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진

차 이야기/기타 차 이야기 2019. 10. 1. 21:18 Posted by 거목

 

경덕진 진요

진요입구

경덕진 뒷골목

진요외부 전경 상부1

진요외부 전경 상부2

진요 내부1

진요 내부2

진요 작업장 전경

고대진요의 제단

진요 고대 도자공장(물레돌리기)

진요 고대 도자공장(물레성형)

도자기 접착작업

진요 고대 도자공장(굽다듬기)

굽깎기1

굽깎기2

굽깎기3

굽깎는 도구들

진요의 백자 건조

진요 내의 전통하회용그림 그리기

진요 고대 도자공장(시유과정)

진요 고대 도자공장(시유과정2)

현대 경덕진 도자시장

현대 도자공장 - 숙련된 공인의 상회하는 모습1

현대 도자공장 - 숙련된 공인의 상회하는 모습2(분채)

현대 도자공장 하회청화 전사작업1

현대 도자공장 하회청화 전사작업2

현대 도자공장 하회청화 전사작업3

현대 상회도자공장에서 전사 붙이기전(우)과 완성된 모습(좌)

경덕진도자대학 세미나실 내부 도자타일장식(청화백자)

경덕진도자연구소 소장의 손가락을 이용한 상회 그림그리기1

경덕진도자연구소 소장의 손가락을 이용한 상회 그림 완성품

청화백자 도자악기1

청화백자 도자악기2

청화백자 도자악기3

청화백자 도자악기4

중국 경덕진의 역사

중국은 ‘도자기의 고향’이라 불리며 전 세계에 막대한 양의 도자기를 수출하는 나라다. 그 중 경덕진()은 자기 즉, porcelain의 원천으로, 고대 무역 자기의 대표적인 산지였으며 조선백자에도 영향을 끼쳤다. 경덕진의 도자기 전통은 현재까지도 계승되고 있어 생산되는 도자기들이 전 세계에서 팔리고 있다.

경덕진은 강서성(西)의 동북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송나라 때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독보적 생산지로서 명맥을 이어온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덕진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도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수·당나라 때는 백자와 청자류를 생산하다가 송대에 와서 독자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명성을 쌓아나갔다. 송대에 이르면서 경덕진은 백자에 청자 빛이 아른거리는 독특한 유색()을 창출하는데, 이를 ‘영청(, 청빛의 그림자)’이라 칭하였고 ‘청백자()’라고도 한다.

경덕진의 번영은 지리적 환경과 조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덕진 주변은 울창한 수목과 드높은 산들, 수많은 호반에 둘러싸인 진경을 자랑하며, 동으로는 무원(), 남으로는 낙평(), 서로는 파양(), 북으로는 안휘()의 기문(), 지덕() 등이 위치해 있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산들 가운데 최고봉은 1618.4m나 되고, 계곡은 창강(), 동하(), 서하(西), 남하()로 강줄기가 뻗어 있다. 창강은 전 도시로 통하는 해운의 길로 안휘의 기문현 대홍산()에서부터 흘러나온다. 경덕진은 창강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창강의 길이는 182km로 아래쪽에 있는 파양의 파양호까지 흐르므로 경덕진은 특히 수운()이 발달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자기()도 창강이 파양호까지 흘러오는 도중에 경유하는 곳과 관계가 있다.

동하()는 경덕진 동부의 동원산()이 발원이며, 서하(西)는 안휘 지덕현, 남하()는 무원현 서남 산중으로 경덕진에 풍부한 수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하류에서 도자기의 원료를 세공하는 차상() 등의 원시 기계에 수력을 공급했고, 목선과 뗏목이 드나들며 경덕진 요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소성에 필요한 소나무가 풍부했고 자토()의 채취도 용이했다.

경덕진 자토의 지층은 대부분 5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층엔 혈암()-자토광()-사암()-자토광, 하층엔 혈암 순서로 퇴적되어, 수량과 품종이 풍부하고 질이 좋다. 이러한 까닭에 다채로운 재료로 수많은 종류의 자기가 만들어졌다. 경덕진에서 45km 떨어진 동하 유역에는 고령산(, 이라고도 함)이 있는데, 이곳은 화강암의 풍화로 이루어진 순수한 조토()로 되어 있어서 토질이 곱고 깨끗하며 가소성()은 약하나 소성 온도에 견디는 힘이 강해 최고의 도자 원료로 인정되었다. 이것이 현재 고령토()라 불리는 흙이다.

고령산 외에 경덕진 근교의 대주(), 삼보봉(), 유가만(), 은갱(), 요리() 등에도 자토 산지가 있다. 이 지방의 자토는 백돈석()이며, 일종의 유리성 자토로서 고령토의 성질과 비슷한 장석()으로 고령토와 배합했을 때 반투명성을 얻을 수 있다. 이렇듯 근교에 상당한 자토 원산지가 있었고 운반이 편리해서 경덕진은 유명한 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본래 경덕진은 한나라 때 도기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동진() 시대에 진(, 인구 5만 명 이상의 도시)이 설치되었으며, 남조()의 진대(, 557~589)에 경덕진에서 도자의 소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포()의 <경덕진도록()>에 의하면 “물과 흙이 도기로서 적당하고 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도업을 하였다(, , ). (…) 진자는 진대() 이래 그 이름을 떨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남조() 시대 경덕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당대로 오면서 경덕진은 옥기()로 칭해질 만큼 발전했으며, 형요()의 백자, 월요()의 청자를 모방하면서 백자와 청자류를 소제하였다. <부량현지()>의 기록에 의하면 당ㆍ무덕년()에 민간에서 옥 같은 자기를 만들어서 조정에 바쳤으며 창남진()의 자기가 유명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당시 경덕진의 명칭은 창남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대에 들어 진종() 경덕년간()에 진종은 창남진에 감진()을 설치하고 자기를 구워 조정에 바치고 기물의 밑바닥에 경덕년제(, 경덕년에 제작함)라고 쓰도록 명하였다. 이때부터 그 명성이 높아져 경덕진 자기로 통용되었고 오늘날까지 경덕진이라 불린다.

또한 송대에는 월요와 형요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영청자(, 청백자)를 탄생시키면서 독보적인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영청자는 태질이 치밀하고 결백한 백색이며 잔잔한 청빛을 띠는데, 청빛은 유질()에 함유되어 있는 소량의 철()과 환원소성() 때문이며, 유색은 맑고 영롱하다. 송대 경덕진에서 시작되어 성행했던 청백자()는 원대에 와서 종결되는데, 원대의 청백자는 백색이 더욱 확실해지며 원청화() 출현에 단단한 밑거름이 된다.

청백자는 원대로 오면서 자석()만 사용하던 송대의 청자와는 달리 고령토를 섞어서 배합하는 이원배방법()이 시도되면서 깨끗한 백색이 된다. 원대의 청료는 기본적으로 중국산지와 수입된 청료 두 가지를 사용하였다. 중국의 청료는 망간의 함량이 비교적 많으며 수입 청료는 철의 함량이 많다. 원청화에서는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망간의 함량이 많은 중국 청료는 청화에 자광()을 띠는 효과를 얻는 데 이용되었고, 문양의 선이나 어두운 부분의 묘사, 세밀한 윤곽 묘사에 이용되었다. 철의 함량이 많은 수입 청료는 청화에 흑빛을 띠게 하고, 문양의 표현에 있어 훈산과 농중()의 현상을 일으켜 마치 수묵의 흥취를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청료의 절묘한 사용과 함께 원료를 배합하는 기술의 발전이 청화 출현의 중요한 요소라 볼 수 있다.

청료 색상의 주요 원소는 코발트, 망간, 철로서 코발트는 진한 남색으로 발색하며 망간은 자색 계통으로, 철은 흑색으로 발색한다. 또한 유리홍이 출현하는데 유리홍은 동홍료()를 태() 위에 채회하고 투명유를 발라서 환원 소성한 홍색 화문()의 자기이다. 원대의 경덕진에서 이룩한 업적들 가운데 하나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청화와 유리홍의 완성일 것이다. 이것은 동홍유()와 고람유의 새로운 발전에서 기초한 것이다. 이 동홍과 고람은 청화와 유리홍에 사용된 외에도 순수한 홍색과 남색 자기에도 응용되었다. 동홍유는 구리 원소가 주요 착색제로 홍색 계통으로 발색하며 이미 송대의 균요()에서 시작되었다. 원대의 홍유기()는 출토된 기물로 볼 때 소량이며 완벽한 홍색은 내지 못했고, 다만 명대의 선홍기() 출현의 기초가 된다. 기형은 완(), 반() 등의 소형 기물이며 인화() 장식으로 용 문양을 주로 채용하였다.

원대 남유기()의 장식 방법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남유에 금채()로 문양을 그린 남유금채()와 남색 바탕에 백색 문양을 그린 남유백화()이다. 명대에 와서 경덕진은 원대보다 더욱 규모가 커지며, 전국 자업()의 중심지인 동시에 상공업의 중심지가 된다. 또한 명 황실은 어기창()을 설치하여 궁정용의 전문 자기를 제작하도록 하였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요()에는 공자()를 바치도록 하였다. 선덕() 시기에는 관요()가 58좌(), 만력() 시기에는 300좌, 민요는 수백 좌에 달했다 하며 가정() 시기에는 도공이 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시 경덕진의 소조 형식은 지정달소(), 갑발앙소(), 지권복소() 등이었다.

이렇듯 경덕진의 관요와 민간요 등에서 다투듯 수많은 자기가 대량 생산되었다. 이로써 각 작업의 전문화가 시작되었으며 도공 등은 세습적인 전문공과 보조공들로 나누어졌다. 전국에서 우수한 도공들이 경덕진으로 몰려 왔음은 가히 추측할 만하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유상채자는 명대 초기부터 경덕진에서 시도되었다. 유상채는 저온유에서 발전된 것이며, 저온 색유의 화학 구성은 납(), 규산(PbO-SiO2 )의 2원소 계통이며, 유상채의 화학 구성은 납, 규산, 산화칼륨(K2O)의 3원소 계통이다. 명대 채색 자기의 발전과 흥기는 백자의 수준이 높아짐과 관계가 있다. 명대 유상채자의 안색()은 홍(), 황(), 녹(), 남(), 흑(), 자() 등이며 착색제에 의해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소성한 백자 위에 문양을 그리고 다시 저온 소성하였다.

청대에도 경덕진은 명대에 이어 여전히 명성을 누리면서 관요와 민요가 활발하게 운영되었고, 관요는 내무부 조판처()에서 관리 감독을 파견하였다. 청대 경덕진 자기의 성취는 당시 지식 있는 파견 감독들의 노력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강희 시기의 경덕진 관리 감독이었던 장응선()에 의해 취홍(), 취청(), 요황(), 요자(), 요록() 등이 시도되었고, 역시 강희시기의 관리 감독이었던 랑정극()에 의해 랑요홍()이 성취되었다. 옹정()시기에 들어 분채(), 법랑채()가 출현하여 화려한 유상채의 절정을 이루었고, 건륭()시기에는 기묘하고 찬탄할 만한 제자() 기술로 기교 넘치는 조형이 자기에 시도되면서 완벽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서양과의 활발한 교류와 주문 자기가 시작됨에 따라 서양풍의 문양도 유행하게 되어 유럽 왕실에까지 중국 자기의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건륭시기 경덕진의 감독이었던 당영()에 의해 출간된 <도성기사비()>, <도야도설()>은 도자문헌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처럼 경덕진의 도자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제작되다가 송대에 그 독특한 유색인 영청자()의 출현으로 명성을 얻었고, 원대를 거쳐 명ㆍ청대에는 상공업 도시의 번영과 함께 민국() 초기(1912년 이후) 원세개가 복구하여 지금까지 그 존재를 자랑하는 것이다.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도자전공
교수 이 용 욱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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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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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경기도자문화) 2005. http://www.cultureconten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