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차나무의 원생지 맹고(勐庫)대설산의 천년만무(萬畝) 야생 고차원

 

중국은 세계 차의 원생지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차의 뿌리가 어디에 있을 까? 이번에 우리가 세계차의 뿌리가 있는 곳, 중국 운남성 임창(臨倉)시에 대해 소개해보려고 한다.

임창시는 중국 운남성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미얀마와 인접하고 있으며 보이차, 홍차와 사탕수수로 유명하다. 임창은 보이차의 사대생산 지역 중에서 면적이 가장 크고 야생형(野生型) 차나무, 과도형(過度型)차나무와 재배형(栽培型) 차나무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10대 보이차인 빙도(氷島)도 임창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임창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는 고수차 산지는 석귀(昔归,시귀이), 소호새(小戶賽)와 대호새(大戶賽)등이 있다.

운남성 보이차 생산 지역

임창시의 해발차(海拔差)는 매우 크며 가장 낮은 곳이 해발 450m, 가장 높은 곳이 3504m이다. 임창시의 차원은 해발 900~2720m의 구간에 분포되어 있으며 재배형과 과도형 차나무는 주로 해발 900~2200m에 위치해 있고 야생 차나무는 해발 2200~2700m 구간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임창에서 해발이 가장 낮은 보이차 생산지역은 임상구(臨翔, 린샹취) 방동향(邦東鄕)의 석귀(昔歸, 시궤이)차산(900~1000m)이다. 석귀차산은 임창시에서 80km로 차로 약 3시간 정도면 갈수 있다. 석귀차가 최근 몇년에 인기가 많아졌지만 생산량은 매우 적어서 가격이 비싼 편이다. 석귀차산의 고차수 나무의 수령은 대부분 200년 정도, 가장 큰 차왕수는 800년 정도, 나무 아래서 '망녹웅이(蟒鹿熊二)'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있다.

석귀보이차의 특징은 탕색이 밝고 투명하며, 향기 짙고 지속성이 좋다. 떫은 맛과 쓴 맛이 약하고 단맛을 많이 느낄 수 있다. 또한 회감이 빠르고 마시자마자 입안에 침생기는 현상을 느낄 수 있다. 여러자료에 따르면 석귀차산에서 차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차를 따지 않는다고 하지만 필자가 2015년 8월달에 찾아갔을 때에 하차를 따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1아5엽(1창5기)을 따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난다. 

맹고 대설산 2700년 수령의 1호 야생 차왕수

임창의 해발이 가장 높은 보이차 생산지역은 세계차나무의 원생지이자 전세계 면적이 가장 큰 야생고차원인 쌍강현(雙江縣) 맹고(勐庫)대설산의 천년만무(萬畝)야생고차원이다. 

차원의 면적은 240만 무(畝, 마지기) 이상, 8만 그루의 야생 차나무가 모여 성장하고 있어 매우 장관이다. 차원 내에 성장하는 큰 야생 차나무가 매우 많고 야생대차수(大茶樹) 1호는 해발 2700m, 2호는 2670m, 3호는 2640m의 위치에 있다. 

1호 야생대차수가 높이 25m, 수령은 약 2700년정도 되었고 현재 1호~3호 나무가 모두 보호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지만, 필자가 2015년 1월달에 올라갔을 때 마침 눈이 많이 내려 차나무 가지가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부러져 있어서 부러진 가지의 새순을 구경하고 맛볼 수 있었다.

야생차의 특징은 찻잎과 새순이 매우 작고 두껍고 기름바른 듯이 윤기가 나며 향기가 강하고 차탕은 매우 밝고 투명하고 떫은 맛과 쓴맛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특히 고수홍차의 맛, 향기와 탕색은 매우 탁월하다.  

보이차의 과도형 차나무를 고찰하기 위하여 필자가 2015년 8월달에 운현(云縣,윈씨안) 만만진(曼灣鎭,만완찐) 백앵산(白莺山, 바이잉산)에 찾아갔다.

백앵산 과도형 차왕수

임창시에서 출발하여 백앵산으로 향하는 길은 초행길이라서 네비게이션을 따라서 가다가 옛날의 산길을 가게 되어 고생을 많이 했지만 일반 외지인들이 잘 찾아 가지 못한 결결평(決決坪, 쥐예쥐예핑)과 대평장(大平掌, 따핑장)마을의 우수한 보이차를 발견하여 보람을 느꼈다. 결결평과 대평장 두개 마을을 지나고 약 1시간반 더 가서 목적지인 백앵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앵산은 원래부터 포랑족 사람들이 차를 재배하면서 살고 있었지만 현재는 주로 이족(彛族)사람들이 살고 있다. 포랑족 사람들이 이사갔다는 설이 있고 이족의 힘을 이기지 못하여 이족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었다.  

백앵산의 해발 2220m에는 300년 이상의 고차수가 2000 그루 이상이며 가장 큰 차나무의 수령이 2000년 이상되었으며 ‘이알자(二嘠子, 얼가즈)종에 속한다.

백앵산지역의 차나무 품종은 다양하며 '본산차(本山, 번산)', '이알자차(二嘠子, 얼가즈)', '흑조자차(黑條子, 헤이티오즈)등이 있다. 백앵산의 차나무는 주로 마을 주변에 분포되어 있으며 보편적으로 키가 크고 굵다.

백앵산의 보이차 향기는 특별하고 떫은 맛과 쓴 맛이 약하며 회감은 보통이지만 차에서 야산의 특유한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봉경 향죽청 재배형 차왕수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홍(滇紅)의 산지인 봉경현(鳳慶縣, 펑칭씨안)의 소만진(小灣鎭, 샤오완찐) 금수촌(錦秀村, 진시유츠운) 향죽청(香竹菁,샹주칭) 차왕자연촌에서 3200년된 재배형 차왕수가 지름은 1850mm으로 세계에서 가장 굵은 고차수로 ‘China Records’에 수록되었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보이시(普洱市)는 운남성의 서남부에 위치하여 남쪽은 서쌍판납주(西双版納州), 북서쪽은 임창시(临滄市)와 접경한다. 청나라때 옹정황제(雍正皇帝,1729년)가 보이부(普洱府)를 설립한 기록이 있으며,  2007년 1월 21일 전에는 보이시를 사모시(思茅市)라고 하였다.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 지도(좌측)와 보이시 지도(우측)

현재 보이시는 운남성에 직속하는 도시로 총인구 258만명(2012년 기준), 1개 구와 9개 현(縣)을 관할하고 있다. 보이시에 관할되는 1개 구는 (5)사모구(思茅區), 9개 현은 (4)녕이(寧洱, 녕얼; 이족 彝族), (10)묵강(墨江, 뭐지앙; 하니족 哈尼族), (9)경동(㬌東, 징동; 이족), (7)경곡(㬌谷,징구; 이족), (8)진원(鎭沅, 찐위안; 이족/하니족/랍호족 拉祜族), (6)강성(江城, 지앙청; 하니족/이족), (1)맹련(勐連,멍리안; 태족 傣族/랍호족/와족 佤族), (3)란창(瀾滄, 란창; 랍호족), (2)서맹(西勐, 시멍; 와족)이다.

보이시에는 14개 소수민족이 살고 있으며 총인구의 61%를 차지하고 있다.

보이시의 최저 온도는 약 8℃(11월~2월), 최고 온도는 약 28℃(4월,5월), 전년 평균온도는 약 20℃ 이다.  강수량은 주로 3월과 8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년 평균강수량은 약 1500mm 이고 1~3월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시 지역의 상대습도는 일년 사계절 거의 70% 이상이며 전년 평균 습도는 약 79%이다.

보이시는 과거에 보이차의 원산지와 집산지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현재의 보이시는 보이차 뿐만 아니라 커피와 연초(煙草-담배) 재배도 규모화되어 있다. 현재 보이시의 보이차 재배면적은 325만 무(畝,마지기), 커피의 재배면적은 43.9만 무(2011년 기준)이고, 보이시의 커피생산량은 중국 전국 생산량의 50%, 운남성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보이시 주변의 관할 지역 내에 많은 보이차 산지들이 분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보이시내에도 곳곳에 보이차 문화가 풍기고 있다. 세마하공원(洗馬河公園)에 차조(茶祖) 제갈공명(諸葛孔明)이 남정(南征)시 말에게 목욕시키는 조각상, 도생근공원(倒生根公園)에는 마방(馬幇)들이 휴식하는 조각상, 세기광장공원(世紀廣場公園)에서는 보이차를 가공하는 조각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중국다인문화명인원(中國茶人文化名人園)에서 중국 고대부터 차를 좋아하는 명인의 조각상을 모두 볼 수 있다. 또한 세계차문화명인원(世界茶文化名人園)에서 중국차를 세계적으로 전파시키는 한국의 김대겸, 일본의 스님 사이쵸와 영국의 캐서린 왕비 등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보이시 도시 주변에 영반산만무차원관광원(營盤山萬畝茶園觀光園)과 차수량종시범원(茶樹良種示范園)에서 매자호공원(梅子湖公園)까지의 차원관광대로(茶園觀光大道)가 있고 반구파(斑鳩坡) 차마고도가 있다.

보이시 지역에는 많은 고수차원이 분포되어 있으며 잘 알려져 있는 몇 개 지역은 다음과 같다.

① 경매산(景邁, 징마이) 만모 천년 고차원

경매산(景邁, 징마이)만모 천년 고차원

란창현 혜민향 경매촌의 천년 고수차원의 면적은 약 1,000무(亩)(약 20만평)이고, 팡씨예지오(螃蟹脚)라는 겨우사리가 차나무에 기생하는 것이 경매지역 차의 특징이다. 경매의 차 재배 역사는 1,300년 이상이고, 고수차원은 해발은 1,400m에 위치해 있다.

② 방외(邦葳, 방위이) 고차수

방외(邦葳, 방위이) 고차수(사진출처: 澜沧信息网 谭春摄影)

방위에는 대량의 고차수가 분포되어 있다. 1991년에 수령 1,000년 이상의 대차수를 란창현 문동향(文东乡,우언동씨앙)방위촌에서 발견하였다. 차왕수가 위치하는 곳은 해발 1,880m이며 차나무의 체목 지름은 180cm, 차나무의 높이는 12m이다. 방위 고차수는 야생과 재배 차나무 중간의 과도형(過渡型) 차나무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도형 차나무이다. 1997년에 중국에서 차에 관한 우편을 4개 발행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방위 고차수였다.

③ 경곡민락진(㬌谷民樂鎭)의 앙탑대백차(秧塔大白茶,양타따바이차)

희소성과 우수한 품질로 잘 알려진 앙탑대백차는 다른 차와 차이가 매우 크고 뛰어나다.  대백차로 만든 '백룡수공차(白龙须贡茶, 바이롱쉬공차)'는 청나라 황실에서 차중진품(茶中珍品)으로 대접을 받았다. 앙탑대백차의 산지는 경곡(景谷, 징구) 민락진(民乐镇, 민러진)으로 이 지역의 앙탑대백차의 재백 역사는 164년이며, 청나라(1840년)때 진(陳)씨 사람이 맹고차산에서 10개 찻씨를 가지고 와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고차수는 총 100여 그루만 남아있고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5.8m, 나무 몸통의 지름은 280cm이다. 양탑대백차는 1981년에 운남성 8대 명차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대백차의 재배 면적은 6000무(120만평)로 확대 되었다.

④ 진원(镇沅,쩐위안) 천가채(千家寨,치옌찌아짜이) 고수차림

진원(镇沅,쩐위안) 천가채(千家寨,치옌찌아짜이) 고수차림

1970년에 발견된 해발 2,100~2,500m에 위치한 천가채의 야생고수차림의 면적은 4,200무(亩)(84만평)이상이고, 진원지역의 고수차림은 약 26만무(亩)(5,200만평)이다.  진원의 천가채에는 큰 차왕수 두 그루가 있으며 천가채 1호 야생고차수의 수령은 2,700년이고, 2호 차왕수의 수령은 2,500년이다.

⑤ 녕이현(宁洱县, 닝얼현) 고차원, 곤록산(困鹿山, 쿤루산) 야생차왕수

고수차원은 주로 봉양(鳳陽,펑양)과 파변(把邊,바볜)에 위치하여 총면적은 10,122무(亩)(200만평)이상이다. 해발 1,800~1,900m의 곤록산에는 25m의 고차수가 아직 남아 있다.  해발 1,040~1,800m의 녕이현 차원산(茶源山, 차위안산)에는 높이 21.3m의 야생고차수가 있고, 녕이현 시내의 청진(淸眞)사원에 450년의 차나무가 남아있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시내에 위치한 고차수이다.
 

노반장, 태족(傣族)의 언어로 ‘물고기가 있는 곳,...다원(茶園)면적 총 4,490마지기, 전체 보이차 수확량은 매년 60톤 정도

포랑산 해발 1700m 깊은 산속에 위치한 노반장 마을 모습

[칼럼니스트 이수백] 노반장(老班章)은 중국 운남성(雲南省) 서쌍판납주(西双版納州) 맹해현(勐海縣) 포랑산(布朗山) 해발1700m의 깊은 산속에 위치하는 130 가구, 인구 534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하니족(哈尼族) 시골 마을이며, 여기는 아열대 고원기후로 여름에 덥지 않고 겨울에 춥지 않아서 생활하기가 매우 적합한 곳이다.

노반장이라는 태족(傣族, 중국에서 다이족이라고 함)의 언어로 ‘물고기가 있는 곳’이다. 노반장 마을은 맹해현에서 불과 43km이지만 험한 진흙길이라서 4륜구동의 차량으로 약 2시간이나 걸린다. 그러나 매년 3월말과 4월초만되면 노반장에 찾아오는 전국각지, 아니 세계각지의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리고 찾아온 사람들이 몰고 온 차 중에 비싼 외제차가 많다. 그래서 보이차 애호가들 중에 ‘노반장을 모르면 간첩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노반장 보이차가 보이차 중에서 명성이 높다.

노반장 마을 입구 과거(2015년전)와 현재 모습

노반장 보이차가 진승호차창을 통해 알려졌고 노반장 보이차 가격도 10년 사이에 1000배이상 급등해서 노반장 마을의 주민들이 빈곤에서 탈출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매년 마을 전체의 보이차 수입은 1억 위안(약 180억원)정도로 1인당의 연평균 수입은 187만위안(약 3400만원)이다. 부유해진 노반장 사람들이 집집마다 마을에서 백 평 이상의 새집을 짓고 맹해현(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서 집이나 상가를 구입한다. 차량도 2대 이상 보유하고 마을에서 사용하는 것과 도시에서 사용하는 것을 따로 한다.

노반장 사람들이 정말 돈이 많지만 옛날부터 은행에 돈을 맡기는 습관이 없었다. 물론 과거에는 노반장인들이 너무나 가난하고 돈도 없어서 당연히 은행과 가까이 지낼 일도 없겠지만 몇 년 전부터 마을의 입구에 은행이 들어섰다.

이 은행은 노반장 마을 주민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반장에 들어가는 도로도 새로 깔고 있고 마을입구의 대문도 세 번째 짓고 있다. 저자가 2012년부터 매년 노반장에 2번씩 다녔고 마을의 동네 의사인 고건총(高建總) 사장과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노반장인들의 생활변화를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차에 비해 차기(茶氣)가 강해서 보이차 애호가들에 의해 보이차 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노반장 차

노반장보이차는 흰 솜털이 덮힌 길고 굵은 찻잎의 단단한 외형은 인상적이며, 강한 난향(蘭香)에 달콤한 밀향(蜜香)까지 느낄 수 있어서 마치 봄에 꽃이 활짝 핀 과수원에 온 것과 같다. 노만장 보이차 특유의 쓰고 떫은맛이 느끼는 순간 바로 강한 회감(回甘)으로 혀와 구강에 군침이 마치 샘물처럼 흘러나오면서 구강 및 혀, 목구멍까지 달콤하고 상쾌하며, 또한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하고 차탕을 담은 찻잔에도 강한 잔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노반장 보이차의 특징이다. 다른 차에 비해 노반장의 차기(茶氣)가 유일하게 강해서 보이차 애호가들에 의해 보이차 중의 ‘왕’이라고 불린다.

노반장 보이차(좌측 위쪽), 高建總社長의 茶莊(좌측 아래), 차를 만들고 있는 고건총대표

노반장 보이차는 맛있어서 찾는 사람들이 많고 또한 생산량이 적어 가격은 매우 비싸서 시장에 서 유통하는 노반장 보이차 중에 가짜가 상당이 많다. 노반장 마을의 다원(茶園)면적은 총 4,490마지기이며, 전체의 보이차 수확량은 매년 60톤 정도 불과하다. 그래서 진짜 노반장 보이차는 거의 절반 정도 진승호차창이 구매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차산에 찾아오는 보이차 애호가들이 구매하여 수장함으로써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량이 적을 수 밖에 없다.

老班章 高建總社長의 茶園과 家族들 모습

노반장의 주민은 하니족이며, 1476년에 현재 노반장인의 조상은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에 노반장은 노만아(老㬅峨) 마을의 포랑족(布朗族)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노반장의 차나무도 기원 300년 전후에 포랑족 사람들이 심은 것이었다. 노반장 하니족의 조상은 가까운 격랑화(格朗和)에서 이 곳으로 이사 올 때에 친절한 노만아 마을의 포랑족 사람들에게서 노반장 마을, 주변의 산림과 몇 백년된 차나무를 무상으로 받았다.

그래서 2000년까지 몇 백년 동안에 노반장의 하니족 사람들이 은혜를 갚기 위해 해마다 노만아 마을의 포랑족 사람에게 곡물과 짐승을 바쳤다. 노반장 마을 인구의 증가로 1950년 전후에 부분 마을 주민들이 노반장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이 곳을 신반장(新班章)이라고 하였다.
 

빙도, 태족(傣族)의 발음으로 ‘마을 입구의 대문을 대나무로 만든 곳’....5개지역중 '빙도노채' 가장 비싸

 

빙도 위성지도

[칼럼니스트 이수백] 빙도(冰島)는 중국 운남성(雲南省) 임창시(临滄市) 쌍강현(双江縣) 맹고진(勐庫鎭)에 있는 맹고대설산(방마邦馬대설산라고 하기도 함)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발 1400m~2500m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빙도 보이차는 사실상 정확하게 말하면 빙도촌민위원회(冰島村民委員會)보이차이다. 빙도촌민위원회에 ‘빙도(冰島)’, ‘지계(地界)’, ‘나오(糥伍)’, ‘남파(南迫)’, ‘파왜(垻歪)’ 5개 마을을 포함되어 있다. 파왜 마을과 나오 마을은 대설산의 동반산(東半山)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머지 3개 마을은 모두 대설산의 서반산(西半山)에 위치하고 있다.

5개 마을에서 생산된 보이차는 모두 빙도보이차라고 하지만 가격 차이가 있다. 양이 적고 가격이 가장 비싼 보이차는 빙도노채(冰島老寨)에서 생산된다. 빙도라는 발음은 태족(傣族)의 발음으로 ‘마을 입구의 대문을 대나무로 만든 곳’의 뜻이다. 현재 한자 ‘冰島’로 표기하지만 과거에 ‘丙島’과 ‘扁島’로 표기하였다. 빙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이 모두 납호족(拉祜族)이며 이 지역에서 정착한지 500여년이 되었다.
 

빙도고차수(좌측)와 빙도노체(우측)<사진=李金润提供>

빙도노채(冰島老寨)는 해발 1500m이고 맹고진에서 약 9km, 마을은 42가구(182명)으로 이루어진다. 빙도노체의 고수차(古樹茶) 재배면적은 약 100마지기이며, 70년정도의 소수차(小樹茶)의 재배면적은 약 700 마지기로 노반장(老班章)보이차 재배면적의 20%정도 되며, 시장에서 빙도노채의 보이차 가격은 노반장보다 비싸고 가짜 빙도차가 많다. 그래서 진짜의 빙도보이차 맛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매년 춘차가 나는 3~4월에 빙도마을에 찾아와, 차나무 밑에서 기다린다. 희소성 가치는 빙도노채 보이차가 비싸다는 이유 중의 하나지만 빙도 보이차가 정말로 맛있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노반장보이차는 보이차 애호가들의 사랑이라면 빙도보이차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국민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빙도노채의 고수차의 쓰고 떫은 맛이 매우 약하고 차탕의 맛은 처음 3번째까지는 맛의 특별한 것을 별로 못 느낄 수도 있지만 4번째부터 빙도 보이차의 특유한 각 설탕의 청량함과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다.

 氷島老寨 金潤茶坊 (좌측) 과 氷島 李金潤社長

희소성으로 빙도노채의 고수차(古樹茶)가 중국 시장에서 노반장보다 비싸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빙도노채의 보이차는 가짜가 매우 많으며 가격도 차이가 매우 크다. 일반 소비자가 쉽게 구입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가 보이차 논문을 쓰기 위해 몇 년 동안 많은 차산(茶山)을 다니면서 빙도노채의 이금윤 사장과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매년 봄에 소량의 빙도노채 보이차를 맛볼 수 있었다.

남박노채(南迫老寨)는 해발 1500m, 맹고진에서 31km, 빙도노채에서 약 4~5km이며, 마을은 71가구(269명)로 이루어진다. 남박노채의 고차수는 100마지기 이상으로 빙도노채보다 많다. 남박노채에 통한 큰 길이 없으며 산길로 걸어서 1시간 이상의 거리에다 전기도 없어서 몇 년 전에 정부의 도움으로 마을 전체가 현재의 남박신채(南迫新寨)로 이전했고 10여 가구만 이주하지 않고 그대로 노채(老寨)에 남아있다. 남파노채의 고차수 다원은 가파르고 무성한 원시림 속에 혼생(混生)하고 있다. 남박노채에 500년 이상의 고차수가 많고 빙도노채의 고차수보다 더 오래된 고차수가 10여 그루이나 되며, 특히 남나산(南糥山)의 800년 차왕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차나무가 2 그루가 있다. 빙도의 5개 마을에서 남박노채의 고차수가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남박노채(좌측)와 나오노체(우측)<사진=李金润提供>

나오노채(糥伍老寨)는 빙도촌위원회에서 25km 떨어져 있으며, 해발 1400m, 마을은 총 32가구로 이루어지며 현재의 나오 마을(나오신채/糥伍新寨)은 몇 년 전에 이주한 곳이다. 나오 마을의 고차수(古茶樹)는 70~80 마지기 정도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오노채 마을 주변에 분포되어있어서 2~3시간 가량의 산길을 걸어서야 갈수 있다. 나오노채의 고차수는 모두 몇 백 년 이상의 맹고대엽종이며, 생태환경은 매우 원시적이다. 나오노채의 보이차의 외형은 흰색 솜털이 촘촘하게 찻잎을 덮어서 햇빛 아래서 매우 아름다우며, 차탕은 맑고 밝은 황금색이며, 짙은 꽃 향기를 풍기면서 입안에 두텁고 상쾌하고 빠른 회감과 오래 지속되는 후운이 인상적이다. 나오노채의 보이차가 빙도노채와 막상막하여서 양이 적고 매우 귀하다.

지계노채(地界老寨)는 빙도노채까지 걸어서 약 20분의 거리이며, 지계 마을은 60여 가구(270여 명)로 이뤄진다. 해발 2100m의 원시림과 가까워서 교통이 불편하고 2004년에 한번 이주하였지만 현재 노채에 몇 가구만 살고 있다. 지계노채의 고수차 다원은 약 50 마지기 정도이며, 300년 이상의 고차수가 총 3000여 그루가 있다. 지계노채 매년의 모차(毛茶, 초벌차)의 생산량은 약 250kg정도로 매우 적은 양이다. 지계노채의 보이차 외형은 굵고 흰색 솜털이 많고 과일과 꽃향이 강하며, 차탕은 두터우면서 약간의 쓴맛과 떫은 맛, 단 맛을 많이 느낄 수 있고 회감과 침생기는 것이 매우 뚜렷하게 느낄 수 있어서 최상급에 속한다.

 지계노채(좌측)와 파왜노체(우측)<사진=李金润提供>

파왜노채(垻歪老寨)는 맹고진(勐庫鎭)에서 25km, 해발 1500m의 깊은 산속에 위치하며 마을은 납호족(拉祜族)과 한족(漢族) 두 개 민족의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으며, 인구는 58가구에 221명으로 보이차 생산을 주업으로 한다. 교통불편으로 인해 마을은 2004년에 파왜신채로 이사하였지만 옛 마을에 사오백 마지기의 다원이 있어서 10여 가구가 다시 파왜노채로 돌아갔다. 파왜노채의 200년 이상의 고차수가 약 300백 여 마지기이다.

빙도촌민위원회의 5개 마을의 보이차가 모두 매우 뛰어나지만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이다. 파왜노채의 보이차가 다른 마을의 보이차보다 쓴 맛이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남박노채의 보이차는 빙도노채의 회감속도는 유사하지만 신선한 맛이 조금 떨어지며 향기의 지속성은 약간 떨어진다. 지계노채의 보이차는 향기가 빙도와 같지만 회감의 속도는 빙도보다 조금 떨어지며, 각설탕향은 빙도보다 조금 약하다. 나오노채의 보이차는 빙도보다 차기가 조금 약하지만 맛은 아주 뛰어난다.

보이차 최대 재배면적과 최다 생산량을 자랑하는 임창시

전편에서 언급한 보이시()에 이어 보이차의 원산지를 찾아 두 번째로 향한 곳은 운남성 서남부에 위치한 임창시()이다. 임창시의 봉경현()은 약 3200년 된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 재배형 차나무인 ‘금수차조’를 비롯하여 야생대차수가 자라고 있는 곳으로, 보이차 원산지로서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임창은 중국에서도 외딴 곳에 속하여, 운남성의 성도() 곤명()에서 출발할 경우 버스로 최소 13시간이 걸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360년전 [서하객유기()]의 서하객(: 중국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이 찬양하고 중국의 현대 차 권위자 오각농()이 ‘세계 인류의 대차원’이라고 칭송했던 임창을 가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과감히 임창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임창시는 운남이 자랑하는 각종 차나무 우량품종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어 ‘보이차 종자의 유전자 은행’으로 불린다. 그 중 쌍강현에 위치한 맹고산은 광활한 원시밀림을 형성하고 있고, 깊은 골짜기에 원시 고차수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사진은 원시밀림이 시작되는 맹고차산 입구이다.

쌍강현 맹고진까지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울창한 숲과 시원한 협곡은 나를 대자연의 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겼다. 도착하여 책에서만 보고 이야기로만 듣던 보이차의 원산지 야생 고차수림이 눈앞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자, 차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진한 차의 향기에 취하는 것 같았다. 맹고 융씨차창()은 공장 직원 250여 명이 년간 맹고에서 딴 생엽 4000톤으로 보이차 1000톤을 생산하는 회사이다. 이 회사의 배려로 임창차구()를 둘러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안내한 관계자에게서 임창시의 차 산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운남의 대차수()들은 대다수가 관목형이 아닌 교목형() 대엽종 차나무이다. 이것을 다시 야생형과 재배형으로 분류하는데, 현재 임창시에서 재배하는 야생형과 재배형 고차수의 전체 차 면적은 85만 묘에 달하고, 계단식 논밭 형태의 소수차와 대지차 다원을 합하면 130만묘(, 1묘=200평)에 이르게 된다. 운남성 차엽 총 면적 523만묘 가운데 25%가 임창에 있고, 차의 총 생산량은 자그만치 3만톤에 이른다. 따라서 임창은 차 재배면적이 제일 큰 지역이면서 생산량 또한 제일이라고 한다. 또한 운남이 자랑하는 각종 차나무 우량 품종 대부분을 임창시가 보유하고 있어서, 임창을 가리켜 ‘보이차 종자 유전자 은행’이라고 하였다. 그중 임창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찻잎의 품종은 봉경대엽종 차나무와 맹고대엽종 차나무라고 한다. 이 고차수들은 모두 보이차를 만드는 국가 표준의 교목형 대엽종 차나무들이라는 관계자의 설명을 마지막으로, 맹고차창 책임자를 소개시켜 주면서 우리를 맹고차산으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야생고차수 군락지

임창시는 운남성의 원시적 형태를 가진 고차수림의 50% 이상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그만큼 고차수의 분포 면적이 넓은 지역으로, 지난 30년간 이곳에서 야생 고차수가 계속적으로 발견되면서 차나무 발원지의 핵심 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중 쌍강현에 위치한 맹고의 산들은 광활한 원시밀림을 형성하고 있고 그 가운데 방마대설산()이 있다. 이곳은 종횡으로 산이 등을 맞대고 연결되어 깊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골짜기를 따라 원시형 고차수들이 해발 2200~2750m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골짜기들을 ‘세계야생 고차곡()’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요즘에 와서다. 세계야생고차곡의 고차수가 분포한 방마대설산은 원시 밀림지대로, 전 세계의 차산 중에서 해발이 가장 높고 차나무의 분포면적과 밀도도 모두 최대이다. 차나무의 보존도 가장 완전하며, 차나무의 내성도 또한 강한 세계 제일 야생고차수 군락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집중 분포한 야생고차수 면적은 240만평(1.2만묘) 이상이고 각 나무 사이는 평균적으로 5~10m씩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나무 한주의 높이가 15m 이상의 야생고차수가 많다. 3m 이하 고차수는 이 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보이차 업계에서는 이 고차곡의 고차수들을 ‘운남대엽차의 정통’이라고 평한다. 설산에서 천연으로 자생해온 야생형 야생차에 속하고 진화 형태상 가장 원시적이다. 그래서 임창은 야생고차수의 원산지라고 불린다.

'세계고차곡 1호', 대설산 야생대차수

세계 최대 규모의 야행고차수 군락지 임창시에서 발견된 대설산 야생대차수. 해발 2,700m의 깊은 원시림 안에서 발견된 이 나무에는 '세계고차곡 1호'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2007년 야생 대차수() 하나가 발견 되었다. 설산 자락에 사는 한 주민이 방마대설산에서 약초를 캐던 중 해발 2,700m 깊은 원시삼림 안에서 야생대차나무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나무에 익숙한 원주민들도 이 야생대하수는 너무 거대해서 이 나무의 나이를 짐작조차 할수 없었다. 아직 이 야생대차수의 정확한 나이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약 2700~3000년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나무는 밑둥 둘레가 4m에 달하고 몸통 둘레는 3.5m, 나무 높이는 20m 정도다. 이 나무는 방마산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대설산 1호 야생대차수’로서 ‘세계고차곡 1호’라는 팻말이 차나무 앞에 세워져 있다. 이 고차수는 3세차조였던 ‘천가채 야생1호 차나무’의 몸통 둘레 2.82m보다 더 굵고 해발도 훨씬 높다. 만약 이 설산의 야생고차수가 식물전문가에 의해 수령이 2700년이 훨씬 넘는다고 발표된다면 보이차 원산지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방마설산 주변은 야생고차수들이 마치 구름처럼 깔려있고, 그 밑으로는 야생차뿐만 아니라 재배형 고차수와 대지차들이 함께 자라나며 녹색의 왕국을 이룬다.

하늘 아래 울타리 없는 보이차의 제1 창고

이 고차곡에 대한 이름은 임창 시급위원회에서 2007년에 출판한 [중국임창차문화()]라는 책에 기재되어 있다. 방마설산의 ‘고차곡’은 맹고진의 북부 남맹하 상류 양안에 위치한다. 남맹하에는 동반산과 서반산이 있는데 동반산의 최고해발은 2700m, 서반산의 최고해발은 3233m 이다. 서반산엔 유명한 빙도()를 비롯한 패가(), 동과() 대호채(), 공농촌(), 병산() 방개() 등 7개 마을이 있고 동반산()에는 양자촌(), 패나(), 나초(), 나새() 등 5개의 마을이 있다. 맹고 지역은 이처럼 야생차나무와 재배고차수, 소수차, 대지차들이 끝없는 그린벨트를 이룬다. 하늘 아래 울타리 없는 창고와 같아 차 애호가들은 이곳을 하늘 아래의 창고, ‘천하의 보이제일창()’이라고 찬양한다. 운남성은 북동쪽으로 사천성과 경계를 이룬다. 옛 사천인들은 운남을 일러 ‘사천의 뒤뜰’이라고 했다. 과연 사천인들이 맹고 대설산에 와보았다면 천하보이제일창을 사천의 뒷마당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을까? 맹고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에 의해 훼손을 받지 않아 가장 원시적인 환경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야생고차수들이 계속 식생을 넓혀가고 인공재배되면서, 이들을 길들이고 재배한 역사가 수천년 이상이라고 한다.

임창시의 금수차조 그 역사적 가치는?

일본의 농학박사이자 차엽전문가 오우모리 마사시(大森正司)와 중국농업과원 차엽연구소 임지(林智) 박사는 이 차나무 수령을 3200~3500년 사이로 측정했다. 이 나무는 명백한 인공재배한 고차수라고 한다.

현재까지 밝혀진 재배형 차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공재배형 고차수. 오래된 세월만큼 그 몸퉁 둘레와 높이 또한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처럼 야생대차수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임창시에서는 언제부터 차나무를 직접 재배하고 이용하였을까? 운남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 전 상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이미 차가 상주시기 나라의 공물로 바쳐지고 음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물을 바친 고대 소수민족은 복인()이다. 복인이 모여 살던 곳인 봉경현(), 소만진(), 금수촌(), 향죽청()에서 모든 차의 어머니(), 차조모(), 혹은 금수차조()라 불리우는 대차수 하나가 발견됐다. 이 차나무는 야생형이 아닌 재배형으로, 그 나이를 약 3200~35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재배형 차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차나무이다. 그 세월을 이야기하듯 몸통의 둘레는 약 5.82m로, 세 명의 어른이 서로 팔을 벌려야 겨우 껴안아지고, 높이는 10.2m로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오른 차나무 끝 가지는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3200세 인공재배형 고차수()이며 나이가 많고 몸통이 굵은 재배형 대차수이다. 이러한 차나무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임창은 인공 대엽차 재배의 가장 중요한 발원지이자, ‘세계 차종의 첫번째 원생지’라고 할 수 있다. 금수차조의 발견으로 인해 3200년 전 이곳 사람들이 이미 차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재배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원시형 차나무의 역사까지 추산한다면 임창의 금수차조가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이 밖에도 인공재배형 고차수 주변에는 재배고차수 14000주가 오랜 세월을 견디며 자라고 있다. 봉경현은 국가에서 지정한 우량종인 봉경대엽차종이 생산되는 곳이다. 봉경대엽종의 고차수로 보이차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들 잎은 홍차의 원료로도 쓰인다. 현재 봉경현에서는 중국 홍차 총 생산량의 20%가 생산된다. 그래서 임창을 운남홍차의 고향 ‘전홍지향()’이라고도 부른다. 봉경대엽종의 어린잎인 새싹 단아()만을 따서 제조한 최상급 홍차 ‘전홍’은 새싹 전체가 황금빛이어서 ‘금아차()’라고 한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특히 즐겨마신다고 알려져 있다.

2006년 3,200년 된 고차수의 찻잎을 따서 만든 차왕병(왼쪽)과 그 속지(오른쪽).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보이차인만큼 그 가치와 가격이 특별하다고 알려져 있다.

2006년 봉경차창에서 이 고차수를 따서 만들어진 보이차는 한 편당 약 500g으로 30여 편 가량 만들어졌고, 그 이름을 ‘차왕병’이라고 했다. 차왕병은 역사를 가진 보이차이다. 필자도 차를 사랑하는 한명의 애호가로서 차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소장한다는 의미로 차왕병 한 편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2007년에 만들어진 병차는 한 편당 499g으로 12편이 만들어 졌는데 그이름을 ‘금수차조’라 하였다. 그 중 한편의 차가 중국 홍콩 바로 옆의 도시 심천 박람회에 출품됐다. 그런데 이 차의 가치를 알아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구매를 원하여 부득이하게 경매를 통해 판매를 진행하게 되었다. 초기경매가는 당시 25만위안이었는데, 심천의 어느 차 가게 사장이 최종 가격 40만위안에 낙찰을 받았다. 생차 한 편에 그때의 환율로 5000만원이라니 과연 ‘차왕의 어머니’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 그는 자신의 가게 안에 금수차조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걸어놓았다고 한다. 2007년 채엽 이후 금수차조는 중국 정부가 지정한 귀중한 보호수가 되면서 한 잎의 차도 딸 수가 없게 되었다. 봉경대엽종 싹으로 홍차를 만드는 전홍집단에서는 2011년 우리 돈 약 18억원을 들여 3200세의 금수차조를 보호하는데 힘을 더하고 있다.

찻잎을 채취하는 그림이 새겨진 임창시의 암벽화

임창시의 소수민족들이 유구한 역사와 함께 이루어온 차문화는 3200세 금수차조의 역사와 시대를 함께 한다. 이같은 사실은 와족()이 3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이미 천연염료를 이용하여 절벽으로 된 수직의 암벽 위에 그들의 생활상을 그려 놓은 벽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암벽화는 해발 1000~2000m 사이에 그려졌는데, 거기에는 차엽을 따는 풍경의 암벽화와 수렵생활, 방목(), 마을풍경, 전쟁, 그들의 춤과 기예 등이 그려져 있다. 첫 번째 벽화에는 가족 단위로 채집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고, 두 번째 벽화에는 두 사람이 키가 큰 야생 고차수 위에 올라 찻잎을 채취하고, 한 사람은 나무 밑에서 따서 떨어뜨린 찻잎을 줍고 있다. 세 번째 벽화에는 아이가 차나무에 올라가 찻잎은 따는 모습과, 그 아이를 차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로 인해 3000년 전 와족의 찻잎 채취 모습과 차나무의 형태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아직도 와족들은 밧줄을 연결하거나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차를 따는 습관이 남아있다. 와족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 “당신이 차를 마셨다면, 당신은 영혼을 볼 것이다.” 이 말은 차나무가 곧 영혼이고 조상이라는 뜻이며, 차를 마시면 영혼을 정화하여 정신을 깨어있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매년 그해에 가장 잘 만들어진 임창의 고수차로 암벽화에 제사를 지낸다.

임창시 소수민족의 차 생활

임창의 풍부한 차나무 자원은 그들의 실생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어 독자적인 차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이 즐겨 음용하는 차는 죽통차()와 소차(), 뢰차() 등이 있다. 최초로 차나무를 이용한 복인의 후예인 와족은 신석기시대부터 높고 깊은 산중에 살아서 ‘산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들이 대대로 모여사는 마을, 창원현()은 차나무뿐만 아니라 대나무도 풍성한 지역이다. 그래서 와족들은 주변의 가장 흔한 대나무로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의자 등 생필품을 만들어 사용하고, 누각()을 만들어 그 안에서 휴식하며 죽통 안에 차를 넣고 끓여 만든 죽통차를 마신다. 죽통차를 끓일 때 설탕을 넣은 차는 기혈을 보충하는 작용과 함께 청춘남녀의 달콤한 사랑을 상징하고, 죽통차에 생강을 넣어 끓인 차는 추위를 쫓고 체내의 열을 발산시키는 작용을 하며, 박하차는 더위를 물리치는데 사용된다.

이들에게 전래되는 재미있는 노래가 하나가 있다. “대나무 잎은 푸르고 무성하며 죽통은 길다. 잘라낸 죽통 마디에 사탕을 담고, 이 죽통 사탕을 먹은 애인은 변심하지 않고 오래 살아간다.” 이 노래처럼 와인()들은 대나무를 생활의 다방면에 걸쳐 이용하였고, 그들의 오랜 식문화의 하나인 차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소산이 바로 죽통차이다.

와족들이 즐겨 마시는 또 다른 차에는 소차()가 있다. 소차는 와족어로 ‘왕랍()’이라고 부른다. 소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바닥을 살짝 파서 세워 놓은 화당()이라는 화로를 준비하고 그 위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인다. 그런 다음 차엽을 철판 위에 고르게 깔아 불 위에 올려놓고 굽는다. 기다렸다가 차엽이 노르스름하게 구워지고 차향이 올라오면 구운 찻잎을 주전자에 넣고 다시 끓인 후, 잘 끓인 차를 작은 잔에 따라 마신다. 이 찻물의 탕색은 진한 황색으로 대개는 첫 맛이 쓴데 곧이어 단맛이 따라오며 구수한 향을 품어낸다. 죽통차와 소차와 달리 차 안에 생강, 육계, 소금을 넣고 함께 끓여 마시는 색다른 방식의 뢰차() 또한 와족이 즐겨 마시는 차 중의 하나이다. 이곳의 한 와족이 만들어준 ‘왕랍”을 한잔 맛보았다. 이 차에 들어간 찻잎의 원료가 무었인지 물었더니, 와족인의 말로는 “와족이 대대로 설산에서 채집한 고수차 찻잎은 왕랍의 기본재료”라고 하면서 요즘엔 보이차로 부른다고 하였다.

뚜껑 없는 주전자, 토관의 매력

투박한 질감의 토관은 와족이 차를 끓일 때에 사용하는 토기 주전자이다. 운남 지역의 흙으로 만들어진 뚜껑없는 토관은 그 생김새가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거기서 따라내는 차의 맛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와족들 소차나 뢰차를 끓일 때 꼭 사용하는 것은 토기로 만든 주전자이다. 나에게 왕랍을 끓여준 와족은 차를 끓일 때 토기 주전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 모양이 독특하기도 하였지만, 토기가 따라내는 차맛이 하도 기가 막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 토관에 대한 문헌을 살펴보게 되었다. 청대 정판교()는 “입은 뾰족하고, 귀가 약간 높다. 이 주전자가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없애고, 추위를 달랜다. 주전자가 작아 차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 보이지만, 은근히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소수민족들의 토기 주전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2004년 임창의 임상구()에서 송()ㆍ원() 시기 차를 끓이는 도구로 보이는 작은 동()주전자가 하나 출토되었는데, 이미 천 년이 넘는 오래된 것이었다. 이 동주전자의 출토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들의 동이나 토기로 만든 주전자를 이용한 차생활이 이미 천년이 넘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운남 지역의 흙으로 운남에서 만들어진 뚜껑도 없는 작은 토관은 출수구()가 있어서 차를 따르기에 매우 편리하지만 보잘 것 없는 옹기의 하나일 뿐이다. 이 작은 옹기에서 끓여낸 차를 소수민족들은 토관차(), 고차(), 관고차()라고 부른다. 운남의 대부분 소수민족들은 이 토관에 끓이거나 굽는 방식으로 보이차를 마신다. 투박한 질감이 정이 가고 흙과 함께 배어나오는 차의 향기를 한국에 전해주고 싶어 배낭이 가득찰 정도로 구입하여 한국으로 가져온 뒤 여러 사람들과 와족의 소차를 똑같이 흉내내며 만들어 마셔본 경험이 있다. 찻잔을 앞에 두고 감상하고 있노라니 그 향기가 360여년 전 명대의 여행객 서하객()을 생각나게 했다.

서하객이 맛보고 감동하여 기록한 태화차

창원의 와족과 함께 봉경현의 소수민족인 이족(), 태족() 사이에서는 예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독특한 음다 습관이 있다. 그 이름은 백두차()라고 한다. 백두차는 작은 토관을 이용하여 정성스러운 절차를 거쳐 마시는 공부차()이다. 봉경현에서는 집에 손님이 오면 주인은 물을 끓이고 한편으로는 토관을 화당()이라는 화로불 위에 얹어 데운다. 토관이 데워지면 여기에 찻잎을 넣고 찻잎이 토관 안에서 골고루 익혀지도록 100번 이상 신속하게 흔들어 준다. 잘 흔들어 찻잎이 황색으로 변하도록 구워지고 그 익은 향이 코를 찌를 때, 끓는 물을 토관에 8부만 차도록 붓는다. 토관 안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차탕이 거품이 일도록 끓으면, 다시 여러 번 물을 첨가하여 붓고 반복해서 끓인다. 차향이 지속적으로 퍼져 나오면 비로소 ‘백두차’가 완성된다. 백두의 ‘두()’는 털고 흔들어 준다는 의미로, 차를 만들 때 백번을 흔들어주며 차를 굽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토관을 흔들어 줄 때 처음부터 끝까지 토관이 화로의 불길에서 떨어지면 안되고, 찻잎이 토관 안에서 고르게 열이 전달되어 익도록 하되, 설익어도 안되고 태워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만든 백두차는 떫고 쓴맛이 제거되어 그 맛이 부드럽고 진한 향기가 넘쳐 흐른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 때에 서하객의 눈에 비친 봉경 소수민족의 전통 음다방식의 ‘태화차’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차를 가리켜 공이 많이 들어가는 공부차라고 한다.

서하객이 봉경 마장촌에 도착한 뒤 매씨 노인 집에서 대접받은 차는 바로 백두 방식으로 만든 태화차였다. 그는 이 차를 마시고 감동하여 이를 [서하객유기]에 기록하였다. 서하객은 30년간 걸어서 중국을 여행한 지리학자이다. 유람생활 중에 중국 각지의 산해진미를 접하여 보았겠지만 오로지 ‘매노인의 태화차’만을 여행기에 남긴 점이 놀랍다. 문화여행의 열풍이 부는 오늘날, 봉경의 최초 명차 역시 서하객을 통해서 유명해졌다. 명대의 서하객이 마신 백두차는 오늘날의 토관차, 관고차와 매우 흡사하고 백족의 삼도차와도 흡사하다. 앞서 살펴보았듯 토관 자체는 매우 보잘 것 없다. 그러나 토관을 통해서 명대의 백두차와 태화차가 있을 수 있었고 와족의 왕랍차, 뢰차 등 임창에서 나오는 고수차들은 천년을 내려오며 지금도 토관 안에서 그 특유의 향기를 품어낸다.

운남의 차가 처음으로 문헌상에 자세히 기록된 것은 당나라 사람 번작()이 남조국의 9대왕 세륭(, 859~877) 때 지은 책 [만서()]를 통해서이다. “차는 은생성() 관할의 여러 산에서 나오는데 흩어져 거두고 특별한 제조법이 없다, 몽사만()은 산초, 생강, 계피와 함께 끓여 마신다”라고 번작이 기재한 것은, 오늘날 임창에 속해있는 운현(), 망회(), 차방(), 임상(), 마태() 등의 토착민들이 아직까지도 차와 함께 혼합하여 음용하는 생강(), 호미차(), 탕차(), 염차()들과 그 방법이 딱 들어맞는다. 이것은 당시 운남에 차를 따서 만드는 세련된 가공기술은 없었지만 이미 차가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남조시기 은생성에서 생산되고 대리지역 몽사만이 이용한 차는 당연히 운남에서 자란 대엽종 찻잎임이 분명할 것이다.

임창이 보이차의 원료 공급지로 머물렀던 까닭은?

임창()은 야생차나무의 원산지이다. 그리고 재배차의 천국이라는 말처럼 각종 우수한 재배고차수 종자가 심겨져 녹색의 왕국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창의 고차수는 완제품으로 상품화되거나 공차로 선정되어 외지로 팔려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청나라 때 서쌍판납 지역의 고차산들은 황실의 공차를 만드느라 바빴고, 보이시는 이 차들을 관리하고 마방에 실어 차마고도를 따라 티베트나 청나라 황실로 보내기에 바빴다. 그러나 임창의 훌륭한 찻잎들은 왜 원료로만 주변지역에 공급되었던 것일까?

갓 딴 맹고종 찻잎. 우수한 보이차 종자 유전자를 보유한 임창시이지만, 보이시나 서쌍 판납에 비해 차의 상품화와 유통에 소극적이었다. 임창시는 왜 훌륭한 찻잎을 보유하고도 원료 공급지에 머물렀던 것일까?

임창시를 통과하여 흐르는 란창강은 운남에서만 1200km를 흘러가고 임창에서 800여 개의 크고 작은 강줄기로 나뉘어 여러 지역으로 흘러들어간다. 임창은 높은 산과 협곡이 대부분으로 한번 외지로 나갔다 하면 수십일, 심지어는 한 달이 걸리기도 하였다. 임창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이족, 와족 등은 언어와, 신, 종교가 다른 까닭에 민족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각 마을마다 치안이 좋지 않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그 한 예로 와족은 무시무시한 수렵생활을 하던 민족인데 농사를 지을 철이 돌아와 파종 시기가 되면 중무장을 하고 사람을 사냥하기 위해 마을 밖을 나선다. 길 가다가 첫 번째 마주치는 사람을 만나면 생포하여 죽이고 머리를 잘라 대나무 바구니에 넣어 높이 걸어 제사를 지냈다. 인두제는 지금은 법으로 금지하여 사라졌지만, 이것은 오랫동안 차 상인들이 넘지 못할 장애였다. 또한 란창강의 물이 수위가 높아지면 교통이 두절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근대에 들어서 차나무의 손쉬운 재배가 발달하면서 깊은 원시림 속의 차나무는 자연히 방치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임창의 고차원을 보존할 수는 있었지만, 원료공급지로만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임창 지역의 차는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운남의 보이차를 대표하는 하관차창과 맹해차공장도 임창차의 원료를 사들이기 위해 앞다투어 경쟁하였다. 눌림이 좋은 보이 타차()는 반드시 임창() 찻잎이어야 한다는 소문은 예부터 있어왔다. 하관차창은 임창의 차를 사들여 사발모양의 타차를 만들고 대리지역의 백족은 이 타차를 이용하여 삼도차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임창시 차 시장의 근황

임창시에서 재배되는 빙도고차수는 600년의 오랜 재배 역사를 자랑한다. 그 씨앗은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 우량 품종으로 인정받았으며, 2012년에는 모차가 6000위안까지 거래되었다.

임창에서 재배된 대표적인 차는 맹고대엽종 차엽()이다. 빙도()고차원은 이미 600년의 재배역사를 가지고 있다. 쌍강의 맹고진에서 생산되는 맹고 고차수는 일찍이 그 씨앗이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 가장 유명한 국가급 우량품종이 되었고, 그 차의 원료로 만든 맹고 보이차 또한 차엽 시장에서 가장 고급차로 팔려나간다. 그중 맹고 보이차 생산량은 년간 4000톤 이상에 이른다. 2012년 맹고의 빙도차는 1kg의 모차가 6000위안까지 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동안 중국의 가장 유명한 명차에 들지 못하고 그 명차들에 비해 가격이나 품질이 저평가되었던 임창의 보이차의 위상을 맹고 빙도차가 모두 불식시키며 차엽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임창시의 보이차는 원료공급지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를 향해 발전해 나가고 있다. 벌써부터 맹고대엽종 찻잎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품질의 유명세를 따라서 다국적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 가운데 미국 AAM허브 그룹의 경우 중국 현지의 여러 회사들과 합작하여 임창에 ‘세계 고차곡 관광지구’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들은 맹고대설산 협곡의 풍경을 배경으로 설산의 원시삼림생태, 차의 원산지문화, 각 소수민족의 차와 풍속문화가 주체가되는 관광구를 만들어 쌍강 맹고지역을 차 산업지구로 키워나갈 것이다.

임창에는 1만년 전부터 토착민이 거주하였고, 구석기 시대에는 란창강() 상류지역에 복족이라는 민족이 출현하여 차를 발견하고 재배하여 왔다. 그들의 후손들이 봉경의 3200년 인공재배 차왕수를 길러내고 또 그 후손들이 재배차나무의 천국을 임창의 대지위에 남겨 ‘만차 귀종’이라는 이름과 ‘보이차 종자 유전자은행’이라는 칭송을 받게 만들었다. 맹고 고차곡 관광구에서 소수민족이 이 지역 맹고대엽종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작은 토관안에서 구워주는 고차(), 소차(), 죽통차를 마시며 제2의 서하객이 되어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이차의 원산지 임창시를 찾아서 - ‘보이차 종자의 유전자 은행’ (차와 커피, 오영순)

끝없이 펼쳐진 징마이 차산.

윈난성(雲南省)은 중국의 서쪽 남단에 있다. 만년설부터 열대우림 기후까지 동시에 공존하는 윈난은 한 지역에서도 1년 사계절을 하루에 느낄 수 있는 저위도 고산지대 기후의 특성을 갖고 있다. 윈난은 독특한 기후 덕에 희귀 식물자원이 많으며, 이 때문에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바이오산업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나라도 수년 전부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해외생물소재허브센터가 윈난성에서 연구 활동 중이다.

   
   봄의 도시라고 불리는 윈난성의 성도(省都) 쿤밍(昆明) 일대는 중국 꽃 생산의 중심기지다. 윈난의 저지대에서는 바나나를 비롯한 열대과일을 생산하며 고무나무와 커피 생산도 증가 일로에 있다. 또 담배는 질과 양에 있어 중국 최고다. 윈난의 빼어난 특산물 중에서도 빠질 수 없는 농산물이 차(茶)다. 중국에는 500여종류의 차가 생산 유통된다고 한다. 그중에 약 300종류가 윈난성에서 만들어진다. 중국의 10대 명차로서 보이차의 위상은 윈난의 차 중 단연 최고다.
   
   윈난성 전체 면적 중 84%가 산지이며 평균 해발고도가 2000m를 웃돈다. 연교차보다는 일교차가 훨씬 큰 차산에 무시로 피어올라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안개는 고품질의 차 생산에 필수 환경 조건이다. 보이차는 단순한 농산물의 경지를 넘어 문화와 산업, 관광업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새삼스럽게 보이차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해 본다.
   
   중국에서도 이견이 분분한 보이차에 관한 논쟁을 일단락하기 위해 2003년 3월 1일 윈난성 표준계량국은 보이차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공식 발표했다. “보이차는 윈난성의 특정한 지역 내에서 채집한 윈난 대엽종 찻잎을 가지고 쇄청(·햇볕에 말림)한 모차(毛茶)를 원료로 후발효 가공을 거쳐 만들어진 산차(散茶) 또는 긴압차(緊壓茶·눌러 만든 차)를 뜻한다.” 바로 다음해인 2004년 4월 16일 중화인민공화국 농업부는 보이차의 정의에 대해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의 발표를 한다. 이후에도 보이차에 대한 정의는 계속 수정 보완된다.
   
   중국 정부는 학계와 관련업계의 의견을 2년간 수렴하여 2008년 12월 1일에 다시 보이차에 대한 정의를 발표한다. “윈난 지역 대엽종 차나무 잎을 사용해서 쇄청한 원료로 만든 생차(生茶)와 숙차(熟茶)”라는 이 핵심 정의가 가장 최근의 것이다. 윈난성은 ‘보이차 지리표시 상품 보호 관리법’을 2009년 6월 1일부터 시행하면서 2008년의 기준을 따르고 있다.
   
   2003년 발표와 비교하면 ‘특정한 지역’이라는 윈난성 안에서의 지리적 제한이 완화되었으며, 제조 방법의 차이가 확연히 다른 ‘생차와 숙차’를 모두 보이차로 인정한 것이 크게 다르다. 이는 보이차 학계보다는 보이차 업계의 유통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처음 발표 당시부터 변하지 않은 정의 두 가지는 원료에 대한 규정이다. 우선 햇살로 말리는 쇄청 모차를 명기함으로써 기계를 사용하여 단시간에 고열로 말리는 홍청(烘靑)을 배제하였다. 후발효를 전제로 하는 보이차에 있어 홍청을 하는 제조 방식은 일종의 사기다. 홍청을 거친 차는 발효 대신 산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 천년 고차수단지 안내문


   2003년부터 변함없는 중요 규정인 ‘대엽종 차나무 잎’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아예 무시되는 상황이다. 대엽종은 성숙한 찻잎의 면적이 40~60㎠ 이상이며 중엽종은 20~40㎠, 소엽종은 20㎠ 이하로 구분한다. 다 자란 대엽종의 찻잎은 20㎝가 훌쩍 넘는다. 예로부터 대엽종이 아닌 중엽종, 소엽종으로 만든 보이차가 고6대 차산을 중심으로 생산되어 청나라 황실에 납품됐다. 근세는 물론 오늘에도 여러 차산에는 중·소엽종으로 차를 만들어 보이차라는 이름으로 정식 허가를 받아 유통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보이차의 정의 속에 내재된 허를 가늠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정한 보이차의 정의와는 달리 대엽종이 아닌 중엽종으로 만든 보이차로서 보이차왕후(普茶王后)라는 애칭을 가진 징마이(景邁) 차산을 타이족(族) 여성의 안내로 찾아가 보았다.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거친 운전 솜씨를 자랑하는 그는 징홍(景洪)공항에서 서북쪽으로 3시간 거리인 징마이까지 수많은 속도감시카메라를 모두 기억하며 완급을 조절하여 차를 몰았다. 그렇게 달린 지 2시간이 채 안 되어 란창현(瀾滄縣) 후이민향(惠民鄕)에 속한 징마이 초입에 도착했다. 보이차 생산기지의 중심지인 멍하이현(海縣)과 붙어있는 후이민향은 보이차를 테마로 차산 탐방과 차창 견학 및 제다 실습 등 체험 위주의 관광단지를 만들기 위하여 포장도로를 완비하고 민간기업과 합자하여 숙박시설과 시외버스터미널을 새로 짓고 있었다.
   
   징마이는 1950년 베이징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1주년 기념 행사에 징마이산채의 부랑족(布郞族) 수령 수리야(蘇利亞)가 윈난 소수민족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징마이산 보이차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게 선물로 증정했을 정도로 품질과 맛을 인정받는 유명한 차산이다. 2001년에는 외국 사절들에게 장쩌민 주석이 징마이산 보이차를 선물하기도 했다.
   
   1300여년의 차 재배 역사를 자랑하는 징마이의 고수차를 맛보기 위하여 타이족 여성의 집으로 갔다. 제다한 지 불과 보름밖에 안 된 고수차였지만 금황색 차탕의 색은 눈을 즐겁게 했다. 부드러운 단맛이 매끄럽게 넘어가는 구감은 연인의 입술보다 달콤했다.
   
   해발 1400~1600m에 펼쳐진 다원의 총 면적은 29만4000무(畝·666㎡)로 사륜구동차로 한참을 달려도 그 끝을 쉽게 볼 수가 없었다. 2만8000무에 달하는 고차수 다원은 대부분이 타이족이 사는 징마이와 부랑족(布朗族) 마을인 망징(芒景)에 몰려 있다. 윈난성에서 최대의 면적을 자랑하는 천년 고차수 다원은 ‘차나무 자연박물관’으로 불리며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징마이의 보이차는 마시는 음료를 넘어 지역 관광산업의 근간으로 부각되고 있었다.


   

라오만아 마을

천천히 걸어야 한다. 라오만아(老曼俄)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진 수백 년 된 고차수다원(古茶樹茶園)을 두루 살펴보려면 하루 종일 해발 1200m와 1650m 사이의 능선을 무시로 오르내려야만 한다. 마음이 바쁘다고 잰걸음을 하다가는 연거푸 이어지는 오르막을 감당할 수 없다. 한족(漢族) 안내인은 고개를 하나 넘더니 산행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우기에 더욱 험악해진 부랑산(布朗山) 길을 긴장하며 온 탓에 라오반장(老班章)에서 10㎞에 불과한 거리를 2시간 넘게 걸려 왔다. 하지만 원시림과 더불어 사는 고차수 군락지를 보자 피로는 사라지고 힐링(healing)이 찾아왔다.

   
   수령 100년에서 500년 사이의 풍채 좋은 고차수가 산기슭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라오만아의 차산은 역시 원조다운 풍치와 양질의 생태환경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라오반장의 유명세에 가려 덜 알려진 덕에 오히려 잘 보전된 차산 생태환경이 돋보였다.
   
   라오반장과 유사한 맛에 가짜 라오반장차를 만들 때 라오만아차를 많이 섞어 사용했다는 오명도 한때 있었다. 지금은 라오만아의 모차(毛茶) 가격도 충분히 비싸기 때문에 짝퉁을 만들기 위한 소재로 쓰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다. 고수차의 품질과 시장 논리에 의해서 라오만아의 모차도 이미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고수차(古樹茶)를 전문으로 만드는 차창들이 좋은 차나무들을 선점한 표시로 입간판을 차산 곳곳에 세워놨다. 마을에 세워진 유명 차창의 초제소(初製所)와 신축 중인 초제소를 보고 짐작은 하였지만 불과 2년 전에 비하여 지금은 모차 수매 가격이 괴로울 정도로 많이 올라 있다.
   
   윈난(雲南)의 원시림을 누비고 다니다 보면 산야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 강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군대가 윈난에 와서 풍토병에 시달렸다는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두통과 안질에 시달리던 그의 군대를 질병에서 구한 것이 바로 ‘차’다. 5000여년 전 삼황(三皇) 중 하나인 신농(神農)이 독초에 중독된 몸을 차로 해독했다는 설화를 비롯하여 약용으로 사용된 기록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 영역을 알리는 차창의 입간판.

약용으로 출발한 차가 식용을 거쳐 이제는 음용으로 주로 사용되지만 차산의 소수민족은 아직도 식용으로 자주 사용한다. 라오만아의 부랑족(布朗族)도 물에 살짝 데친 찻잎을 죽통 안에 넣어 황토 속에 묻어두었다가 2년 만에 꺼내 먹는 전통 발효음식인 죽통산차(竹桶酸茶)를 지금도 즐겨 먹는다. 그 밖에도 신선한 찻잎으로 만든 다양한 요리는 지금은 차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豪奢)다.
   
   인류 최초로 차를 재배하였다는 고대 민족 복족의 후예인 부랑족이 모여 사는 라오만아는 부랑산의 중심부 분지처럼 평평한 곳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차산은 마을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라오만아는 부랑산의 고차수 차산 중에서도 17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터줏대감이다. 고수차의 대명사인 라오반장을 비롯하여 부랑산의 유명 차산에 심어진 차나무의 대다수가 라오만아에서 분양받아 나갔음을 주장하며 원조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1000여년 전부터 사용하던 우물과 여러 고증을 통해 보면 라오만아가 부랑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차수 마을인 것은 사실이다. 치솟는 인기로 투기의 표적이 되어 전국 최고의 몸값을 받는 라오반장을 부러워하기는 하지만 시샘하지 않고 맏형다운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자신들이 라오만아의 부랑족인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불심 깊은 차농(茶農) 덕분에 사찰에서 스님이 내어주는 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 안내인을 다시 만났다. 사바세계와 거리를 둔 불가의 스님도 고수차를 얘기할 때는 부락주민과 똑같은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어 그 역시 라오만아 토박이인 게 확실했다. 안면 있는 고차수 전문 제조 차창의 사장을 사찰에서 우연히 만났다. 도회(都會)가 아닌 산속에서 그를 보니 새삼 반가웠다. 그가 짓고 있다는 초제소 건설 현장을 가보았다. 예전에는 차농들이 자기 집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모차를 만들어 판매를 했었다.
   
   차산의 가옥 구조를 보면 대체로 1층은 사람이 주거하지 않는 빈 공간이다. 방목하는 돼지와 닭의 잠자리와 창고로 사용된다. 사람은 2층에 주거하며 실내에는 항상 불을 피워놓고 모든 취사를 실내에서 해결한다. 주거공간에 살청(殺靑)을 위한 화덕을 설치하거나 1층에 커다란 무쇠솥과 화덕을 만들어 차농들이 직접 1차 가공을 하여 모차를 만들어왔다. 이런 가공 방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생엽(生葉)에서 모차로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 비위생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 차농의 기술에 편차가 커서 균일한 품과 맛을 유지하기 힘들다. 완성된 모차의 보관에도 몇 가지 기술과 요령이 필요하지만 차농이 준수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차창에서 현지 차농에게 기술을 가르쳐 모차를 생산하게 하는 경우는 품과 맛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지만 제조 과정에서의 청결과 보관시설의 미비는 피할 수 없다. 요즘에는 전문 차창에서 차산에 초제소를 지어 1차 가공을 현지에서 직접 하는 것이 대세다. 차창에서 설계하여 건설한 초제소에 차창의 전문 인력이 상주하며 차를 만드는 전문화된 초제소를 운영하려면 적지 않은 초기투자와 운영비가 소요된다. 라오만아의 차가 소비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환영하지만 모차 가격은 내년에도 상승할 수밖에 없는 여러 정황에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3개의 촌락이 있는 과펑짜이

바람이 분다. 원시림 사이로 대자연의 정기를 가득 담은 바람이 비를 몰고 달려온다. 강한 바람에 비가 흩날린다. 바람 잦은 마을이라는 과펑짜이(刮風寨)는 아직도 우기(雨期)가 끝나지 않았다. 산성비와는 거리가 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신(新)6대 차산을 대표하는 라오반장(老班章)의 모차(毛茶) 가치를 가벼이 눌러버리는 과펑짜이는 고(古)6대 차산의 자존심이다.

   
   이우차(易武茶)다운 섬세함과 이우차답지 않은 강렬하고 중후한 맛을 동시에 내재한 과펑짜이는 생산량 1t 미만이라는 희소성만으로도 보이차 애호가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그중에 고수차(古樹茶)라 인정할 만한 차는 200㎏ 정도에 불과하다. 봄철의 과펑짜이는 총성 없는 전쟁터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좋은 고수차를 구하기 위해서 돈을 잔뜩 들고 다녀도 구할 수 있는 좋은 모차는 극소량이다.
   
   고6대 차산의 시발점인 이우고진(易武古鎭)에서 마헤이짜이(麻黑寨)까지 오면 포장도로가 끝난다. 동쪽으로 24㎞를 1시간30분, 비포장 험로를 따라가면 과펑짜이가 나온다. 고차수가 있는 지역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시작이다. 과펑짜이의 특징은 마을 주변에는 고차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10여년 전에 심은 어린 차나무 밭만 마을 초입에 형성되어 있다. 이것만 보고 실망하면 안 된다. 진짜 보물은 깊은 산속에 있다.
   
   해발 1203m에 있는 국경마을 과펑짜이는 용견 반호(龍犬盤瓠)를 시조신으로 모시는 소수민족 야오족(瑤族)이 모여 산다. 야오족어로 ‘잊지 말자’는 뜻의 달노절(達努節)은 조상을 모시는 새해맞이 전통 명절이다. 야오족은 그들의 새해 첫날인 음력 5월 29일에 모여 옥수수술과 음식을 함께 하며 동고무(銅敲舞)와 화포 쏘기 놀이를 한다. 굽이치는 산골짜기 아래 형성된 3개의 자연부락에 147가구가 모여 산다. 마을사람 741명 중에 226명만 차업을 기반으로 수입을 올린다. 차농도 자신이 관리하는 차밭에 따라 수입이 천차만별이다. 다른 차산처럼 마을 전체가 부유해지기에는 아직 요원하다.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빈부의 차이도 커서 점심을 굶는 아이들도 있다. 이들을 위하여 점심값과 교복을 지원하는 선한 사람이 있다. 과펑짜이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하여 학습교재와 학용품을 매년 기부하는 그는 베이징(北京)에 사는 한국인이다.
   
   과펑짜이에서는 라오스와 국경을 마주한 변경마을이라는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라오스의 저렴한 찻잎이 아무런 제지 없이 무시로 중국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라오스산 찻잎은 해발고도와 생태환경이 달라 등급과 맛이 많이 떨어진다. 인근 산지에 따라 맛과 질이 확연히 다른 이 지역의 차는 모두 과펑짜이라는 이름으로 팔리지만 모차의 출생 서열에 따라 산지 가격도 엄청 다양하다. 차산지를 정확히 구분하여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욱 타당해보이지만 상업적 논리는 가끔 합리적 사고 위에 군림한다.
   
   왜화(倭化)되지 않은 고차수를 만나기 위해 마을 동쪽으로 최소한 4시간을 더 가면 차핑(茶坪) 지역의 고차수 다원이 나온다. 비교적 길이 좋은 바이샤허(白沙河)도 마을 남쪽으로 6시간 거리다. 과펑짜이를 유명하게 만드는 주인공인 차왕수(茶王樹) 지역은 거리도 멀지만 가는 길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안면 있는 차농이 주선하여 어렵게 오토바이 교통편을 구했다. 빗속을 뚫고 길을 나섰다.
   

▲ 야오족 복장을 한 과펑짜이의 여인.

과펑짜이에서 가장 유명한 차왕수 지역까지 가려면 마을 서쪽으로 꼬박 6시간 동안 이동해야 한다. 오토바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경사가 급한 산길은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야만 갈 수 있다. 길을 만들어가며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는 산행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등산로가 아닌 곳의 산은 사람에게 결코 쉽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뱀과 같은 야생동물의 위협도 있지만 살인 진드기와 같은 미세하지만 치명적인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건장한 남자도 가기 힘든 험로가 곳곳에 도사린다.
   
   이런 오지를 이미 10여년 전에 찾아와 솥단지 하나 둘러메고 산상에 올라 야숙(野宿)을 하며 고수차를 만들어간 전설의 여주인공이 있다. 고수차에 대한 개념이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조차 미미하던 시절에 미모의 여승이 장삼(長衫) 자락 휘날리며 솥단지 둘러메고 차왕수 차산에 나타났다.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여승의 국적은 한국이었다. 중국에서 결혼하여 자녀도 두었지만 뜻한 바 있어 출가하여 티베트불교인 라마교의 승적을 갖고 있다. 차산 중 오지에 속하는 과펑짜이에서도 제일 험난한 차왕수 차산에 올라 현지인과 함께 숙식을 하며 산 위에서 차를 만들었다. 마을 사람 얘기로는 그가 차왕수의 고수차를 직접 만들어간 첫 외지인이라 한다.
   
   경사 60도가 넘는 비탈길을 넘어 원시림을 헤치고 나오니 고차수가 산개한 지역이 나타났다. 야생차(野生茶)나무처럼 사람 손을 타지 않고 내버려둔 황산(荒山)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야방차(野放茶)나무가 널려 있다. 차상도 찾지 않는 우기의 차산을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이우차왕(易武茶王)으로 불리며 인기 있는 과펑짜이 차(茶)도 짝퉁이 판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한국 영화가 있었다. 1980년대 도시 개발의 그림자인 투기 바람을 풍자한 이장호 감독의 수작이다. 투기 바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과펑짜이에 광풍노도와 같은 투기 열풍이 아닌 훈훈한 순풍이 불어주기를 바란다. 차상의 주머니만 두둑해지는 것이 아닌 차농과 소비자도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투자와 윤리적 소비를 통하여 차농과 차상 그리고 소비자가 함께 웃는 접점을 위하여 오늘도 현장에서 영감(靈感)을 구해본다.


   

마헤이짜이 마을 전경.

돈이 넘친다. 풍어기(豊漁期)를 맞아 해상(海上)에서 벌어지는 파시(波市)처럼 뭉칫돈이 몰려다닌다. 중국과 대만의 상인들은 돈을 자루에 담아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다닌다. 차농(茶農)과 흥정이 되면 현찰과 모차(毛茶)를 바로 교환한다.

   
   마헤이짜이(麻黑寨)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곳이다. 가장 이우(易武)다운 보이차(普茶)로 명성을 떨치며 노차(老茶)의 고향 이우의 대표주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포랑산차(布朗山茶)가 패기 충만한 남성적 취향이라면 이우정산차(易武正山茶)는 부드럽지만 가끔은 매운 여성적 매력이 있다.
   
   이우정산(易武正山)이라고 포장되어 팔리는 보이차를 자주 볼 수 있다. 정산은 하나의 산 이름이 아니다. 고6대 차산을 비롯한 그 일대의 여러 산을 이우정산이라 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달리 나뉘어져 있지만 보이차를 하는 사람들은 고6대 차산을 통칭해 이우정산이라 부른다. 고6대 차산은 만전(蠻), 만사(漫撒), 망지(莽枝), 유락(攸樂), 의방(倚邦), 혁등(革登)이다.
   
   이우정산으로 판매되는 차는 하나의 차산에서 나온 순료(純料)가 아닌 여러 차산의 모차를 섞어 만든 병배(配)차로 보면 된다. 하나의 차산 이름으로 판매하는 차는 그만큼 순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포장지에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는 그 차의 출생성분을 믿기 어렵다. 또한 순료차에 비하여 병배된 차가 나쁘다는 인식은 무리가 있다.
   
   이우정산이 아닌 마헤이짜이 이름을 앞세워 판매되는 수많은 차는 마헤이짜이의 순료만으로 만든 것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우차구의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가격이 많이 저렴한 타 지역의 대지차가 지나치게 많이 섞이지 않으면 용서해줄 만하다는 것이 현지의 사정이다. 만들어진 차의 순료가 마헤이짜이인지도 중요 포인트지만 사실은 마헤이짜이에 진정한 고차수(古茶樹)가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행정구역상 멍라현 이우향(縣 易武鄕)에 속한 마헤이짜이는 한족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형성한 독특한 부락이다. 고6대 차산의 해발고도는 656~2023m로 편차가 크다. 해발고도가 1331m인 마헤이짜이는 연평균 17℃로 차나무 성장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다. 이우고진에서 나와 차산으로 가는 길 치고는 아주 잘 포장된 도로를 5.5㎞정도 달리면 뤄수이동(落水洞)이 나타난다. 뤄수이동에서 4㎞를 더 가면 마헤이짜이다. 포장된 길은 마헤이짜이에서 끝난다.
   

▲ 가을 햇살에 빛나는 찻잎.

마헤이짜이의 이웃동네인 뤄수이동에는 수령(樹齡)이 1200년 되었다는 고차수가 이우의 차수왕(茶樹王)이라는 이름으로 철조망에 갇혀 보호되고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은 불과 3년 전만 해도 800년이라 했다. 3년 사이에 400년이나 나이를 올릴 만큼 차산에서 차수왕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크다. 그 지역의 차수왕을 기준으로 그 일대 차산의 차나무의 수령이 대략 가늠되기 때문이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부 차수왕의 나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마헤이짜이의 차산은 왜화(倭化)되었음에도 생태환경이 좋은 차밭이 많다. 그러나 고차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과장된 차수왕의 나이만큼 마헤이짜이의 차나무 나이도 상향 조정되어 있다.
   
   유명세에 비하여 불행하게도 마헤이짜이에는 고차수라고 인정할 만한 나무가 별로 없다. 사람이 채차(採茶)하기 좋게 위로 높이 자라지 못하도록 주간(主幹)을 일부 잘라냈고 수확량을 고려하여 가지치기를 하여 왜화해 버린 키 작은 대수차가 주류다.
   
   고차수다운 고차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이 마헤이짜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마디로 돈이 된다. 상인들이 마헤이짜이를 선호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진정한 고수차가 마헤이짜이에서 나오는지 유무는 상인에게는 다음 문제다. 수익성이 좋으면 그만이다.
   
   돈이 흔한 차산에서 벌어지는 집짓기 열풍이 마헤이짜이에서는 이미 지나갔다. 6개월 만에 마헤이짜이를 다시 가보니 고급차 구매와 인테리어에 큰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었다. 집안의 기둥은 단순한 시멘트가 아닌 대리석으로 빛나고 있다.
   
   수완이 좋은 차농은 자신이 만든 차뿐 아니라 다른 차농의 차까지 팔아주는 모차 중개상 역할을 하며 수입을 높이고 있었다. 차농은 이제 단순한 농민이 아니다. 건강한 차를 만들어내야 하는 차농의 농심(農心)과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차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필자가 아는 차농은 중형 차창에 보통급 모차를 대량 공급한다. 특급과 초특급은 고수차를 전문으로 하는 차창과 상인에게 소량 공급한다. 특급과 초특급의 질적 차이는 미세하지만 가격 차는 엄청나다. 그는 한국 사람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 차에 대한 분별력이 약한 사람이 오면 저급한 모차를 특급으로 바꾸어 파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마헤이짜이에는 ‘저울의 달인’이 살고 있다. 마을 초입에 세워진 마헤이짜이 표지석 근처에 사는 여인은 며느리와 손자도 있는 젊은 할머니다. 1인 6역(아내, 어머니, 시어머니, 할머니, 차농, 모차가공기술자)을 소화해내는 ‘저울의 달인’은 오늘도 일손을 쉬지 않고 개미보다 열심히 일을 한다. 오늘 딴 찻잎을 살청(殺靑)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틈틈이 모차에서 황편과 이물질을 골라낸다. 사람 좋은 남편은 대낮부터 얼큰하여 마냥 기분이 좋아 보인다. 전에 보았던 어린 강아지는 이제 성견이 되어 주인의 모차를 지키는 막중한 일을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집의 며느리는 아기를 돌보는 것 말고는 모든 일에서 열외다.
   
   돈풍년이 가져온 또 다른 변화가 마헤이짜이에 있다. 나와 이웃을 가르는 철조망이 생겼다. 빗장조차 없던 차산의 창고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애완견이 아닌 방범용으로 키우는 커다란 개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돈의 맛은 가끔 무섭다.

돈풍년 만전 차산

차 이야기/보이차 산지 2020. 2. 29. 18:48 Posted by 거목

만림의 고차수 보호 표지판.

중국 윈난(雲南)성에는 제갈량이 살아 있다. 삼국지의 제갈공명 관련 전설이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윈난의 차산(茶山)에 살아 숨쉰다. 공명산(孔明山)이라 불리는 차산이, 남나산(南山)과 유락산(攸樂山) 두 곳에 있으며 모두 그럴 듯한 야설이 있다. 오늘 찾아가는 만전(蠻)차산은 제갈량이 쇠벽돌을 묻어 둔 곳이라는 설화에서 마을 이름이 왔다.

   
   차를 실은 마방(馬幇) 행렬이 차마고도(茶馬古道)를 분주하게 왕래하던 시절부터 오늘까지 만전의 모차(毛茶)는 이우(易武)에서 만드는 보이차의 기본 재료로 널리 쓰인다. 만전의 차가 독자적으로 부각된 적은 없다. 고(古) 6대 차산 중 예로부터 홀대받아 왔던 만전차산은 덜 알려진 덕에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거친 파고를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소외되어 주목을 받지 못한 차산이었기에 오히려 잘 보전된 고차수림(古茶樹林)이 만전에 있다.
   
   나 역시 다른 유명 차산에 비하여 만전은 탐방 순위에서 뒤로 밀어두고 있었다. 지난해 의방(倚邦)차산을 가기 위해 이우에서 출발하여 상명(象明)까지 갔더니 유일한 산길 입구를 공사 중이라며 막아놓고 오토바이만 통과시키고 있었다. 혁등(革登)차산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길을 물어보니 어제 내린 비로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며 달리던 차량을 덮쳐 사망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휴일이어서 아직도 고목을 치우지 못해 차량 통과가 불가하다는 의방차산의 차농 얘기에 막막했다.
   
   차산의 일정은 늘 변수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반나절이나 소비한 것이 허무했다. 하루를 그냥 날려버리기에는 아쉬워 마지못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곳이 만전이었다. 제갈량이 묻었다는 쇠벽돌이 아닌, 흙으로 구운 회색 벽돌로 길을 포장한 독특한 도로를 지나 찾아간 곳의 풍광이 의외로 야생 그 자체였다.
   
   만전 고차산(古茶山)은 8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만장촌(曼庄村)은 가장 인구가 많은 대채(大寨·큰마을)로 만전의 중심 마을이다. 고차수다원(古茶樹茶園)이 가장 많은 만림(曼林)이 내가 가는 곳이다. 불을 섬기는 이족(彛族)의 한 갈래인 향탕이족(香糖彛族)이 살고 있는 만림은 고 6대 차산 중에서 가장 보전 상태가 좋은 차밭이 약 1000묘(畝·현지 1묘는 약 666.7㎡) 규모로 최대를 자랑한다. 이곳의 고차수는 100년 이상 300년 수령이 많으며 가장 큰 고차수의 높이가 3.9m에 달하고 나무 둘레가 1m 정도 된다. 이우의 다른 차산과 달리 가지치기를 많이 하지 않아 왜화(倭化)하지 않은 차나무가 많다.
   
   해발 1180m에 있는 만림은 초등학교가 30㎞ 떨어져 있어 교육과 교통은 열악하다.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만 전력량이 충분하지 않다. 만전의 주 수입원은 차와 고무로부터 나온다. 해발이 높은 산등성이에는 차나무가 있고 해발이 낮은 곳에서는 고무나무를 키운다. 고무나무에 유황 성분이 강한 농약을 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고지대라고 해서 바람을 타고 날리는 농약 성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다 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차산 환경은 고 6대 차산 중에 제일 우월하지만 결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만전을 처음 찾았을 때 원시림 속에 보물처럼 흩어져 있던 고차수(古茶樹)를 발견하고 흥분한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방문 시도를 하였을 때는 타고 가던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아쉽게도 탐방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또 만전을 찾는 이유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농민공(農民工) 생활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고향에 돌아온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를 만나고 싶어서다.
   
   음습한 대도시의 지하에서 어렵게 살던 이 부부는 보이차 가격의 안정화에 힘입어 만전의 모차 가격이 급상승하자 굳이 힘든 타향살이를 할 이유가 없어 귀농했다. 젊은 사내의 팔뚝에는 도시의 악몽처럼 기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넉넉하지 않은 전기 공급 때문에 저녁을 준비하려면 등산용 미니헤드램프를 머리에 쓰고 요리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이들 부부는 행복하다.
   
   어린 아들은 자연과 더불어 마음대로 뛰어놀고 부부의 수입은 농민공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던 높은 수준이다. 반가운 소식은 이들 부부의 동생들도 고향에 돌아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다. 차농의 결혼은 하나의 차산이 둘로 늘어난다는 실물 경제적 효과가 있다. 찻값이 오른 덕에 도시로 나간 만전의 청춘들이 서둘러 귀향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연명하던 차산의 식솔들이 다시 만나 웃음꽃을 피운다.
   
   신선한 공기와 원시림에 둘러싸인 야외 차탁에서 마시는 보이차의 맛은 다른 무엇과 비길 수 없는 호사(豪奢)였다. 방목하여 키우는 흑돼지와 사이좋게 어울려 다니는 닭과 오리 사이로 마을 어른이 기다란 사제 총을 둘러메고 나타난다. 그의 손에는 산에서 잡은 야생 공작과 청솔모가 들려 있다. 차산의 경제권을 쥔 아들과 며느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한가로이 사냥을 즐기고 오는 노인의 얼굴에 건강미가 넘친다.
   
   만전차산의 주가가 오른 것을 증명하듯 주택개량사업이 마을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돈이 넘치는 차산의 공통점은 집짓기 열풍이다. 아쉬운 점은 새로 지어지는 집들이 하나같이 환경을 무시한 자재 사용과 도시화한 외관을 보여 원시림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한쪽에 보이차를 1차 가공하는 초제소(初製所)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 소유주는 쿤밍(昆明)에서 차업을 하는 한국인이다. 고 6대 차산을 중심으로 모차를 수집하여 보이차를 만드는 그는 원래 자그마한 여행업을 했다. 윈난이 좋아 돌아다니다가 보이차가 돈이 되는 세상이 되자 차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역시 차산의 환경을 무시한 시멘트와 벽돌로 건물을 짓고 플라스틱으로 마감을 하고 있었다. 결정은 그의 몫이지만 좀 더 미래를 바라보며 친환경 요소로 지을 것을 부탁할 기회를 놓쳐 안타까웠다.
   
   상명 일원에서는 만전의 고차원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지만 그것만으로 만전차의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만전차 특유의 개성과 맛이 2% 부족한 현실은 라오반장(老班章)과 빙다오(氷島)의 전설을 따라가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수익을 전제로 한 차산 선정에는 고려할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차의 맛과 품은 우선순위에서 빠질 수 없다. 그러나 나의 기준은 맛 이전에 차산의 생태환경이 최우선이다. 만전으로 귀농하는 젊은이들이 제갈량의 지혜를 되살려 건강한 생태환경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