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보이차 3대 산구(产区)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이차는 국가기준에 따라 지리적으로 보호되는 운남대엽종을 원료로 하고 지리적으로 보호되는 범위 내에서 특정한 가공공법으로 만든 독특한 품질의 특징을 가진 차를 말합니다.
보이차는 가공 공법 및 품질 특성에 따라 보이생차와 보이숙차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집니다.
외관 형태에 따라서는 산차와 긴압차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집니다.
국가 표준 보이차 원료는 운남대엽종이지만 차(茶) 테두리 안에서는 운남의 일부 지역의 작은 잎으로 만

보이차에 대해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정의한 보이차의 지리적 보호 범위는 어떤 곳일까요?
국가 표준에 따르면 그 범위는 운남성 보이시(普洱市, 푸얼시), 서쌍판납주(西双版纳州,시솽반나주),
임창시(临沧市,린창시), 곤명시(昆明市,쿤밍시), 대리주(大理州,다리주), 보산시(保山市,바오산시),
덕굉주(德宏州,더훙주), 초웅주(楚雄州,추슝주), 홍하주(红河州,훙허주), 옥계시(玉溪市,옥시시),
문산주(文山州,윈난주)로 11개 주(州) 또는 시(市)를 말합니다.
지역 위치에 따라 보이차의 유명 산구(产区)는 크게 임창산구(临沧产区, 린창산구), 보이시산구(普洱市(原思茅)产区, 푸얼시(옛지명 사모)산구), 서쌍판납산구(西双版纳产区,시솽반나산구) 로 3대 산구로 나눠집니다.

3대 차구의 위치


1. 임창산구(临沧产区, 린창산구)

임창산구 (临沧产区, 린창산구) 


임창(临沧) 전에는 '면녕(缅宁,멘닝)'이라고 불렀으나 란창강(澜沧江)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임창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중국 문화로 유명하며 차나무의 품종이 많아 '차수기인고(茶树基因库)'라고 불리우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홍(滇红,중국 운남성에서 산출되는 홍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2. 보이산구(普洱产区, 푸얼산구)

보이산구 (普洱产区, 푸얼산구) 

처음 접하시는 다인들은 보이차가 유명해서 사모(思茅)를 보이(普洱, 푸얼)시로 바뀐거 아니야는 의문점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청나라 옹정(雍正)시대 때 사모(思茅)는 보이차의 가장 큰 집산지(集散地) 중 하나로
당시 중앙 정부가 관할하기 쉽도록 보이부(普洱府)를 설치하였으며 그 후에 사모(思茅)에서 보이(普洱)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모산구(思茅产区)라고 하면 명성이 자자한 1300여 년의 차 역사를 가진 경매차산(景迈茶山)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경매차산(景迈茶山)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되고 면적이 큰 인공 재배형 고차림(古茶林)으로
차나무 자연 박물관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서쌍판납산구(西双版纳产区, 시솽반나산구)

서쌍판납산구(西双版纳产区, 시솽반나산구) 맹랍현 
서쌍판납산구(西双版纳产区, 시솽반나산구) 경홍시
서쌍판납산구(西双版纳产区, 시솽반나산구) 맹해현 


서쌍판납(西双版纳,시솽반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이차 발상지이며
차마고도(茶马古道)의 발원지로 다른 산지들보다 차산 자원이 매우 풍부합니다.
서쌍판납(西双版纳,시솽반나)에서는 익숙한 몇몇의 명산과 명채(名寨)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야말로 보이차의 대보고(大宝库)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보이차 6대 차산 (이무(易武), 의방(倚邦), 만전(蛮砖), 망지(莽枝), 혁등(革登), 유락(攸乐))
모두 서쌍판납 경내(境内)에 있습니다.
맹해의 파달차산(巴达茶山)에는 1700여 년 된 야생 고차나무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차나무의 기원이 중국임을 전세계에 증명하였습니다.

 

맹송(勐宋) 차산

차 이야기/보이차 산지 2020. 3. 22. 21:52 Posted by 거목

맹해현(勐海县) 맹송향(勐宋鄕) 경내에 있는 맹송고차산은 맹해현에서 가장 오래된 고차구(古茶区) 중의 하
나입니다. 동쪽으로는 경홍시와 접하고 있고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남나산(南糯⼭)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맹송차산의 차나무 재배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남나산에 비해 결코 짧지 않은데, 이 곳에서 최초로 차나무를 심고 가꾼 것은 "라후족( 拉祜族)"입니다. 라후족은 운남의 란창강(瀾滄江) 서쪽 지방에 주로 거주하는데, 미얀마와 타이에도 분포해 있는 소수민족입니다. 이들이 먼저 들어와 차 재배를 한 후 한족이 합류하면서 지금의 맹송 차산은 한족과 소수민족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맹송 차산의 고차수는 해발 1,600미터 정도부터 분포하고 있으며, 계속 올라가면 서쌍판납의 최고봉인 해발
2,240미터의 "화주량즈(滑⽵梁⼦)"에 도달합니다. "량즈"는 중국어로 "고갯마루"라는 뜻인데, 운남의 산 지
명에는 이 "량즈"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화주량즈에 올라가면 맹해의 유명한 고차산지가 거의 다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규모가 제법 큰
고차수가 자라고 있으며, 밀림과 잡목으로 혼재되어 있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이 닿지 않은 곳으로 이곳의
고차수는 오염이 전혀 없는 원시 생태림을 자랑합니다.
남나산의 차가 강한 향과 자극적인 맛을 지니고 있는 반면, 맹송 차산의 차는 깊고 부드러운 맛을 냅니다. 이러한 맹송의 차가 얼마 전부터 많은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서쌍판납의 중요한 고차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금번 답사에서 겸리 주인장은 화주량즈까지 올라가 고차산지를 둘러보았으며, 맹송의 한 차창인 원미상차창을 답사하였습니다.
1. 맹송 차산


2. 원미상차창

 

[칼럼니스트 이수백] 서쌍판납(西双版納, 시쐉반나)은 북회귀선에서의 유일한 오아시스이며, 운남성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태국과 인접한다. 서쌍판납의 열대우림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열대식물 13,000 종류 이상이다.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 지도 (좌측) 노반장마을 입구 (우측)

특히 서쌍판납은 세계 차의 원생지 중의 하나로 야생차나무가 대규모 집중 생장하는 곳이 많으며 총면적은 120만평이상 된다. 서쌍판납은 보이차 인공재배를 가장 먼저하는 곳이고 청나라에 조성된 차원(茶園)만해도 1000만평이상 이다.

서쌍판납은 중국 내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산이 높고 넓은 강의 원인으로 내륙의 한족인들이 명나라까지 여기에 오지 못하였다. 명나라의 관료인 사조제(謝肇淛)의 저서’전략(滇略)’에 따라 1620년에 보이차가 이미 중국 전역에서 보급되었으며 그리고 90%가 서쌍판납의 14개 차산에서 생산되었다.

란창강(좌측) 과 서쌍판납 14개 고차산 지도(우측)

서쌍판납주에서 14개 고차산이 란창강의 동, 서 양쪽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동쪽의 유락(攸樂,유러), 의방(倚邦,이방), 이무(易武,이우), 혁등(革登, 거등), 망지(莽枝,망즈), 만전(蛮砖,만좐)이라는 6대고(古)차산은 모두 맹랍(勐臘,멍라)현에 위치하여 청나라시대 공차의 산지이었고 특히 의방지역의 만송(曼松, 만송)차는 '돈이 많아도 살수 없으며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귀하다.

또한 이무지역의 차는 보이차 중의 '퀸'이라고 불리며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유명하다. 란창강 서쪽의 남나산(南糥山, 난눠산), 파사(帕沙,파사), 하개(賀開,흐어카이), 포랑산(布朗山,뿌랑산),파달(巴達,바다), (대)맹송(大勐宋,따멍송), (소)맹송(小勐宋,시오멍송), 만나(曼糥,만눠) 8대고(古)차산은 모두 맹해(勐海, 멍하이)현에 위치하여 보이차를 가장많이 생산하고 있고 유명한 차산지가 많은 곳이다.

특히 보이차 중의 '킹'이라고 불리는 '노반장' 보이차의 산지인 '노반장 마을'이 포랑산에 위치하고 있다. 노반장 차를 마실 때 입에서 강한 쓴 맛과 떫은 맛을 느낀 후 바로 강한 회감으로 전화하는 것이 특징이며 향기도 매우 강하고 지속성이 길다.  

서쌍판납의 보이차 재배는 당나라 이전부터 시작하였으며 당시에 서쌍판납산의 보이차가 양자강(長江, 창지앙)과 황하(黃河, 황흐어)의 시발점인 티베트까지 유통되었다. 서쌍판납에서 차를 재배하는 주요 소수민족은 태족(傣族, 다이즈우), 포랑족(布朗族, 뿌랑즈우), 함니족(哈尼族, 하니즈우), 랍호족(拉祜族, 라후즈우), 기낙족(基諾族, 지눠즈우)과 이족(彝族, 이즈우)이며 그들은 몇십 세대를 거쳐서 차를 재배해왔으며1910년까지 14개 차산에서 2000만평의 보이차를 재배하였다.

파아이렁의 후손 포랑왕자 소국문(蘇國文, 수궈우은)씨가 필자에게 선물로 한 책에 싸인하는 모습(좌측) 과 운남 4대차장중의 하나인 맹해차장 정문 (우측)

포랑족의 보이차 재배역사는 1000년 넘어 가장 먼저 보이차를 인공 재배하는 민족이다. 1000여년 전 포랑족의 두인(頭人,터우인,리더) 파아이렁(帕哎冷,태족언어로의 발음)이 보치아를 발견하고 서쌍판납 옆 보이시 경매(景迈,징마이)산에서 보이차의 재배역사를 열었다.

중국 운남의 4대차장 중의 맹해차창(현,대익차업그룹)과 곤명차창(현, 운남중차차엽유한공사)모두 서쌍판납주에 위치하고 있다.

대익그룹은 2011년에 한국에서 대익인터내셔날 코리아를 설립하여 현재 24개의 전문점을 운영 중이다.

청나라 옹정황제에 진상되며 황실공차 지정

 

중국 이우(易武) 지역의 보이차(普洱茶)는 청나라 옹정황제(雍正皇帝)에게 1729년 처음 진상되면서 황실공차(皇室貢茶)로 지정됐다. 차마고도(茶馬高道)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우고진(易武古鎭)은 6대 차산에서 생산한 차의 집산지였다. 다이(傣)족 발음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이우’는 ‘미녀 뱀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스핑(石屛)의 한족들이 명나라 때 이주해 차를 만들었던 이우는 윈난(雲南)의 다른 차산과 달리 소수민족과 한족 문화가 공존해 왔다.

이우는 노차(老茶)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인 골동급(骨董級) 노차의 고향이다. 마시는 골동품으로 알려진 호급차(號級茶) 대부분이 100여 개가 넘는 이우의 차장(茶莊)에서 만들어졌었다. 공차(貢茶)제도가 사라진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절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대부분 호(號)로 끝나기에 호급차로 부르는 진품은 한 편에 수억원을 호가한다. 최근 홍콩 경매장에 나온 송빙호(宋聘號)와 생산시기가 1920년대로 추정되는 양빙호(楊聘號)는 2억7000만원과 3억원에 각각 낙찰됐다.

보이차 박물관

이우는 최상급인 ‘골동급’ 노차의 고향

이우의 유명한 차장들은 농업 집단화와 함께 개인상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를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식량증가와 생산성만 강조한 대약진운동은 차나무를 마구 베어낸 자리에 옥수수를 심어버렸다. 당시의 차 가격은 동일 중량의 옥수수보다 비싸지 않았다 한다. 전통문화를 부인하며 공자마저 인정하지 않던 문화대혁명은 나이 어린 홍위병을 앞세워 보이차 장인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홍위병은 집 안과 창고에 남아 있던 보이차를 자본주의 자산으로 치부해 불태웠다. 전통 보이차의 흑역사가 진행되며 이우의 명성도 잊혀졌다. 

이우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초기에도 엄동설한이었다. 지방정부 차원에서 차 산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해도 차산은 황무지처럼 방치돼 있었다. 보이차 제조기술을 가진 인력이 이우에는 이미 없었다. 제조 기술자였던 사람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을 생각하면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신(新)6대 차산의 맹주, 멍하이(勐海)로 넘어간 보이차 생산의 주도권을 찾아오기는 요원했다. 이우의 전통과 명성을 부활시키는 행운의 봄바람은 뜻밖에도 대만에서 불어왔다.

이우를 찾아온 대만의 차상을 반기는 이우향장 장이(張毅)는 호급차 제조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어렵게 찾아내서 전통 제작기법으로 만든 정통 보이차를 만들었다. 수십 년 전 이우의 차를 가져간 추억이 있던 홍콩에서도 이 소식을 알고 주문이 들어왔다. 보이차 조공행렬을 재현한 ‘관마대도(官馬大道)’ 행사가 중국 CCTV의 협조로 2006년 4월2일 이우고진에서 열렸다. 9개 성, 3개 시, 76개 현을 거쳐 1만2000km를 말과 사람이 함께 걸어 베이징에 도착했다. 말과 사람이 모두 지쳐서 행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비용은 초과됐지만, 보이차를 중국 전역에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는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

이우의 차 산업이 다시 꽃피우게 되는 재미난 일이 때마침 벌어졌다. 150여 년 전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바쳐진 보이차의 한 종류인 금과공차(金瓜貢茶)가 자금성(紫禁城) 지하창고에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자금성에 함께 보관됐던 다른 종류의 차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보이차만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수용단(萬壽龍團)이라고 이름 붙여진 노차는 보이차태상황으로 모셔져 일반에 공개됐다. 중국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보이차는 신비한 차로 다시 주목받았다. 공차의 시발점이자 노차의 고향인 이우의 차 산업이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우는 밀려오는 차상들과 넘치는 관광객들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중국 서남쪽 끝에 있는 윈난성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시상반나(西雙版納)의 주도(州都) 징훙(景洪)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달려 이우에 도착했다. 보이차로 빛나는 시절을 재연하고 있는 이우는 이동거리도 짧고 대부분 포장도로이기에 다른 보이차 산지보다 찾아가기 편하다. ‘관마대도’ 행사 기념비가 있는 언덕과 초등학교 사이에 남아 있는 이우의 옛 마을은 가옥과 길은 잘 보존돼 있지만, 전통과 맥을 제대로 이어오는 이우의 후손은 많지 않다. 갑자기 불어온 보이차 붐에 편승해 보이차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오던 후손이 이름만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던 상호로 뜬금없이 보이차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이우에서 만들어지는 보이차는 대형 차장에서 제조하는 기계식 공정이 아닌 전통 수공 방식으로 제다(製茶)해 전통석모압병(傳統石模壓餠)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 많다. 영화관이었던 단독건물을 개조해 보이차 제조와 건조 창고로 사용하는 지인을 만났다. 산 높고 물 맑은 청정지역답게 밭이 아닌 산속에서 채취한 귀한 나물과 버섯으로 가득한 식탁 위의, 방목해서 키워 지방이 껌처럼 쫄깃한 돼지고기 수육과 민물생선 양념구이가 침샘을 자극했다. 대나무를 갉아먹고 사는 차 벌레를 튀긴 특식요리는 보기엔 엽기적이었지만 아삭한 식감이 새우깡보다 맛있었다. 자리를 차실로 옮겨 그가 만든 이우의 고수차를 마셨다. 이우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와 단아함을 가득 품고 있는 고수차를 시음하더니, 동행한 중국인 지인들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황후의 맛을 즐겼다.

보이차의 모양을 잡아가는 기술자

 넘치는 관광객으로 ‘제2의 전성기’ 맞은 이우

이우보다 먼저 차산지로 인정받았던 만사(漫撒)와 만라(曼腊)는 화재와 민란으로 차산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1728년부터 이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보이부지(普洱府志) 기록을 보면 당시 보이차는 금값의 두 배를 줘야 살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황후가 아니면 마실 수 없을 정도의 사치품이었다. 이우의 보이차는 흔히 이우 정산(正山)차로 통용된다. 정산은 특정한 산의 이름이 아니다. 이우와 만사 그리고 만라를 아우르는, 무려 9240만㎡에 달하는 여러 산줄기에서 나오는 차를 정산차에 포함시킨다. 해발 700m에서 2000m에 이르는 이 지역의 고수차 생산량만 90톤에 육박한다. 

이우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중국보이차고6대차산문화박물관’을 관리인의 안내로 둘러보고 신시가지로 변하고 있는 이우거리를 지나 보이차의 모료가 되는 마오차(毛茶)를 연도별로 보관하고 있는 차 창고를 찾았다. 창고 책임자의 안내로 생산시기와 마을에 따라 분류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수차를 만나보는 호사를 누렸다. 이우 정산이라는 막연한 이름보다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 명시된 차를 선택하면 좋은 차를 선별하는 지혜가 될 수 있다.

중국 최후 소수민족 기낙족, 쇠퇴일로 걷다 뒤늦게 기사회생

 

기낙(基諾)은 청나라 보이부(普府)에 소속된 고(古) 6대 차산 중 으뜸이었다. 생산량도 많고 차(茶) 품질이 좋은 만큼, 유명 차산지에서도 기낙 지역 찻잎을 가져다 가공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이 차를 전파했다는 설화가 있는 공명산이 바로 기낙산이다. 기낙의 당시 이름은 유락(悠樂)이었다. 명나라 말기부터 전성기를 누렸던 기낙의 차산은 청나라 때 민란과 화재, 전염병까지 덮치면서 황폐해졌다. 그 후 300년 동안 쇠퇴일로를 걷던 기낙이 보이차 열풍에 힘입어 기사회생하고 있다.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열리는 기낙족 전통 축제에서 대고무를 추고 있는 모습 

청나라 때 민란과 화재로 차산 황폐화

기낙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40여 개 촌락으로 이뤄진 기낙족향은 운남성(雲南省) 서쌍판납태족자치주(西雙版納族自治州)의 주도인 경홍시(景洪市)에서 동북 방향 24km에 위치한다. 동서길이가 75km인 기낙산은 남북 사이도 50km가 넘지만 도로망이 촘촘히 발달해 사통팔달로 산길이 연계되며 도로 포장률도 산골답지 않게 60%에 육박한다. 기낙산은 해발고도가 575m부터 시작해 높은 지대는 1691m에 달해 일교차가 큰 산악지대 기후 특성을 갖고 있다. 최고기온은 40도를 넘나들고 연평균기온은 20도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연 강수량은 1400mm로 풍부하다.

기낙족향은 인구 1만8000여 명 중 97%가 기낙족이다. 기낙족은 1979년 중국국무원이 공식 인정한 마지막 소수민족으로 등재됐다. 한장어계(漢藏語系) 장면어족(藏緬語族)에 속하는 기낙족은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어 민족에 대한 고대자료가 없다.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어른’이라는 뜻을 가진 소수민족 ‘기낙’은 원시 씨족사회 흔적이 남아 있어 장손을 중심으로 대가족이 공동체를 이뤄 거주한다. 부친이 돌아가시면 1년 후에 새집을 지어 자녀들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신축한 집을 바치는 ‘상신방(上新房)’이라는 독특한 의식을 한다. 

기낙족은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특무극(特懋克)’이라는 전통 축제를 벌인다. 태양을 상징하는 커다란 북을 마을 한가운데 매달아놓고 북을 두드리며 춤추는 대고무(大鼓舞)를 필두로 죽간무(竹竿舞)와 파종무(播舞)를 추며 음식을 나눈다. 여자들은 방직기술과 자수 솜씨를 겨루며 풍성한 한 해를 기원한다. 제갈공명이 촉나라로 회군할 때 따라가지 않고 차를 재배하며 기낙족과 동화된 병사들의 후예를 주락족(落族)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기낙족은 제갈공명을 차를 전파해 준 차신으로 믿고 있다. 제갈공명이 구리로 만든 커다란 징을 남겨뒀다고 알려진 기낙산을 공명산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낙족은 음력 7월23일 제갈공명이 태어난 날에 맞춰 봄에 딴 첫 찻잎을 바치고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는 ‘차조회(茶祖會)’를 매년 이어간다. 외지인들이 원주민을 속이고 사기도박으로 차산을 빼앗자 화가 난 토착민들이 차산에 불을 지르고 유혈충돌이 벌어졌을 때 제갈공명이 화해시켰다는 설화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구전돼 오는 곳이 기낙이다.

기낙족은 숯불로 찻잎을 구워 끓여 마시는 화소차(火燒茶)라는 특이한 전통차 제조기법과 량반차(凉拌茶)라는 원시 형태의 차 섭취 풍습이 있다. 량반차는 찻잎을 기름과 간장으로 버무려 나물로 먹는 음식이다. 찻잎을 죽통 안에 다져넣어 숯불로 열을 가해 만드는 죽통차(竹筒茶)와 찻잎을 달이고 졸여 검고 끈적한 상태로 만든 차고(茶膏)는 특화된 기낙족 산물이다. 차고를 물에 녹여 마시면 급체와 설사를 잡아주고 딸꾹질을 멈추게 한다. 부은 상처에 바르면 부기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기낙은 1728년까지 청나라 정부가 아닌 지방 토호세력이 지배했다. 당시 한족 상인이 살해당하고 토사가 이를 묵인하는 일이 있었다.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대항하는 소수민족을 참살하고 차산과 마을을 불태우는 ‘겁상해민(劫商害民)’을 통해 청나라 정부가 관리를 보내 직접 다스리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시행했다. 1729년(옹정 7년) 청나라는 기낙의 옛 지명인 유락에 보이부를 처음 설치했다. 종이품 관직에 해당하는 동지(同知)를 책임자로 삼고 유격전에 능한 무관에게 병사 500명을 주어 보이부에 주둔하게 했다.  

기낙에 설치한 보이부는 기낙을 비롯한 고 6대 차산에서 황실에 바치는 공차와 차세(茶稅) 징수임무를 수행했다. 기낙 지역을 넘어 라오스와 경홍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홍 일대는 전통적으로 태족(族)이 장악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경홍시가 주도인 서쌍판납은 태족 자치주다. 청나라 정부의 직접 통치에 반기를 든 태족은 기낙족과 연합해 봉기했다. 차산과 마을은 또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끈질긴 저항은 3년이 지나도록 진압되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던 차산은 황무지로 쇠락했다. 

기낙은 황폐화되고 악성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렸다. 청나라 관병이 병마에 시달리면서 토벌은커녕 기낙에 주둔하기조차 힘들어졌다. 1735년 청나라는 치욕을 감수하고 보이부를 사모(思茅)로 이동시켰다. 개토귀류 정책을 수정해 의방(倚邦)의 소수민족을 세습관리로 임명하고 기낙을 통제하도록 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77년 동안 기낙족은 보이차를 만들 수 없었다. 기낙에서 채취한 찻잎을 상인들이 수매해 이무(易武)와 사모, 의방에서 차를 만들었다. 고 6대 차산의 선두주자 기낙은 몰락하고 의방과 이무가 새로운 보이차 강자로 부각됐다.

기낙의 찻잎은 인도와 유럽에도 팔려 나갔다. 1886년 영국인 클라크가 쓴 책 《귀주성과 운남성》을 보면 영국 동인도회사가 콜카타(Kolkata)와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기낙 찻잎을 수입해 관리한 기록이 나온다. 청나라는 망했어도 기낙의 수난사는 끝나지 않았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피해 들판을 떠난 기낙족은 깊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느라 차밭을 불태워야만 했다. 1941년 이무에서 차 장사를 하는 양안원(楊安元)이 기낙족 전통과 관습을 무시했다가 충돌이 생겼다. 기낙족은 인근에 거주하는 요족(族)과 합니족(哈尼族)을 규합해 폭동을 일으켰다. 진압을 위해 국민당 군대가 출동했다. 

기낙산 자락 고차수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20세기 말부터 보이차 열풍 시작돼

기낙의 산야는 소수민족과 함께 죽어갔다. 격랑의 시기가 지나고 1970년대 측량 결과 청나라 초기 700만㎡가 넘던 다원은 150만㎡로 줄어 있었다. 20세기 말부터 불어온 보이차 바람이 뒤늦게 기낙에도 불기 시작했다. 밀림 속에 숨어 있던 고차수(古茶樹)들이 잠을 깨기 시작했다. 고차수로 만든 고수차 가격이 급등하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차’로 고난받던 기낙족에게도 훈풍이 불어왔다. 중국 최후의 소수민족 기낙족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색자원, ‘차’가 이번에는 전화위복이 되기 바란다. 

쓸쓸함이 넉넉했다. 정적을 깨고 남정네들이 장작을 패는 소리만 의방(倚邦) 옛 거리를 울리고 있었다. 3년 만에 다시 찾아온 의방은 여전히 한적한 산골마을이었다. 청나라 시절 의방 일대는 19개 자연부락의 인구가 9만 명이 넘었다. 차를 사고파는 봄철에는 외지에서 온 상인과 노동 인력까지 가세해 20만 명이 의방차산을 누비고 다녔다 한다. 현재는 의방을 포함한 13개 마을을 다 합쳐도 214가구에 936명이 살고 있다.

의방은 명나라 말기부터 석병(石屛)의 한족과 초웅(楚雄)에 거주하던 이족(彛族)이 집단이주해 차 산업을 일으켰다. 청나라 초기에 사천성(四川省) 농부들이 유입되면서 사천에서 가져온 소엽종(小葉種) 차나무를 대량 증식시켰다. 소엽종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보내고, 전설적인 유명 차창에서 소엽종으로 보이차를 만들던 의방은 고(古) 6대 차산 가운데서도 해발고도가 제일 높은 곳이다. 해발 1950m에서 채취한 소엽종 찻잎을 우리면 쓴맛은 적고 부드러운 단맛이 올라온다.  

소엽종 차나무의 새싹은 중국 현지에서 고양이 귀라고도 불린다.

 

소엽종 보이차, 정부의 보이차 개념과 상충

의방에서 만들어온 소엽종 보이차는 2008년 중국 정부가 정한 보이차 개념과 상충된다. 운남성 표준계량국이 정의한 보이차는 ‘운남 지역 대엽종 차나무 잎을 쇄청한 원료로 만든 생차(生茶)와 숙차(熟茶)’지만, 대엽종이 아닌 소엽종으로 만든 보이차가 청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엽종 보이차는 중국 정부가 공표한 보이차 정의에 맞지 않다는 논란이 가열되면서 소엽종 보이차의 원조인 의방은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 옛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의방을 찾는 외지인이 많이 늘었다. 

의방 가는 길은 크게 두 방향이 있다. 운남성 서쌍판납주의 주도인 경홍시에서 이무(易武)로 가서 상명(象明)을 거치는 길과 기낙(基諾)을 경유하는 방법이다. 새로 조성된 기낙 민속촌도 볼 겸 필자는 기낙 방향으로 갔다. 중국 전체 인구에서 2만 명도 채 안 되는 소수민족 기낙족은 15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미혼남녀의 교제를 위해 마을에서 제공하는 공방(公房)을 사용할 수 있다. 기낙 민속촌은 산허리를 향해 올라가며 기낙족의 조상신과 주거풍속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산등성이를 다듬어 만든 광장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큰 북을 치며 대고무(大鼓舞)를 추고 있었다. 산나물을 곁들인 간단한 식사와 기낙족이 만든 보이차가 공연 중에 제공됐다.   

의방에 햇살이 남아 있을 때 도착하기 위해 민속공연 도중에 산 아래로 내려왔다. 하산 길에도 전통 베틀로 베를 짜는 작업장과 철을 다루는 대장간이 눈길을 끌었다. 발 딛는 부분이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진 대나무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기낙족 청년의 기예가 돋보였다. 불쇼와 민속전시관도 있었지만 산길로 140km를 더 가야 하는 만큼 사륜구동을 타고 의방으로 향했다. 제갈공명이 말 탈 때 발을 끼우는 쇠로 된 발걸이 한 쌍을 묻어두고 갔다는 혁등(革登)차산을 지나 의방에 도착했다. 의방은 제갈공명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남겨뒀다는 설화가 있다. 

의방 일대를 지배했던 태족(傣族)은 의방을 마랍(磨腊)이라 불렀다. 마랍은 ‘차 마을’이란 뜻이다. 360㎢에 달하는 고산지대에 다민족이 어울려 살았던 중심지가 의방의 옛 거리다. 경제와 지역정치의 중심 무대가 된 의방의 부흥은 기낙 지역의 민란 덕분에 이뤄졌다. 1729년(청, 옹정 7년) 기낙에 보이부(普洱府)를 처음 설치한 청나라는 민란과 전염성이 강한 풍토병을 피해 1735년 사모(思茅)로 보이부를 옮기며 유화정책을 썼다. 중앙관리가 아닌 의방의 토착세력을 세습관리로 임명하고 기낙을 통제하도록 했다.   

① 기낙족이 민속촌 산등성이에 모셔놓은 조상신 ② 칼날사다리를 내려온 기낙족

 

차나무 살리기 위해 큰 나무 편법 고사

의방 토사(土司)로 임명된 조(曹)씨 가문은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를 이어 의방의 번영과 몰락을 함께했다. 돈이 넘치던 시절 의방 토사는 관제묘(關帝廟·관우를 모시는 사당)를 만들어 더 많은 재물을 기원하기도 했다. 관우는 중국에서 재물신(財物神)으로 통한다. 관제묘를 중심으로 향우회 성격의 상인조합이 형성됐다. 석병회관을 필두로 사천회관과 초웅회관이 들어서며 출신 지역별로 회관을 만들어 상인들이 단결했다. 토사 집안으로 위세를 떨치던 조씨 가문도 차 산업에 명운을 걸었다.

의방에서 만든 차는 중국을 넘어 티베트와 홍콩, 마카오로 수출됐다. 월남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에도 보이차가 전해졌다. 의방에 속한 만송(曼松)은 대엽종 차나무와 소엽종 차나무가 혼재한 지역으로 이 둘을 섞어 만든 차가 높은 평가를 받아 만송차를 황실공차로 보냈다. 황실공차는 청나라 조정대신과 외국 사신에게 하사품과 답례품으로 사용됐다. 청나라 말기에는 민란과 치안부재로 차 산지에서 운남성의 성도인 곤명(昆明)까지도 차 운송이 원활하지 않게 됐다. 

의방의 전성기를 가져온 민란은 의방을 잿더미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초웅 지역의 석양은광(石洋銀鑛) 운영권을 놓고 한족과 회족(回族)이 충돌한 사건을 부당하게 처리한 청나라 정부는 1856년 무고한 회교도 4000여 명을 참살한 ‘곤명 대학살’도 수수방관했다. 두문수(杜文秀)와 함께 운남에 거주하는 회족들이 판데(Panthay)의 난을 일으켰다. 청나라에 무시당하던 운남의 다른 소수민족들도 민중봉기에 합류했다. 두문수는 대리(大理)를 점령해 평남국(平南國)을 세워 중국 최초 회교 국가를 선포했다. 

의방에 두문수가 직접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회족과 연합한 소수민족이 의방을 공격해 토호 세력과 상인을 살해하고 차산을 불태웠다. 사흘 밤낮을 휩쓴 화재는 차산을 초토화시켰다. 1867년 곤명 공격에 실패하면서 세력이 꺾인 두문수는 1872년 죽었지만, 민란 와중에 직격탄을 맞은 의방의 차 산업은 이미 풍비박산이 났다. 의방 옛 거리는 퇴락한 건물 앞에 방치된 돌사자만이 옛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는 의방 옛 거리를 벗어나 마을사람과 함께 차산으로 걸어갔다. 밀림 사이로 듬성듬성 서 있는 차나무가 밭에서 재배하는 차나무와는 확연히 구분됐다. 산비탈로 내려서니 공터처럼 황량한 공간에 차나무만 서 있었다. 거목들이 밑동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죽고 있었다. 마을사람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어투로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 때문에 차나무 일조량이 부족한데, 정부에서 벌목을 못하게 해 편법으로 큰 나무들을 고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대략난감이었다. 돈 앞에 자연은 여기에서도 우선순위를 양보하고 있었다. 

비가 내렸다. 밤새도록 퍼붓던 비는 새벽에도 멈추지 않았다. 징홍(景洪)의 아침을 구성진 빗소리로 맞이했다. 윈난성(雲南省) 성도(省都) 쿤밍(昆明)에서 780km 서남 방향에 있는 징홍은 중국에서 유일한 타이(傣)족 자치주, 시솽반나(西雙版納) 주도(州都)로 교통요충지다. 보이차(普洱茶) 고향 윈난성에서도 품질 좋은 차나무가 살고 있는 알짜배기 차산은 징홍을 중심으로 산개돼있다. 일반 승용차로는 갈 수없는 험로가 많아 사륜구동 SUV가 필수다. 가까우면 3시간 멀면 이틀 넘게 가야하는 첩첩산중에 천년 이상 묵은 차나무가 보물처럼 숨어있다.

 

중국 CCTV 제작진이 준비해둔 사륜구동 SUV를 타고 오전 9시 징홍을 출발했다. 차산에서 촬영 중인 CCTV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합류하러 가는 길을 궂은비가 속절없이 따라왔다. 수 천 년 전부터 변하지 않고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중국 전통문화 베스트 5’를 중국정부가 선정하자 중국 CCTV는 다큐멘터리 특집을 기획했다. ‘베스트 5’로 인정받은 보이차를 테마로 ‘티엔츠푸얼(天賜普洱, 하늘이 내려준 선물 보이차)’을 제작하는 CCTV PD 류춘위(劉春雨)와 1년 여에 걸친 일정 조율 끝에 첫 출연하는 날 하염없이 내리는 비는 야속하지만 반갑기도 했다.

 

 

영화와 TV를 연출하며 카메오 출연은 재미삼아 해봤지만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중국CCTV로부터 초대받아 중국 현지에서 보이차 전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상황은 기대보다 긴장이 앞섰다. 이틀 전 오후 6시30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885편은 4시간 35분 만에 쿤밍 창수이(長水)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국내선 항공편이 마감돼 쿤밍공항호텔에서 1박하고 다음 날 오후 징홍 까사(嘎洒)공항에 도착했다. 중국 CCTV 제작진이 예약해준 호텔에서 하룻밤 지새우고 드디어 촬영 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드세게 내리는 비로 촬영이 늦춰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징홍을 벗어난 차는 보이차 산업 중심기지로 부각돼 성장일로에 있는 멍하이((勐海)현을 거쳐 라후(拉祜)족 자치지역인 란창현(瀾滄縣) 후이민향(惠民鄕)에 속한 징마이(景邁) 차산입구까지 3시간 만에 도착했다.

 

비구름 가득한 차산(왼쪽)과 보이차를 만드는 윈난산 대엽종 어린 찻잎의 튼실한 자태

수천 가지도 넘는 다양한 차가 전 세계에서 생산되지만, 중국 10대 명차로 손꼽히는 보이차(普洱茶)는 중국 윈난성(雲南省)에서만 생산된다. 윈난성은 2009년 6월1일부터 중국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은 ‘보이차 지리 표시 상품 보호 관리법’을 적용해 윈난성이 아닌 타 지역에서 생산한 차는 ‘보이차’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없는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단순한 농산물 경지를 넘어 중국 문화와 산업, 그리고 관광업과 연계한 5차 산업 키워드로 떠오른 보이차. 그 실체를 찾아 인천공항에서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내에서 제공하는 커피와 차 대신 더운 물을 부탁해 휴대용 텀블러에 담아온 보이차를 우려 마시며 천연자원이 풍부한 윈난성을 되새김해봤다.  

 

중국 서남단에 있는 윈난성은 동남아 국가로 이어지는 교통요충지다. 서쪽은 미얀마, 남쪽은 베트남 및 라오스와 접해있다. 4000Km가 넘는 긴 국경선을 갖고 있지만 한반도 휴전선과 같은 긴장감은 전혀 없다. 윈난성 동쪽에는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와 구이저우성(貴州省)이 있으며 시장(西藏)자치구와 쓰촨성(四川省)이 북쪽에 있다. 남한의 4.5배가 넘는 면적을 가진 윈난은 ‘첨단 IT산업의 비타민’ 희토류를 비롯해 철, 아연, 구리, 주석, 대리석, 납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평균해발 2000m를 웃도는 윈난은 험준한 산악지대 84%와 완만하게 경사진 구릉지역과 계곡이 11%에 달하며 평평한 분지는 5%에 불과하다.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북위 21~29도에 걸쳐있지만 고산지대가 많아 열대우림기후부터 만년설까지 동시에 공존하는 저위도 고산지대 기후 특징을 갖고 있다. 한 지역에서 1년 4계절을 하루에 느낄 수 있는 윈난은 다양한 희귀식물자원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차산

 

새로 지은 후이민향 시외버스터미널

중국 전체 식물의 55%가 원난성에 자생

 

중국에 존재하는 동식물 50%이상이 분포하는 윈난은 중국 전체 식물의 55%에 이르는 1만7200여종과 중국약용식물의 54%에 해당하는 6100여종이 자생한다. 거대한 중국시장 진출과 네팔, 몽골, 러시아 등 주변국 생물자원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기위해 한·중 생물다양성 공동연구센터를 설립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해외생물소재허브센터가 2007년 4월부터 연구 활동 중이다. 중국 파트너인 윈난성농업과학원(YAAS)은 9개 산하 연구기관에 1000여명의 연구 인력이 소속된 농업전문연구기관이다.

 

윈난성 성도 쿤밍(昆明)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면 징홍까지 45분이면 충분하지만, 승용차를 타고 중국 첫 국제고속도로인 쿤밍-방콕 고속도로와 국도를 이용했다. 8시간이 소요되는 주행시간에도 변화무쌍한 산천이 지루함을 달래줬다. 중국 내수시장은 물론 해외 꽃 수출 중심기지로 자리 잡은 윈난은 화훼재배 최적지로 중국 전체 화훼 재배면적의 40%를 차지하고 있어 달리며 스치는 형형색색의 꽃밭은 안구를 정화시켜줬다. 해발고도가 낮은 지역을 지나면 바나나를 비롯한 열대과일단지가 펼쳐졌다. 질과 양 모두 중국 최고를 자랑하는 담배 밭이 고무나무 경작지와 번갈아 이어졌다. 시솽반나(西雙版納) 주도(州都) 징홍(景洪)이 다가오면서 차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윈난 특산물 중에서도 빠질 수 없는 빼어난 농산물이 차(茶)다. 윈난은 녹차 생산량이 제일 많고 보이차가 그 다음이다. 홍차와 백차도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있다. 

 

고차수 다원

 

저지대에서 재배되는 바나나

이번 탐방 첫 목적지는 세계최대 고차수(古茶樹)단지로 인정받은 망징징마이차구(芒景景邁茶區) 중에서 타이족(傣族寨)이 모여 사는 징마이 따짜이(大寨)로 정했다. 중국정부가 발표한 보이차 정의와는 달리 대엽종이 아닌 중엽종으로 만든 보이차지만 보이차왕후(普洱茶王后)라는 애칭을 가진 징마이(景邁)차산을 향했다. 멍하이현(勐海縣)과 붙어있는 후이민향은 보이차를 테마로 차산 탐방과 차창 견학 및 제다 실습 등 체험위주 관광단지를 만들기 위해 포장도로를 완비하고 민간기업과 합자해 숙박시설과 시외버스터미널을 새로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새로 포장된 길을 따라 징마이차산에 이르렀다. 해발 1400~1600m 사이에 펼쳐진 다원의 총면적은 29만4000무(畝·666㎡)인데 승용차로 한참을 달려도 그 끝을 쉽게 볼 수가 없었다. 고차수(古茶樹)단지만 1865만㎡가 있는 망징산(芒景山)과 징마이산(景邁山)은 ‘차나무 자연박물관’으로 불린다. 세계 최대면적을 자랑하는 천년고차수 다원은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산허리를 이어가는 차밭

 

타이족 건축양식으로 지은 야외 차실

징마이 고수차 재배 역사만 1800년 

 

1800년이 넘는 차 재배 역사를 자랑하는 징마이 고수차를 맛보기 위해 타이족 여인의 집으로 갔다. 1년 만에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갔지만 찻잎을 태양 아래 말리고 있던 타이족 여인은 늦둥이 아들을 안은 채 반가이 맞아줬다. “미리 전화라도 하고 와야 맛난 것도 준비하고 하는데”라며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번거롭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냥 왔으니 차만 한 잔 마시자”고 했다. 내 뜻과 상관없이 방목해서 키우던 닭을 잡고 직원을 오토바이에 태워 급히 찬거리를 사러 보냈다. 귀여운 아이를 잠시 유모차에 태운 그녀는 농약과 무관할뿐더러 유기농 비료도 필요 없는 고수차 다원에서 찻잎을 따서 갓 만든 고수차를 우려냈다. 매끄럽게 넘어가는 부드러운 단맛은 연인의 입술처럼 달달했다.

 

보이차 매력에 젖어 중국 윈난성(雲南省) 탐방을 수시로 나선 첫 번째 이유는 농약과 화학비료로부터 자유로운 생태환경이 우월한 곳에서 자라는 차나무를 찾기 위해서였다. 여러 해 동안 차산을 다녀보니 좋은 차나무가 아무리 훌륭한 자연조건에서 살아도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차 만드는 사람이 돈을 좇아 욕심 부리면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게 된다. 찻잎을 채취하는 시기와 적정 횟수도 무시하고 연중 수시로 잎을 따 차를 만들어내면 겉은 멀쩡해도 맛과 질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무늬만 보이차가 될 수 있다. 차나무를 찾아 험준한 오지에 있는 차산을 헤매고 다녔지만 그 길 끝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태양으로 말리는 찻잎

 

타이족 여인과 아기

 

빙다오라오차이(氷島老寨)는 2017년 봄 고수차(古树茶) 모차(毛茶) 1kg 가격이 700만원에서 1000만원에 거래되며 그동안 최고 몸값을 자랑하던 라오반장(老班章)을 가볍게 누르고 보이차왕 명성을 중국전역에 떨쳤다. 저평가 받아오던 린창(臨滄) 지역 찻값도 더불어 폭등했다. 수시로 피어오르는 짙은 안개와 높은 산허리를 휘감는 구름이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부드러운 산광을 제공해 좋은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천혜의 기상환경을 갖고 있는 빙다오라오차이는 ‘흔들면 금은이 떨어진다’는 전설 속에 나오는 돈나무 야오첸수(搖錢樹)처럼 찻잎이 금싸라기로 변하는 산골부촌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마을 주민은 넘치는 돈으로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우선 사들인다. 시멘트와 벽돌로 현대식 가옥을 새로 짓는 것이 유행이 되면서 전통가옥은 급격히 줄어들어 차산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빙다오라오차이에 새로 지은 집을 얼핏 보면 대나무와 초가지붕으로 이루어진 듯 보이지만 현대식 가옥이다. 지붕을 통일시키라는 지방정부의 지시에 따라 현대식 지붕 위에 짚을 엮어 초가지붕을 덧씌웠다. 외벽은 시멘트 위에 대나무를 인쇄한 코팅지로 마감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산골은 새집 짓기에 분주했다. 경운기를 미니트럭으로 개조해 가파르고 좁은 산길에 최적화된 토라지(拖拉機)가 주택개량사업 첨병으로 나섰다. 도르래를 이용한 소형 전동기중기가 시멘트반죽을 실은 손수레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촌장을 지낸 지인은 빙다오 촌민위원회소조를 결성해 자체브랜드로 보이차를 출품하고 있었다. 그가 처남과 처제를 불러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마을 곳곳에 흩어져있는 고차수를 찾아 나섰다.

 

현대식 개량주택위에 덧씌운 초가지붕

 

마을 속에 서 주민과 동거하는 고차수.

 

북회귀선에서의 유일한 오아시스 " 서쌍판납(西双版納)" 14개 고차산

 

서쌍판납(西双版納, 시쐉반나)은 북회귀선에서의 유일한 오아시스이며, 운남성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태국과 인접한다. 서쌍판납의 열대우림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열대식물 13,000 종류 이상이다.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 지도 (좌측) 노반장마을 입구 (우측)

특히 서쌍판납은 세계 차의 원생지 중의 하나로 야생차나무가 대규모 집중 생장하는 곳이 많으며 총면적은 120만평이상 된다. 서쌍판납은 보이차 인공재배를 가장 먼저하는 곳이고 청나라에 조성된 차원(茶園)만해도 1000만평이상 이다.

서쌍판납은 중국 내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산이 높고 넓은 강의 원인으로 내륙의 한족인들이 명나라까지 여기에 오지 못하였다. 명나라의 관료인 사조제(謝肇淛)의 저서’전략(滇略)’에 따라 1620년에 보이차가 이미 중국 전역에서 보급되었으며 그리고 90%가 서쌍판납의 14개 차산에서 생산되었다.

란창강(좌측) 과 서쌍판납 14개 고차산 지도(우측)

서쌍판납주에서 14개 고차산이 란창강의 동, 서 양쪽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동쪽의 유락(攸樂,유러), 의방(倚邦,이방), 이무(易武,이우), 혁등(革登, 거등), 망지(莽枝,망즈), 만전(蛮砖,만좐)이라는 6대고(古)차산은 모두 맹랍(勐臘,멍라)현에 위치하여 청나라시대 공차의 산지이었고 특히 의방지역의 만송(曼松, 만송)차는 '돈이 많아도 살수 없으며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귀하다.

또한 이무지역의 차는 보이차 중의 '퀸'이라고 불리며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유명하다. 란창강 서쪽의 남나산(南糥山, 난눠산), 파사(帕沙,파사), 하개(賀開,흐어카이), 포랑산(布朗山,뿌랑산),파달(巴達,바다), (대)맹송(大勐宋,따멍송), (소)맹송(小勐宋,시오멍송), 만나(曼糥,만눠) 8대고(古)차산은 모두 맹해(勐海, 멍하이)현에 위치하여 보이차를 가장많이 생산하고 있고 유명한 차산지가 많은 곳이다.

특히 보이차 중의 '킹'이라고 불리는 '노반장' 보이차의 산지인 '노반장 마을'이 포랑산에 위치하고 있다. 노반장 차를 마실 때 입에서 강한 쓴 맛과 떫은 맛을 느낀 후 바로 강한 회감으로 전화하는 것이 특징이며 향기도 매우 강하고 지속성이 길다.  

서쌍판납의 보이차 재배는 당나라 이전부터 시작하였으며 당시에 서쌍판납산의 보이차가 양자강(長江, 창지앙)과 황하(黃河, 황흐어)의 시발점인 티베트까지 유통되었다. 서쌍판납에서 차를 재배하는 주요 소수민족은 태족(傣族, 다이즈우), 포랑족(布朗族, 뿌랑즈우), 함니족(哈尼族, 하니즈우), 랍호족(拉祜族, 라후즈우), 기낙족(基諾族, 지눠즈우)과 이족(彝族, 이즈우)이며 그들은 몇십 세대를 거쳐서 차를 재배해왔으며1910년까지 14개 차산에서 2000만평의 보이차를 재배하였다.

파아이렁의 후손 포랑왕자 소국문(蘇國文, 수궈우은)씨가 필자에게 선물로 한 책에 싸인하는 모습(좌측) 과 운남 4대차장중의 하나인 맹해차장 정문 (우측)

포랑족의 보이차 재배역사는 1000년 넘어 가장 먼저 보이차를 인공 재배하는 민족이다. 1000여년 전 포랑족의 두인(頭人,터우인,리더) 파아이렁(帕哎冷,태족언어로의 발음)이 보치아를 발견하고 서쌍판납 옆 보이시 경매(景迈,징마이)산에서 보이차의 재배역사를 열었다.

중국 운남의 4대차장 중의 맹해차창(현,대익차업그룹)과 곤명차창(현, 운남중차차엽유한공사)모두 서쌍판납주에 위치하고 있다.

대익그룹은 2011년에 한국에서 대익인터내셔날 코리아를 설립하여 현재 24개의 전문점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