어 차별화 된다고 했다.

란창강이 흐르고 망록산의 천혜적인 석귀 차산

석귀 고수차가 ‘임창의 노반장’이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면서 방동지역 망록산 고수차 전체가 큰 사랑을 받게 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찾고 즐겨 마시는 보이차로 거듭났다. 석귀 보이차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생산량에 비해 찾은 사람이 많아 가격이 비싼 것이 아쉽기만 하다. 현재 석귀 보이차는 연간 생산량이 매우 적어서 진귀한 보이차로 취급 받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공산당이 선물로 많이 사용하고 특히, 보이차를 사랑하는 애호가들이 소장용으로 구입을 많이 하므로 가짜도 많다. 

또한 첩첩산중 험한 석귀 차산에도 자본금이 많은 중국의 대기업이 들어와서 보이차 사업에 손을 대면서 농민들의 순수한 마음도 변해가고 있었다. 즉, 망록산의 고차수 차산 중 2/3 정도는 란창강맥주회사가 임차하여 보이차를 만들어 고가에 판매하고 있으며, 나머지 1/3은 지역의 농민들이 차나무 찻잎을 채집하여 쇄청모차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돈에 눈이 어두운 농민들 간에 경쟁이 심해져서 옛날의 민심은 점차 사라지고 돈을 쫒아가는 농가를 보면서 걱정이 되었다. 그 이유는 석귀 보이차는 고차수 보호를 위해  하차(夏茶)를 생산하지 않은 것이 관례이지만 불문율을 깨고 하차를 생산하고 있다.

석귀 차산에 가는 길에 초제소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곤명(昆明)에 내려 다시 임창까지 1시간의 비행기를 타야 한다. 임창시에서 80km자동차로 3시간 정도를 가면 현대식 주택단지가 나타나는데 임상구(臨翔區) 방동향(邦東鄕)의 석귀(昔歸)마을로 약 113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민은 주로 한족(漢族)과 태족(泰族)이다. 과거에는 고차수 차산 옆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1958~60년 중국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소련식 모델을 모방하여 대규모 농촌인민공사를 조직하여 개혁한 운동)때 모두 현재의 석귀촌으로 이주하였고, 그 당시에 살던 마을은 집터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석귀촌은 아주 가난한 농촌마을로 전통가옥에 생활하였으나 보이차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고가 판매가 되었고 부를 축적하면서 현대식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지였던 석귀 마을에 현대식 가옥

이곳에서 다시 란창강을 따라 12km를 더 산으로 올라가면 석귀 고수차산이 눈앞에 나타난다. 망록산 위에 펼쳐있는 고차수 차산에서 란창강을 바라보면 힘들게 온 여정을 한숨에 날려 보낼 수가 있다. 석귀 차산의 고차수의 수령은 200년 이상이며, 가장 큰 차왕수는 수령 800년이 된 것으로 나무 아래서 '망녹웅이(蟒鹿熊二: 망녹산의 웅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차나무)'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수령 800년 된 망녹웅이의 차왕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청나라말기 면저현지<缅宁县志>에 ‘우리 현에는 차를 기르는 사람이 6~7천 가구가 넘으며, 그중에 방동향 망록산 석귀 보이차가 색과 맛이 아주 좋아서 다른 차산에 비해 우수하고 특별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석귀 고수차는 키가 3미터가 넘고 수령 300~500년 정도로 차나무에서 채집한 것으로 엽저를 보면 타 차산지역보다 찻잎이 길고 줄기가 얇은 특이한 지역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석귀의 고차수는 맹고대엽종(勐库大葉種)을 임창(臨滄)지역으로 옮겨 심은 후에 차나무에 변이가 생겨 방동흑대엽차종(邦東黑大葉種)으로 분류되었는데 이차나무가 석귀의 교목형 차나무이다.

석귀 차산의 수령 300-500년 된 교목형 차나무

필자가 음미한 석귀 보이차는 2015년 춘차(春茶)로 쇄청모차를 하였다. 외형은 검은색으로 밝고, 잎이 단단하게 잘 말려 있으며, 찻잎이 길어 보였다. 찻물색은 황록색으로 맑고 투명하였으며, 우린 잎은 황록색으로 균일하며 윤택해 보였다. 산야기운은 비교적 강하며, 상쾌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고, 몸에서 온기를 직접 느낄 수가 있었다. 향기는 은은한 난초 향과 인삼향이 올라오며, 찻잔에 향이 은은하게 지속적으로 올라오면서 마시자마자 입안에 침이 생기는 현상을 느낄 수 있으며,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고 회감이 빨랐다. 맛은 쓴맛이 뚜렷하고 떫은맛 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으며, 쓴맛은 곧 단맛으로 바뀌면서 입안의 상쾌함과 기분을 전환시켜 주었다. 후운은 회감이 비교적 좋고 매끄러우며 부드러웠다.

2015년 봄에 채집한 찻잎으로 만든 석귀 고수차의 탕색

이우의 대표 차산 마헤이짜이선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

 

마헤이짜이 마을 전경


돈이 넘친다. 풍어기(豊漁期)를 맞아 해상(海上)에서 벌어지는 파시(波市)처럼 뭉칫돈이 몰려다닌다. 중국과 대만의 상인들은 돈을 자루에 담아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다닌다. 차농(茶農)과 흥정이 되면 현찰과 모차(毛茶)를 바로 교환한다. 

   
   마헤이짜이(麻黑寨)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곳이다. 가장 이우(易武)다운 보이차(普茶)로 명성을 떨치며 노차(老茶)의 고향 이우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포랑산차(布朗山茶)가 패기 충만한 남성적 취향이라면 이우정산차(易武正山茶)는 부드럽지만 가끔은 매운 여성적 매력이 있다.
   
   이우정산(易武正山)이라고 포장되어 팔리는 보이차를 자주 볼 수 있다. 정산은 하나의 산 이름이 아니다. 고6대 차산을 비롯한 그 일대의 여러 산을 이우정산이라 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달리 나뉘어져 있지만 보이차를 하는 사람들은 고6대 차산을 통칭해 이우정산이라 부른다. 고6대 차산은 만전(蠻), 만사(漫撒), 망지(莽枝), 유락(攸樂), 의방(倚邦), 혁등(革登)이다.
   
   이우정산으로 판매되는 차는 하나의 차산에서 나온 순료(純料)가 아닌 여러 차산의 모차를 섞어 만든 병배(配)차로 보면 된다. 하나의 차산 이름으로 판매하는 차는 그만큼 순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포장지에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는 그 차의 출생성분을 믿기 어렵다. 또한 순료차에 비하여 병배된 차가 나쁘다는 인식은 무리가 있다.
   
   이우정산이 아닌 마헤이짜이 이름을 앞세워 판매되는 수많은 차는 마헤이짜이의 순료만으로 만든 것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우차구의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가격이 많이 저렴한 타 지역의 대지차가 지나치게 많이 섞이지 않으면 용서해줄 만하다는 것이 현지의 사정이다. 만들어진 차의 순료가 마헤이짜이인지도 중요 포인트지만 사실은 마헤이짜이에 진정한 고차수(古茶樹)가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행정구역상 멍라현 이우향(縣 易武鄕)에 속한 마헤이짜이는 한족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독특한 부락이다. 고6대 차산의 해발고도는 656~2023m로 편차가 크다. 해발고도가 1331m인 마헤이짜이는 연평균 17℃로 차나무 성장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다. 이우고진에서 나와 차산으로 가는 길 치고는 아주 잘 포장된 도로를 5.5㎞정도 달리면 뤄수이동(落水洞)이 나타난다. 뤄수이동에서 4㎞를 더 가면 마헤이짜이다. 포장된 길은 마헤이짜이에서 끝난다.
   

▲ 가을 햇살에 빛나는 찻잎.

마헤이짜이의 이웃동네인 뤄수이동에는 수령(樹齡)이 1200년 되었다는 고차수가 이우의 차수왕(茶樹王)이라는 이름으로 철조망에 갇혀 보호되고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불과 3년 전만 해도 800년이라 했다. 3년 사이에 400년이나 나이를 올릴 만큼 차산에서 차수왕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크다. 그 지역의 차수왕을 기준으로 그 일대 차산의 차나무의 수령이 대략 가늠되기 때문이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부 차수왕의 나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마헤이짜이의 차산은 왜화(倭化)되었음에도 생태환경이 좋은 차밭이 많다. 그러나 고차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과장된 차수왕의 나이만큼 마헤이짜이의 차나무 나이도 상향 조정되어 있다.
   
   유명세에 비하여 불행하게도 마헤이짜이에는 고차수라고 인정할 만한 나무가 별로 없다. 사람이 채차(採茶)하기 좋게 위로 높이 자라지 못하도록 주간(主幹)을 일부 잘라냈고 수확량을 고려하여 가지치기를 하여 왜화해 버린 키 작은 대수차가 주류다.
   
   고차수다운 고차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이 마헤이짜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마디로 돈이 된다. 상인들이 마헤이짜이를 선호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진정한 고수차가 마헤이짜이에서 나오는지 유무는 상인에게는 다음 문제다. 수익성이 좋으면 그만이다.
   
   돈이 흔한 차산에서 벌어지는 집짓기 열풍이 마헤이짜이에서는 이미 지나갔다. 6개월 만에 마헤이짜이를 다시 가보니 고급차 구매와 인테리어에 큰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었다. 집안의 기둥은 단순한 시멘트가 아닌 대리석으로 빛나고 있다.
   
   수완이 좋은 차농은 자신이 만든 차뿐 아니라 다른 차농의 차까지 팔아주는 모차 중개상 역할을 하며 수입을 높이고 있었다. 차농은 이제 단순한 농민이 아니다. 건강한 차를 만들어내야 하는 차농의 농심(農心)과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차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필자가 아는 차농은 중형 차창에 보통급 모차를 대량 공급한다. 특급과 초특급은 고수차를 전문으로 하는 차창과 상인에게 소량 공급한다. 특급과 초특급의 질적 차이는 미세하지만 가격 차는 엄청나다. 그는 한국 사람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 차에 대한 분별력이 약한 사람이 오면 저급한 모차를 특급으로 바꾸어 파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마헤이짜이에는 ‘저울의 달인’이 살고 있다. 마을 초입에 세워진 마헤이짜이 표지석 근처에 사는 여인은 며느리와 손자도 있는 젊은 할머니다. 1인 6역(아내, 어머니, 시어머니, 할머니, 차농, 모차가공기술자)을 소화해내는 ‘저울의 달인’은 오늘도 일손을 쉬지 않고 개미보다 열심히 일을 한다. 오늘 딴 찻잎을 살청(殺靑)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틈틈이 모차에서 황편과 이물질을 골라낸다. 사람 좋은 남편은 대낮부터 얼큰하여 마냥 기분이 좋아 보인다. 전에 보았던 어린 강아지는 이제 성견이 되어 주인의 모차를 지키는 막중한 일을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집의 며느리는 아기를 돌보는 것 말고는 모든 일에서 열외다.
   
   돈풍년이 가져온 또 다른 변화가 마헤이짜이에 있다. 나와 이웃을 가르는 철조망이 생겼다. 빗장조차 없던 차산의 창고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애완견이 아닌 방범용으로 키우는 커다란 개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돈의 맛은 가끔 무섭다.

 

1200살 된 차왕수는 누가 죽였나?

 

[서영수의 Tea Road] 1200살 中 낙수동 차나무 2017년 사망
방치 가까운 허술한 관리로 급격히 노쇠

중국 낙수동(落水洞)에는 1200살 된 차(茶)나무가 살고 있었다. 이우(易武) 지역 일대를 상징하는 차수왕(茶樹王)으로, 정부에서 지정한 이우 지역의 유일한 공식 고차수(古茶樹)였다. 조그만 산골마을은 차수왕을 보기 위해 몰려든 차 애호가와 학자, 차상들로 붐볐다. 살아 있는 화석, 차수왕 덕분에 낙수동은 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핫스폿’으로 떠올랐다. 낙수동이 중국을 넘어 해외까지 명성을 떨치던 지난 2017년 8월22일 이우 지방정부는 “낙수동 차수왕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낙수동 주민은 물론 이우 지역과 중국차 애호가에게 ‘낙수동 차수왕 사망’ 소식은 충격이었다. 사망 원인과 사후처리를 위해 학자와 차 산업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뒤늦은 관심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며 안타까워했다. 2000년대부터 불어온 보이차(普洱茶) 열풍에 낙수동 차수왕은 인기를 얻었지만 부작용도 컸다. 사시사철 밤낮없이 순례자처럼 찾아오는 탐방객들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 부족함을 느낀 상당수 방문객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고 무단으로 찻잎을 채취하는 것도 모자라 나무껍질을 벗기고 가지를 꺾어 가기도 했다.

중국 낙수동의 1200살 된 차나무인 차수왕

낙수동, 차수왕 보기 위한 인파로 ‘북적’

낙수동 차수왕은 인공 재배된 차나무다. 밑동 둘레가 1.27m로 수령에 비해 굵지 않았다. 하지만 신장이 12.6m로 장대하고 가지 둘레는 6m로 수려했다. 사람들의 시달림으로부터 낙수동 차수왕을 보호하기 위해 지방정부는 2011년 사방 3m 둘레에 사각형 철조망을 쳤다. 철조망 설치와 보호수라는 팻말이 낙수동 차수왕이 사망할 때까지 취한 조치의 전부였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해마다 낙수동 차수왕을 찾아가 볼 때마다 필자가 느꼈던 점은 보호하는 것인지, 가두어 놓고 방치해 둔 것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허술한 관리 속에 나날이 노쇠해 가는 늙은 차나무 모습이었다.

낙수동 차수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사람의 일탈행위만은 아니었다. 철망은 사람을 막아줬지만 토사유출은 막지 못했다. 비탈진 급경사면에서 서식하던 낙수동 차수왕은 흙이 유실돼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별다른 보호조치가 없었다. 노령으로 토양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이기가 점점 힘들어져 자력으로 서 있기도 힘든 낙수동 차수왕에게 결정타를 날린 것은 야생벌이었다. 말라가는 차나무에 작은 구멍을 내고 들어간 야생벌이 왕성하게 번식하면서 몸통 내부를 완전히 공동화해 고사(枯死)시켰다.

낙수동 주민과 지방정부는 손쓸 시기를 놓쳤다. 죽은 낙수동 차수왕의 나이는 800년 남짓으로 확정됐다. 원래 800여 년이었던 낙수동 차수왕은 2010년부터 매년 나이를 초고속으로 먹기 시작해 최고수령 1200년까지 올라갔다. 지역민들이 차수왕 나이를 터무니없이 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차 업계에서 차수왕이 갖는 상징적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그 지역의 차수왕을 기준으로 그 일대 차산의 차나무 수령도 대략 가늠해지기에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차수왕의 나이는 믿거나 말거나 상향 조정되기도 했다. 

낙수동 차수왕으로 명성을 얻은 낙수동은 고(古)6대 차산의 중심지 이우에서 동북향 5.5km 위치에 있다. 행정구역상 마흑채(麻黑寨)에 속한 낙수동은 이우를 대표하는 차산지로 인정받는 마흑채를 가기 위해 그냥 스쳐 지나가던 곳이었다. 해발 고도 1463m인 낙수동은 연평균 17도로 온화하고 연간 강수량도 1950mm 정도로 풍부해 차나무 성장에 좋은 환경을 갖고 있다. 지난해 기준 23가구가 살며 주민은 94명이다. 1명의 묘(苗)족을 제외하고 모두 이(彝)족으로 구성된 소수민족 마을이다. 주민 모두의 생계를 차에 의존하고 있는 전형적인 차산 마을이다.

낙수동의 원래 이름은 만락(曼落)이었다. 두 이름 모두 마을의 특수한 지형에서 유래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커다란 솥단지 바닥처럼 낮은 지대에 주거지가 형성돼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어 식수로 사용한다. 특이하게도 우물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지하수로를 통해 근처 하천으로 물이 자연 방류된다.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물이 넘친 적이 없다 한다. 마을 촌장 말을 빌리면 “1년 내내 매일 비가 쏟아져도 절대로 범람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7선녀가 내려와 달밤에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든 ‘물 빠지는 넓은 구멍이 있는 곳’이 낙수동이다.

낙수동은 1970년대부터 국가지침으로 왜화(倭化) 작업을 실시한 인근 지역과 달리, 차나무 주간과 가지가 인위적으로 잘려 나가지 않은 키가 훤칠한 차나무가 많다. 사람 키 높이를 넘기지 않도록 왜화시키는 이유는 채취 작업의 편리함과 생산성 때문이다. 4km 옆에 있는 마흑채는 왜화된 차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일찍부터 이우 지역을 대표하는 차산으로 ‘이우정산’이라는 광범위한 이름 대신 마을 이름을 차산지로 당당하게 밝히는 유명 차산이다. 고6대 차산인 만전(蠻磚), 만살(漫撒), 망지(莽枝), 유락(攸乐), 의방(倚邦), 혁등(革登) 등을 비롯한 그 일대의 여러 산을 통칭해 ‘이우정산(易武正山)’이라 한다. 

낙수동 마을 입구에 놓인 표지석 ⓒ 서영수 제공

자연재해에 인재 더해져 차수왕 사망

낙수동보다 다원 규모가 크고 생산량이 많은 마흑채는 보이차 판매로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다.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소수민족이 살던 산채에 석병(石屛)과 쓰촨(四川)성에 살던 한족이 명나라 때부터 집단으로 이주해 와서 차 산업에 종사하며 형성된 독특한 부락이 마흑채다. 낙수동 차수왕에 편승해 뒤늦게 알려진 낙수동은 생산량은 적지만 우월한 생태환경에서 서식하는 고차수로 만든 부드러운 감칠맛과 섬세한 향을 갖춘 보이차로 사랑받고 있다. 2013년 열린 제3회 이우차 경연대회에서 다른 차산들을 따돌리고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몸값을 한층 더 높이기도 했다.

낙수동 차수왕의 사망 원인은 누적된 인재와 자연재해로 결론지어졌다. 이미 서거한 낙수동 차수왕 사후처리를 놓고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지방정부가 내린 결론은 낙수동 차수왕의 ‘사망’을 ‘서거’라는 단어로 격상하고 낙수동 차수왕을 숭배의 대상으로 모셨던 사람들과 관광객을 계속 유치하기 위해 방부처리를 해서 보호벽을 만들어 살아 있던 원위치에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지나친 사랑과 유명세로 유명을 달리한 낙수동 차수왕은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라’가 돼 사람에게 헌신하는 볼거리로 전락했다. 지혜롭다는 인간이 자연에 저지르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보는 것 같다. 

    서쌍판납 지역의 고육대차산과 신육대차산

 

 

 고육대차산

 

 고육대차산(강북 6대차산) 비교

 구분

 유락

의방 

망지

혁등 

만전 

이무 

 수종특성

 중엽종에

가까운 대엽종

 소엽종중심의

여러수종

소엽중 

소엽종,

대엽종 

 대엽종

전형적인

대엽종 

 탕색(신차)

 투명한

금황색

 연한금황색에

약한 녹색기

 맑은 탕색에

연한 노랑

투명한

금황색 

 진한 금황색

 진한 금황색

 맛

부드럽고

함축적이다 

맑고 순수하며밝다

 밝고

부드럽다

부드럽고

깊은 여운 

진하며

깊고 넓은 맛 

부드럽고

깊은 감칠 맛 

 향

 청향,꽃향

 청향,난향

 청향

 청향,밀향

밀향, 난향 

난향,밀향 

 특성

시간이 갈수록

개성있는 향이

난다 

맑고 깔끔하며섬세한

운이일품이다.

 소엽종

특유의 향

깊이와

여운의 조화 

 그윽하고

깊은 여운

 난향을

중심으로

향과 맛의

하모니

 


 

신육대차산

 

맹해차산(신6대차산,강남 6대차산) 특성비교

 구분

남나 

포랑 

맹송 

파달 

경매 

남교 

 수종특성

 전형적인

대엽종

 전형적인

대엽종

 전형적인

대엽종

 전형적인

대엽종

 중엽종에

가까운 대엽종

관목 개량종 

 탕색(신차)

 진한 황금색

 진한 황금색

맑은 황금색 

맑은 황금색 

투명한

황금색 

 

 맛

 강하고 진한

남성적인 맛

 진하고 깊은

여운

밝고 진함 

맑고

개성적임 

달고

부드러움 

 

 향

 꽃향, 과일향

 꽃향, 밀향

 꽃향, 밀향

매실향 

밝은 꽃향 

 

 특성

 깊고 진한

맛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깊이,다양성,폭등에서

특성을

나타낸다

잠재된 깊은

맛과 향이

서서히

나타난다 

밝고 부드러운

가운데

개성이 숨어 있다 

 화려하고

외향적인

풍부한

세계를

보여준다.

 

 

 맹해에는 신6대차산이외에도 파사, 경홍의 맹송산(소맹송),만나등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산에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고품질의 차를 만들수 있는 고차수가 산재하고 있다.

   

 

 고6대차산과 신6대차산의 비교 

 

 구분

 수종

탕색 

스타일 

 향

맛 

 비고

 고6대차산

(강북)

 다양

다양

(수종에 따라) 

다양

(수종) 

청향,난향

위주 

부드럽고

여운이 깊다. 

보이공차의

원료(후숙) 

 신6대차산

(강남)

 통일

통일

(진한 황금색) 

다양

(개성) 

 밀향,꽃향

과일향

 강하고

진하며

회감이좋다.

 현대보이차의총아

(월진월향)

 

 맹랍현의 고6대차산 : 차기는 강하나 쓰고 떫은 맛이 적고 부드럽다

ㆍ 맹해현의 신6대차산 : 차기도 강하며 쓰고 떫은 맛도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다.

 

                                                     출처- "고차수로 떠나는 보이차여행"에서 부분 발췌

 

 

중국 이우(易武) 지역의 보이차(普洱茶)는 청나라 옹정황제(雍正皇帝)에게 1729년 처음 진상되면서 황실공차(皇室貢茶)로 지정됐다. 차마고도(茶馬高道)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우고진(易武古鎭)은 6대 차산에서 생산한 차의 집산지였다. 다이(傣)족 발음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이우’는 ‘미녀 뱀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스핑(石屛)의 한족들이 명나라 때 이주해 차를 만들었던 이우는 윈난(雲南)의 다른 차산과 달리 소수민족과 한족 문화가 공존해 왔다.

이우는 노차(老茶)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인 골동급(骨董級) 노차의 고향이다. 마시는 골동품으로 알려진 호급차(號級茶) 대부분이 100여 개가 넘는 이우의 차장(茶莊)에서 만들어졌었다. 공차(貢茶)제도가 사라진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절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대부분 호(號)로 끝나기에 호급차로 부르는 진품은 한 편에 수억원을 호가한다. 최근 홍콩 경매장에 나온 송빙호(宋聘號)와 생산시기가 1920년대로 추정되는 양빙호(楊聘號)는 2억7000만원과 3억원에 각각 낙찰됐다.

보이차 박물관 ⓒ 서영수 제공

이우는 최상급인 ‘골동급’ 노차의 고향

이우의 유명한 차장들은 농업 집단화와 함께 개인상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를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식량증가와 생산성만 강조한 대약진운동은 차나무를 마구 베어낸 자리에 옥수수를 심어버렸다. 당시의 차 가격은 동일 중량의 옥수수보다 비싸지 않았다 한다. 전통문화를 부인하며 공자마저 인정하지 않던 문화대혁명은 나이 어린 홍위병을 앞세워 보이차 장인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홍위병은 집 안과 창고에 남아 있던 보이차를 자본주의 자산으로 치부해 불태웠다. 전통 보이차의 흑역사가 진행되며 이우의 명성도 잊혀졌다. 

이우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초기에도 엄동설한이었다. 지방정부 차원에서 차 산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해도 차산은 황무지처럼 방치돼 있었다. 보이차 제조기술을 가진 인력이 이우에는 이미 없었다. 제조 기술자였던 사람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을 생각하면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신(新)6대 차산의 맹주, 멍하이(勐海)로 넘어간 보이차 생산의 주도권을 찾아오기는 요원했다. 이우의 전통과 명성을 부활시키는 행운의 봄바람은 뜻밖에도 대만에서 불어왔다.

이우를 찾아온 대만의 차상을 반기는 이우향장 장이(張毅)는 호급차 제조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어렵게 찾아내서 전통 제작기법으로 만든 정통 보이차를 만들었다. 수십 년 전 이우의 차를 가져간 추억이 있던 홍콩에서도 이 소식을 알고 주문이 들어왔다. 보이차 조공행렬을 재현한 ‘관마대도(官馬大道)’ 행사가 중국 CCTV의 협조로 2006년 4월2일 이우고진에서 열렸다. 9개 성, 3개 시, 76개 현을 거쳐 1만2000km를 말과 사람이 함께 걸어 베이징에 도착했다. 말과 사람이 모두 지쳐서 행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비용은 초과됐지만, 보이차를 중국 전역에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는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

이우의 차 산업이 다시 꽃피우게 되는 재미난 일이 때마침 벌어졌다. 150여 년 전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바쳐진 보이차의 한 종류인 금과공차(金瓜貢茶)가 자금성(紫禁城) 지하창고에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자금성에 함께 보관됐던 다른 종류의 차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보이차만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수용단(萬壽龍團)이라고 이름 붙여진 노차는 보이차태상황으로 모셔져 일반에 공개됐다. 중국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보이차는 신비한 차로 다시 주목받았다. 공차의 시발점이자 노차의 고향인 이우의 차 산업이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우는 밀려오는 차상들과 넘치는 관광객들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중국 서남쪽 끝에 있는 윈난성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시상반나(西雙版納)의 주도(州都) 징훙(景洪)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달려 이우에 도착했다. 보이차로 빛나는 시절을 재연하고 있는 이우는 이동거리도 짧고 대부분 포장도로이기에 다른 보이차 산지보다 찾아가기 편하다. ‘관마대도’ 행사 기념비가 있는 언덕과 초등학교 사이에 남아 있는 이우의 옛 마을은 가옥과 길은 잘 보존돼 있지만, 전통과 맥을 제대로 이어오는 이우의 후손은 많지 않다. 갑자기 불어온 보이차 붐에 편승해 보이차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오던 후손이 이름만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던 상호로 뜬금없이 보이차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이우에서 만들어지는 보이차는 대형 차장에서 제조하는 기계식 공정이 아닌 전통 수공 방식으로 제다(製茶)해 전통석모압병(傳統石模壓餠)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 많다. 영화관이었던 단독건물을 개조해 보이차 제조와 건조 창고로 사용하는 지인을 만났다. 산 높고 물 맑은 청정지역답게 밭이 아닌 산속에서 채취한 귀한 나물과 버섯으로 가득한 식탁 위의, 방목해서 키워 지방이 껌처럼 쫄깃한 돼지고기 수육과 민물생선 양념구이가 침샘을 자극했다. 대나무를 갉아먹고 사는 차 벌레를 튀긴 특식요리는 보기엔 엽기적이었지만 아삭한 식감이 새우깡보다 맛있었다. 자리를 차실로 옮겨 그가 만든 이우의 고수차를 마셨다. 이우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와 단아함을 가득 품고 있는 고수차를 시음하더니, 동행한 중국인 지인들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황후의 맛을 즐겼다.

보이차의 모양을 잡아가는 기술자 ⓒ 서영수 제공

넘치는 관광객으로 ‘제2의 전성기’ 맞은 이우

이우보다 먼저 차산지로 인정받았던 만사(漫撒)와 만라(曼腊)는 화재와 민란으로 차산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1728년부터 이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보이부지(普洱府志) 기록을 보면 당시 보이차는 금값의 두 배를 줘야 살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황후가 아니면 마실 수 없을 정도의 사치품이었다. 이우의 보이차는 흔히 이우 정산(正山)차로 통용된다. 정산은 특정한 산의 이름이 아니다. 이우와 만사 그리고 만라를 아우르는, 무려 9240만㎡에 달하는 여러 산줄기에서 나오는 차를 정산차에 포함시킨다. 해발 700m에서 2000m에 이르는 이 지역의 고수차 생산량만 90톤에 육박한다. 

이우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중국보이차고6대차산문화박물관’을 관리인의 안내로 둘러보고 신시가지로 변하고 있는 이우거리를 지나 보이차의 모료가 되는 마오차(毛茶)를 연도별로 보관하고 있는 차 창고를 찾았다. 창고 책임자의 안내로 생산시기와 마을에 따라 분류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수차를 만나보는 호사를 누렸다. 이우 정산이라는 막연한 이름보다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 명시된 차를 선택하면 좋은 차를 선별하는 지혜가 될 수 있다.

기낙(基諾)은 청나라 보이부(普府)에 소속된 고(古) 6대 차산 중 으뜸이었다. 생산량도 많고 차(茶) 품질이 좋은 만큼, 유명 차산지에서도 기낙 지역 찻잎을 가져다 가공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이 차를 전파했다는 설화가 있는 공명산이 바로 기낙산이다. 기낙의 당시 이름은 유락(悠樂)이었다. 명나라 말기부터 전성기를 누렸던 기낙의 차산은 청나라 때 민란과 화재, 전염병까지 덮치면서 황폐해졌다. 그 후 300년 동안 쇠퇴일로를 걷던 기낙이 보이차 열풍에 힘입어 기사회생하고 있다.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열리는 기낙족 전통 축제에서 대고무를 추고 있는 모습 ⓒ

청나라 때 민란과 화재로 차산 황폐화

기낙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40여 개 촌락으로 이뤄진 기낙족향은 운남성(雲南省) 서쌍판납태족자치주(西雙版納族自治州)의 주도인 경홍시(景洪市)에서 동북 방향 24km에 위치한다. 동서길이가 75km인 기낙산은 남북 사이도 50km가 넘지만 도로망이 촘촘히 발달해 사통팔달로 산길이 연계되며 도로 포장률도 산골답지 않게 60%에 육박한다. 기낙산은 해발고도가 575m부터 시작해 높은 지대는 1691m에 달해 일교차가 큰 산악지대 기후 특성을 갖고 있다. 최고기온은 40도를 넘나들고 연평균기온은 20도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연 강수량은 1400mm로 풍부하다.

기낙족향은 인구 1만8000여 명 중 97%가 기낙족이다. 기낙족은 1979년 중국국무원이 공식 인정한 마지막 소수민족으로 등재됐다. 한장어계(漢藏語系) 장면어족(藏緬語族)에 속하는 기낙족은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어 민족에 대한 고대자료가 없다.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어른’이라는 뜻을 가진 소수민족 ‘기낙’은 원시 씨족사회 흔적이 남아 있어 장손을 중심으로 대가족이 공동체를 이뤄 거주한다. 부친이 돌아가시면 1년 후에 새집을 지어 자녀들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신축한 집을 바치는 ‘상신방(上新房)’이라는 독특한 의식을 한다. 

기낙족은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특무극(特懋克)’이라는 전통 축제를 벌인다. 태양을 상징하는 커다란 북을 마을 한가운데 매달아놓고 북을 두드리며 춤추는 대고무(大鼓舞)를 필두로 죽간무(竹竿舞)와 파종무(播舞)를 추며 음식을 나눈다. 여자들은 방직기술과 자수 솜씨를 겨루며 풍성한 한 해를 기원한다. 제갈공명이 촉나라로 회군할 때 따라가지 않고 차를 재배하며 기낙족과 동화된 병사들의 후예를 주락족(落族)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기낙족은 제갈공명을 차를 전파해 준 차신으로 믿고 있다. 제갈공명이 구리로 만든 커다란 징을 남겨뒀다고 알려진 기낙산을 공명산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낙족은 음력 7월23일 제갈공명이 태어난 날에 맞춰 봄에 딴 첫 찻잎을 바치고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는 ‘차조회(茶祖會)’를 매년 이어간다. 외지인들이 원주민을 속이고 사기도박으로 차산을 빼앗자 화가 난 토착민들이 차산에 불을 지르고 유혈충돌이 벌어졌을 때 제갈공명이 화해시켰다는 설화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구전돼 오는 곳이 기낙이다.

기낙족은 숯불로 찻잎을 구워 끓여 마시는 화소차(火燒茶)라는 특이한 전통차 제조기법과 량반차(凉拌茶)라는 원시 형태의 차 섭취 풍습이 있다. 량반차는 찻잎을 기름과 간장으로 버무려 나물로 먹는 음식이다. 찻잎을 죽통 안에 다져넣어 숯불로 열을 가해 만드는 죽통차(竹筒茶)와 찻잎을 달이고 졸여 검고 끈적한 상태로 만든 차고(茶膏)는 특화된 기낙족 산물이다. 차고를 물에 녹여 마시면 급체와 설사를 잡아주고 딸꾹질을 멈추게 한다. 부은 상처에 바르면 부기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기낙은 1728년까지 청나라 정부가 아닌 지방 토호세력이 지배했다. 당시 한족 상인이 살해당하고 토사가 이를 묵인하는 일이 있었다.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대항하는 소수민족을 참살하고 차산과 마을을 불태우는 ‘겁상해민(劫商害民)’을 통해 청나라 정부가 관리를 보내 직접 다스리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시행했다. 1729년(옹정 7년) 청나라는 기낙의 옛 지명인 유락에 보이부를 처음 설치했다. 종이품 관직에 해당하는 동지(同知)를 책임자로 삼고 유격전에 능한 무관에게 병사 500명을 주어 보이부에 주둔하게 했다.  

기낙에 설치한 보이부는 기낙을 비롯한 고 6대 차산에서 황실에 바치는 공차와 차세(茶稅) 징수임무를 수행했다. 기낙 지역을 넘어 라오스와 경홍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홍 일대는 전통적으로 태족(族)이 장악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경홍시가 주도인 서쌍판납은 태족 자치주다. 청나라 정부의 직접 통치에 반기를 든 태족은 기낙족과 연합해 봉기했다. 차산과 마을은 또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끈질긴 저항은 3년이 지나도록 진압되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던 차산은 황무지로 쇠락했다. 

기낙은 황폐화되고 악성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렸다. 청나라 관병이 병마에 시달리면서 토벌은커녕 기낙에 주둔하기조차 힘들어졌다. 1735년 청나라는 치욕을 감수하고 보이부를 사모(思茅)로 이동시켰다. 개토귀류 정책을 수정해 의방(倚邦)의 소수민족을 세습관리로 임명하고 기낙을 통제하도록 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77년 동안 기낙족은 보이차를 만들 수 없었다. 기낙에서 채취한 찻잎을 상인들이 수매해 이무(易武)와 사모, 의방에서 차를 만들었다. 고 6대 차산의 선두주자 기낙은 몰락하고 의방과 이무가 새로운 보이차 강자로 부각됐다.

기낙의 찻잎은 인도와 유럽에도 팔려 나갔다. 1886년 영국인 클라크가 쓴 책 《귀주성과 운남성》을 보면 영국 동인도회사가 콜카타(Kolkata)와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기낙 찻잎을 수입해 관리한 기록이 나온다. 청나라는 망했어도 기낙의 수난사는 끝나지 않았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피해 들판을 떠난 기낙족은 깊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느라 차밭을 불태워야만 했다. 1941년 이무에서 차 장사를 하는 양안원(楊安元)이 기낙족 전통과 관습을 무시했다가 충돌이 생겼다. 기낙족은 인근에 거주하는 요족(族)과 합니족(哈尼族)을 규합해 폭동을 일으켰다. 진압을 위해 국민당 군대가 출동했다. 

기낙산 자락 고차수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 서영수 제공

20세기 말부터 보이차 열풍 시작돼

기낙의 산야는 소수민족과 함께 죽어갔다. 격랑의 시기가 지나고 1970년대 측량 결과 청나라 초기 700만㎡가 넘던 다원은 150만㎡로 줄어 있었다. 20세기 말부터 불어온 보이차 바람이 뒤늦게 기낙에도 불기 시작했다. 밀림 속에 숨어 있던 고차수(古茶樹)들이 잠을 깨기 시작했다. 고차수로 만든 고수차 가격이 급등하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차’로 고난받던 기낙족에게도 훈풍이 불어왔다. 중국 최후의 소수민족 기낙족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색자원, ‘차’가 이번에는 전화위복이 되기 바란다. 

쓸쓸함이 넉넉했다. 정적을 깨고 남정네들이 장작을 패는 소리만 의방(倚邦) 옛 거리를 울리고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의방은 여전히 한적한 산골마을이었다. 청나라 시절 의방 일대는 19개 자연부락의 인구가 9만 명이 넘었다. 차를 사고파는 봄철에는 외지에서 온 상인과 노동 인력까지 가세해 20만 명이 의방차산을 누비고 다녔다 한다. 현재는 의방을 포함한 13개 마을을 다 합쳐도 214가구에 936명이 살고 있다.

의방은 명나라 말기부터 석병(石屛)의 한족과 초웅(楚雄)에 거주하던 이족(彛族)이 집단이주해 차 산업을 일으켰다. 청나라 초기에 사천성(四川省) 농부들이 유입되면서 사천에서 가져온 소엽종(小葉種) 차나무를 대량 증식시켰다. 소엽종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보내고, 전설적인 유명 차창에서 소엽종으로 보이차를 만들던 의방은 고(古) 6대 차산 가운데서도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곳이다. 해발 1950m에서 채취한 소엽종 찻잎을 우리면 쓴맛은 적고 부드러운 단맛이 올라온다.  

소엽종 차나무의 새싹은 중국 현지에서 고양이 귀라고도 불린다.

소엽종 보이차, 정부의 보이차 개념과 상충

의방에서 만들어온 소엽종 보이차는 2008년 중국 정부가 정한 보이차 개념과 상충된다. 운남성 표준계량국이 정의한 보이차는 ‘운남 지역 대엽종 차나무 잎을 쇄청한 원료로 만든 생차(生茶)와 숙차(熟茶)’지만, 대엽종이 아닌 소엽종으로 만든 보이차가 청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엽종 보이차는 중국 정부가 공표한 보이차 정의에 맞지 않다는 논란이 가열되면서 소엽종 보이차의 원조인 의방은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 옛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의방을 찾는 외지인이 많이 늘었다. 

의방 가는 길은 크게 두 방향이 있다. 운남성 서쌍판납주의 주도인 경홍시에서 이무(易武)로 가서 상명(象明)을 거치는 길과 기낙(基諾)을 경유하는 방법이다. 새로 조성된 기낙 민속촌도 볼 겸 필자는 기낙 방향으로 갔다. 중국 전체 인구에서 2만 명도 채 안 되는 소수민족 기낙족은 15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미혼남녀의 교제를 위해 마을에서 제공하는 공방(公房)을 사용할 수 있다. 기낙 민속촌은 산허리를 향해 올라가며 기낙족의 조상신과 주거풍속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산등성이를 다듬어 만든 광장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큰 북을 치며 대고무(大鼓舞)를 추고 있었다. 산나물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와 기낙족이 만든 보이차가 공연 중에 제공됐다.   

의방에 햇살이 남아 있을 때 도착하기 위해 민속공연 도중에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하산 길에도 전통 베틀로 베를 짜는 작업장과 철을 다루는 대장간이 눈길을 끌었다. 발 딛는 부분이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진 대나무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기낙족 청년의 기예가 돋보였다. 불쇼와 민속전시관도 있었지만 산길로 140km를 더 가야 하는 만큼 사륜구동을 타고 의방으로 향했다. 제갈공명이 말 탈 때 발을 끼우는 쇠로 된 발걸이 한 쌍을 묻어두고 갔다는 혁등(革登)차산을 지나 의방에 도착했다. 의방은 제갈공명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남겨뒀다는 설화가 있다. 

의방 일대를 지배했던 태족(傣族)은 의방을 마랍(磨腊)이라 불렀다. 마랍은 ‘차 마을’이란 뜻이다. 360㎢에 달하는 고산지대에 다민족이 어울려 살았던 중심지가 의방의 옛 거리다. 경제와 지역정치의 중심 무대가 된 의방의 부흥은 기낙 지역의 민란 덕분에 이뤄졌다. 1729년(청, 옹정 7년) 기낙에 보이부(普洱府)를 처음 설치한 청나라는 민란과 전염성이 강한 풍토병을 피해 1735년 사모(思茅)로 보이부를 옮기며 유화정책을 썼다. 중앙관리가 아닌 의방의 토착세력을 세습관리로 임명하고 기낙을 통제하도록 했다.   

① 기낙족이 민속촌 산등성이에 모셔놓은 조상신 ② 칼날사다리를 내려온 기낙족 ⓒ 서영수 제공

차나무 살리기 위해 큰 나무 편법 고사

의방 토사(土司)로 임명된 조(曹)씨 가문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를 이어 의방의 번영과 몰락을 함께했다. 돈이 넘치던 시절 의방 토사는 관제묘(關帝廟·관우를 모시는 사당)를 만들어 더 많은 재물을 기원하기도 했다. 관우는 중국에서 재물신(財物神)으로 통한다. 관제묘를 중심으로 향우회 성격의 상인조합이 형성됐다. 석병회관을 필두로 사천회관과 초웅회관이 들어서며 출신 지역별로 회관을 만들어 상인들이 단결했다. 토사 집안으로 위세를 떨치던 조씨 가문도 차 산업에 명운을 걸었다.

의방에서 만든 차는 중국을 넘어 티베트와 홍콩, 마카오로 수출됐다. 월남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에도 보이차가 전해졌다. 의방에 속한 만송(曼松)은 대엽종 차나무와 소엽종 차나무가 혼재한 지역으로 이 둘을 섞어 만든 차가 높은 평가를 받아 만송차를 황실공차로 보냈다. 황실공차는 청나라 조정대신과 외국 사신에게 하사품과 답례품으로 사용됐다. 청나라 말기에는 민란과 치안부재로 차 산지에서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昆明)까지도 차 운송이 원활하지 않게 됐다. 

의방의 전성기를 가져온 민란은 의방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초웅 지역의 석양은광(石洋銀鑛) 운영권을 놓고 한족과 회족(回族)이 충돌한 사건을 부당하게 처리한 청나라 정부는 1856년 무고한 회교도 4000여 명을 참살한 ‘곤명 대학살’도 수수방관했다. 두문수(杜文秀)와 함께 운남에 거주하는 회족들이 판데(Panthay)의 난을 일으켰다. 청나라에 무시당하던 운남의 다른 소수민족들도 민중봉기에 합류했다. 두문수는 대리(大理)를 점령해 평남국(平南國)을 세워 중국 최초 회교 국가를 선포했다. 

의방에 두문수가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회족과 연합한 소수민족이 의방을 공격해 토호 세력과 상인을 살해하고 차산을 불태웠다. 사흘 밤낮을 휩쓴 화재는 차산을 초토화시켰다. 1867년 곤명 공격에 실패하면서 세력이 꺾인 두문수는 1872년 죽었지만, 민란 와중에 직격탄을 맞은 의방의 차 산업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다. 의방 옛 거리는 퇴락한 건물 앞에 방치된 돌사자만이 옛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는 의방 옛 거리를 벗어나 마을사람과 함께 차산으로 걸어갔다. 밀림 사이로 듬성듬성 서 있는 차나무가 밭에서 재배하는 차나무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산비탈로 내려서니 공터처럼 황량한 공간에 차나무만 서 있었다. 거목들이 밑동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죽고 있었다. 마을사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어투로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 때문에 차나무 일조량이 부족한데, 정부에서 벌목을 못하게 해 편법으로 큰 나무들을 고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략난감이었다. 돈 앞에 자연은 여기에서도 우선순위를 양보하고 있었다. 

빙도(冰岛)

차 이야기/보이차 산지 2019. 10. 1. 20:23 Posted by 거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