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죽양자 야생 고차수 (2016년 3월)

중국 운남의 고차수 지역 중에 맹송고차산(勐宋古茶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겸리 주인장이 작년(2018년) 11월에 다녀온 곳이기도 합니다
맹해현 지도. 활죽양자는 화살 표시한 곳

맹송고차산 지역은 맹해현 맹송향에 위치한 고차수 군락으로서 맹해현에서 가장 오래된 고차구(古茶区) 중의 하나입니다. 동쪽으로 는 경홍시와 접하고 있고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남나산(南糯山)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맹송의 차나무 재배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남나산에 비해 결코 짧지 않은데, 이곳에서 최초로 차 나무를 심고 가꾼 것은 "납호족(拉祜族,라후족)"입니다. 납호족은 운남의 란창강(瀾滄江) 서쪽 지방에 주로 거주하며, 미얀마와 타이에도 분포해 있는 소수민족입니다.
이들이 먼저 들어와 차 재배를 한 후 한족이 합류하면서 지금의 맹송 고차수 지역은 한족과 소수민족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발 1,600미터 정도부터 분포하고 있으며, 맹해현의 최고봉이 바로 "활죽량자(滑竹梁子,화주량즈)"로서 해발 2,240미터에 달합니다. "양자(梁子,량즈)"는 중국어로 "고갯마루"라는 뜻인데, 운남의 산 지명에는 이 "량즈"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곳에 길고 매끄러운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를 활죽(滑竹)이라 하고, 가장 높은 산과 산을 연결하는 들보처럼 생긴 고갯마루를 의미하는 양자(梁子)와 결합하여 활죽양자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활죽양자의 고차수

이곳의 해발 1650m-2100m 사이에는 고차수와 야생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 다원이 폭넓게 펼쳐있고, 햇빛을 보기 위해 차나무의 수고(樹高)가 높으며, 수령이 오래되었습니다.
해발고도가 이렇게 높은 곳에서 자라면, 일 년 내내 구름과 안개가 낀 데다가, 빗물이 가득 차서, 자연 생태 환경적으로 매우 좋습니다. 고차수 다원과, 숲, 그리고 목초가 조화로운 자연 생태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며, 특히 고차수는 병충해가 없어 약으로 방제하거나 비료를 주는 등의 관리가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약간의 손질만 가해주면 되는 거의 야생의 차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물론 100% 야생차가 될 수는 없습니다).
활죽양자는 하나의 차산을 의미하는 지역이 아닙니다. 이곳에는 보당(保塘)이 4개 마을(즉 保塘寨), 방용(蚌龍)이 3개 마을 등 7개의 마을이 각 차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합니족과 납호족, 그리고 한족이 거주하며 이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겸리의 활죽양자 야생고수차는 바로 이곳의 야생차나무에서 채취한 고차수 잎을 원료로 원미차창에서 2016년 3월에 만든 춘차입니다.

 

활죽양자 야생차 뒷면. 


포랑산 고차수 (2016년 3월)

 

포랑산(布朗山, 부랑산)은 신 6대 차산 지역인 운남성 서쌍판납주 맹해현(勐海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맹해 지역의 대표적인 차산인 포랑산에는 포랑족(布朗族, 부랑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여기저기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특히 포랑족은 바로 중국(아마전 세계) 최초의 차 재배 민족인 복인(濮人)의 후예들입니다.
이들이 수천 년 동안 포랑산에서 아직도 차를 재배하며 살고 있는데, 이들이 살고 있는 포랑산의 마을들이 바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교목형 고차수 산지인 노반장(老班章), 신반장(新班章), 노만아(老曼峨) 등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란창강 서쪽의 고차수 산지(신육대차산)에서 활죽양자(화즈량즈) 아래 남나산(난눠산)산이 있고, 그 아래에 파사, 그리고 포랑산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포랑산의 원시삼림 속에 일군 소수민족의 다원

포랑산은 열대우림 기후로 무덥고, 원시삼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신 6대 차산의 대표적 차산입니다.
포랑산 지역의 고차수 분포는 매우 넓은데, 그중에서도 포랑산 반장촌위원회가 관할하는 노반장, 신반장, 노만아 3개 마을의 교목형 고차수 찻잎 생산량이 전체 포랑산 고차수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포랑산 고차수림

겸리의 포랑산 고차수는 이들 지역에서 수백 년 고차수를 선별하여 원미차창에서 만든 것으로서 포랑산 고차수 보이차의 품질은 매우 우수하고 찻잎이 견실하며, 독특한 꽃 향이 있습니다. 또한 마시고 난 뒤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이 특징입니다.

포랑산 고수차 뒷면.

남나산 고차수 (2016년 3월)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활죽양자와 포랑산 사이에 남나산(南糯山, 난눠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평균 해발 1,400m, 연 강수량 1,500~1,750mm, 평균기온 16-18도로 보이차 생장에 매우 적합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나산은 소수민족인 합니족(哈尼族, 하니족 혹은 아이니족)이 주로 거주하며, 산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데 ,합니족은 파마산이라고 하였으며, 한족은 순장산(筍醬山, 쉰장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또 남나산은 제갈공명의 '공명산'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제갈공명이 남나산에 있을 때 전염병이 돌았다 합니다. 이때 남나산의 찻잎으로 많은 사람을 구했는데, 그 이후부터 차나무를 많이 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나산에서 합니족들이 찻잎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남나산에는 28개의 "자이"가 있습니다. 자이는 목책, 울타리를 뜻하는 채(寨)의 중국어로서 마을을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고차수가 나는 7개의 자이가 있는데, 해발이 높은 순서대로 두어이자이, 야코노자이, 야코신자이, 반파노자이, 꾸냥자이, 주린자이, 어떠자이가 있습니다.

남나산 반파노자이(반파노채)의 고차수림 

겸리의 남나산 고차수는 바로 이 반파노채(半坡老寨)에서 원미차창이 관리하는 고차수를 원료로 만든 고수차입니다. (坡를 중국어로는 포로 발음하여 반포노채라고도 함)
남나산(南糯山)의 종차(种茶), 즉 차 재배의 역사는 유구할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높으며, 고차수 다원의 분표 면적도 약 12,000묘(亩)(1묘는 약 200평)로 서쌍판납 지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고차산(古茶山)입니다.
이와 같이 넓은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연유로 각 마을에서 생산된 차의 구감(口感)은 서로 달라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는데 반파노채의 차가 가장 유명합니다. 즉 서쌍판납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고차산이 남나산이며, 남나산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바로 반파노채인 것입니다.

남나산 고수차 뒷면.

겸리가 특별히 그 원료와 제조 과정에 관해 전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는 원미차창에서 2016년 맹해 지역의 유명한 고차수들을 원료로 하여 춘차를 만들었습니다.
활죽양자와 포랑산, 그리고 남나산. 모두 고차수 지역으로 역사와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곳입니다. 원미차창에서 같은 시기에 비슷한 다.수령대의 고차수로 만든 후 한 포장으로 내어 놓아 여기서도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차 이야기 > 보이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이차의 원료  (0) 2020.03.03
차화석 제조 과정  (0) 2020.03.03
진순아호(眞淳雅號)  (0) 2020.03.01
차순호 2  (0) 2020.03.01
차순호(⾞順號)1  (1) 2020.03.01

호급차의 재현이라는 모토로 보이차의 수많은 전설과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은 진순아호

통상 뒤에 호(號) 자가 들어가는 차를 "호급차(號級茶)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정의하면 1956년 이전에 개인 차창에서 만들어진 차를 말하는데, 당시 개인 차창들의 상호 뒤에 호(號) 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습니다.

100여 개가 넘는 이무(易武)의 유명 개인 차 상점 중에서도 복원창호(福元昌號), 동경호(同慶號), 송빙호(宋聘號), 차순호(車順號)가 가장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이른바 '보이차의 4대 천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동흥호, 홍창호(홍태창호), 동창호, 정흥호, 경창호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최상급인 골동급(骨董級) 보이차로 대우합니다.
이들 골동 보이차는 중국의 국유화 정책에 따라 1956년 이후 모두 생산이 중단되었고, 그 명맥은 끊겼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과거 호급 보이차 제조 방법을 전승하여 후대에 다시 만든 차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진순아호(眞淳雅號)입니다. 진순아호는 호급 보이차 중에서도 송빙호의 제다 기법을 이어 받았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만의 여례진(呂禮臻)은 대만 차연합회 총회장과 세계 차 교류협회장을 역임한 자입니다. 그는 1994년 중국의 이무(易武)를 방문하여 전통 보이차의 복원을 위해 호급보이차 기술 보유자를 수소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동경호, 송빙호 등 소위 4대 천왕을 생산하던 차창 소유주와 기술자들이 모두 해외로 이주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려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2년 후인 1996년 여례진은 송빙호 제작에 실제로 참여하여 그 기술을 보유한 장관수(張官壽)라는 사람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호급차 복원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여례진은 대만에 죽군공사(竹君公司)라는 차 제조 회사를 차리고 원료를 중국(이무)에서 가지고 와 장관수의 지도 아래 채엽부터 포장까지 전통 수공 제작 기법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그 제작에 성공하여 차의 이름을 진순아호라 짓고 옛 호급 보이차의 명성을 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96년에 처음 만들어진 진순아호 

1996년에 처음 생산된 진순아호는 운남성 이무의 차엽을 기본으로 하여 만든 아주 우수한 고급 청병으로 평가받아 매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1996년판은 진품을 구하기 매우 어려울 정도로 귀하고 가격도 1편에 1,000만 원 이상을 호가합니다.
겸리에서는 2004년과 2005년에 이 진순아호를 구입할 기회가 있어 매입한 이후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겸리에서 직접 보관한 것으로 잡미잡향이 거의 없이 상태 매우 양호한 차입니다. 국내에서 진순아호를 오랫동안 보관하면서 직접 판매하고 있는 곳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과거 호급차의 명맥을 이은 유일한 차인 진순아호(2004년) 

1996년판 진순아호가 유명해지자 여러 버전의 진순아호가 생산되었는데, 죽군공사의 대리상들이 별도의 OEM 주문을 통해서 진순아호를 대량 생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죽군공사가 직접 제작한 진순아호를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겸리에서 보관 중인 진순아호 2004년판과 2005년판은 모두 죽군공사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아래 사진의 내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군공사에서 사용한 전형적인 내비입니다. 갑신년(甲申年) 춘차라고 되어 있는데, 갑신년이 바로 2004년입니다. 

이무정산의 춘첨(春尖) 원료를 사용하여 전통 수공 방식으로 제다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겸리에서는 당시 진순아호의 2004년 판이 특히 찻잎의 상태가 매우 좋고 우수한 원료를 사용하여 몇 통 구입하였는데, 지금은 이 차가 구할 수 없는 귀한 차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차 후 탕색은 아주 이상적인 등황색이며 잡향이 거의 없이 아주 잘 보관되었고, 첫 탕에서부터 매우 부드러운 맛이 먼저 느껴집니다. 

'차 이야기 > 보이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화석 제조 과정  (0) 2020.03.03
활죽양자, 포랑산, 남나산 고수차  (1) 2020.03.01
차순호 2  (0) 2020.03.01
차순호(⾞順號)1  (1) 2020.03.01
충시차(蟲屎茶)란?  (0) 2020.03.01

차순호 2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21:11 Posted by 거목

차순호의 설립연대에 대한 두가지의 상이한 설과 관련된 자료

 

1.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유래 (1839년설)


청조(清朝) 도광(道光) 연간,"차마고도(茶马古道)"의 발원지인 이무고진(易武古镇)에서 현 차씨(车氏) 집안
의 원조인 차순래(车顺来)가 "차순호차장(车顺号茶庄)"을 설립하여, 자체 보유 차산(茶山)에서 채엽한 고품질의 대엽종(大叶种) 생태(生态) 다엽(茶叶)으로 여아차(女儿茶), 인두금과차(人头金瓜茶), 사건긴녕권차(纱
巾紧拧拳茶), 반구형타차(半*形沱茶), 칠자원병차(七子圆饼茶), 향죽긴압차(香竹紧压茶) 등의 제품을 수공
으로 제작하여 서장(西藏: 티벳), 신강(新疆), 항오대(港澳台: 홍콩/마카오/대만) 및 남양(南洋: 동남아시아)
각지로 판매하여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객상(客商)들로부터 아주 큰 관심을 끌었다.
1837년 차순래(车顺来)는 향시(乡试), 회시(会试)에 참가하여 공생(贡生: 과거제도 하에서 부(府), 주(州), 현
(縣)의 생원(秀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자격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경성(京城)의 국자감에서 공부하도록 한 자들을 지칭하거나 달리 거인(擧人)의 부방(副榜)[명청(明淸) 시대의 제도로,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거인(擧人)의 인원수에 제한이 있어 거인의 자격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에 해당함)이라는 학위(学位)를 취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 자신이(车顺号茶庄) 직접 만든 차를 조정(朝廷)에 바쳤는데 도광제(道光帝)가 이를 맛본 후 아주 흡족해 하며 이 차는 "맑고도 순수하며 (汤清醇), 맛이 두텁고도 진하며(味厚酽), 감칠 맛이 오래가고(回甘久), 가슴 속을 평안하게 해 주니(清心脾), 이야말로 좋은 차로다(乃铭中之瑞品也)!"라고 하며 연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넉자를 써 주면서 이무차순호차장(易武车顺号茶庄)을 칭찬하고
또한 차순래(车顺来)에게 "예공진사(例贡进士)"라는 품계와 직위(品位)를 내려주었다.
황제의 명으로 품위(品位)를 받게 된 차순래(车顺来)가 두품정재(头品顶戴:청조 때 관(冠)에 주옥(朱玉)을 달
아 관직을 구별하였는데 이 관을 머리에 쓴 모습)하고 운남으로 돌아 와 황제의 명을 알리니, 운남 포정사(云南布政使: 포정사는 청조의 관제에서 종2품의 관직임)) 첩용(捷勇) 파도로(巴图鲁 : 청나라 때 무공이 있는 관원에게 내린 칭호로 간칭으로 巴图라고도 하는데 대략 용사(勇士)의 의미를 가짐. 巴图鲁 칭호를 가진 사람은 흔히 그 호칭 앞에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해 振勇, 勃勇, 克图托 등의 개사(介詞)를 붙였음)는 길이 7척3촌2분, 폭 1척8촌, 두께 1척5분 치수에 황금으로 글자를 입힌 "서공천조(瑞贡天朝)" 편액(金字大匾)을 만들도록 하였다.
예공진사(例贡进士) 차순래(车顺来)는 정중한 현판식을 거행하여 이 금편(金匾)을 대문 위에 걸고 등롱과 비단 띄를 매단 후 일주일 동안 주야로 잔치를 벌였는데, 이로써 이무차(易武茶)는 영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 현판 또한 운남 보이차 최고의 영예로 되었다.
이 후 수십년 동안 차순래(车顺来)는 황제의 뜻을 충실히 따라 해마다 자신이 만든 차를 경성(京城)에 공납(瑞贡)하였는데 이로 인해 차순호(车顺号)의 차들은 청 조정 및 황족(皇亲国戚)에게 있어 없으면 안될 어용음료(御用饮品)로 되었으며 또한 국내외적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서공천조(瑞贡天朝)" 편액(宝匾)의 유래는 사적(史籍) 정본(正本)에 의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 편액(宝匾)의 후계자(传人)나 가족들의 기록이나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이 편액(宝匾)은 당시 운남포정사사(云南布政使司)의 포정사(布政使)로 있던 첩용 파도
로((捷勇巴图) 상사(尚史)가 청궁(清宫)의 황족(皇亲国戚) 고관(达官) 귀인(贵人)들이 모두 보이차(普洱茶)
를 아주 즐기고, 도광(道光) 황제가 의방(倚邦)과 이무(易武)에서 온 공차(贡茶)를 마신 후 아주 기뻐하며 칭찬한 후 흥이 나서 바로 이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글귀를 친히 족자(条幅)에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운남순부(云南巡府)에서는 같은 족자 3폭(幅) (4폭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되어 있지 않음)을 하사해 주도록 조정에 주청하여 당시 보이부(普洱府) 관원(官员)의 보이공차(普洱贡茶) 구입(采办)에 책임을 지고 협조한 예공진사(例贡进士) 차순래(车顺来), 열공진사(列贡进士) 명예좌랑(修职佐朗) "안락호(安乐号)"차장(茶庄) 장주(庄主) 이개기(李开基), 그리고 달리 의방산(倚邦山) 두령(头目) 한 사람 도합 3인에게 이 족자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하사받은 족자를 받아든 후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당지 최고의 명장에게 의뢰하여 족자의 글을 녹나무 횡편(楠木横匾)에 새겨 넣어 대대로 대청 위에 걸어 놓고 성은에 감사하였다.
이무 고차산(易武古茶山) 또한 이로 인해 "공차지향(贡茶之乡)"이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차순래(车顺来)는 성은(圣恩)에 감사하며 바로 "차순호(车顺号)" 차장(茶庄)을 열어, 공차(贡茶) 구입(采办)과 제다(制茶)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차순래(车顺来)의 후인(后人)들은 이 편액을 아주 아끼고 잘 보호하여 몇년에 한번씩 금분(金粉)을 다시 발라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편액(宝匾)은 비단 "차순호(车顺号)"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이무 보이차(易武普洱茶)의 빛나는 역사와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서공천조(瑞贡天朝)"는 가장 좋은 찻잎(茶叶)을 써서, 극상품의 차를 만듦으로써, 이 상서로운 물품(祥瑞之物)을 조정에 공물로 봉납한다는 뜻이다. 중국(我国)에서는 고대(古代)로부터 고관(达官), 귀인(贵人), 문인(文
人), 묵객(墨客)들은 항상 찻잎(茶叶)을 서초(瑞草)라 칭송해 왔는데, 당(唐)나라 때 두목(杜牧)이 지은 시(诗)
중에는 "차는 좋은 풀 중의 으뜸으로 친다(茶称瑞草魁)"는 구절(诗句)이 나오기도 한다.
현판은 大匾系用楠木雕刻, 길이 약 2m, 폭 약 70cm, 두께 약 15cm(미실측)의 녹나무(楠木)에 조각하여 사용
하였다. 현판(匾)의 중앙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의 "서공천조(瑞贡天朝)" 네 글자를 써 넣었는데, 필적(笔迹)이 호방하고 힘이 있다 ;
현판(牌匾) 오른 쪽에는 "钦命头品顶戴云南等处承宣布政使司布政使捷勇巴图尚史为(황제로부터 두품정
재라는 명을 받은 바 이를 운남 등지에 포고한 포정사사 포정사 첩용파도로 상사가 씀)"라는 문구가 편형(扁形:가로 폭이 세로 폭에 비해 넓은 형상)의 송체자(宋体字样)로 새겨져 있으며, 현판(牌匾) 왼쪽의 낙관(落款)에는 세로로 "예공진사 차순래 세움(例贡进土车顺来立)"이라는 글을 해서(正楷) 소자로 적어 놓았는데, 때는 청(清) 도광(道光) 18년(서기 1839년)이었다.
청조(清朝) 도광(道光) 연간에 설립된 이무차순호(易武车顺号)는 근 200년의 역사를 가진 어용공차(御用贡
茶) 노자호(老字号)로, 차씨 집안의 세조(世祖) 차순래(车顺来)가 자신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自家全手工制
作生产) 다엽(茶叶) 제품을 황제가 사는 궁으로 올려보내는 중 구감(口感)상 그 맛과 향이 깨끗하고 진하게(香醇) 되었는데, 도광(道光) 황제가 이를 마셔보고 크게 기뻐하여(龙心大悦) "차(汤)가 청순하고(清纯), 맛이 두텁고 진하며(味厚酽), 회감이 오래 지속되어(回甘久), 이야말로 차중의 서품이로다(乃茗中之瑞品也)"라고 하며 연이어 칭찬하고는, 즉시 두품정재하고 운남으로 가운남 포정사사의 포정사(云南布政使司布政使) 첩용파도로(捷勇巴图鲁) 상사(史)의 감독 하에 길이 7척3촌2분, 폭 1척8촌, 두께 1촌5분의 나무판에 황금색의 "서공천조(瑞贡天朝)" 네 글자를 커다랗게 쓴 현판을 만들어 이를 "이무차순호(易武车顺号)"에 하사하도록 하고, 동시에 차순래(车顺来)에게 매년 규정에 따라 자신이 생산한 차 제품을 진공(进贡)하도록 명하였다.
차순호(车顺号)가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운남 보이차(云南普洱茶)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되면서, 보이
차(普洱茶)는 청조(清朝) 시기에 황족들이 서로 선물하는 고급 예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고 , 그 후 수많은 국가적 외교사절들에게도 선물로 주어졌다. "서공천조(瑞贡天朝)" 현판은 중국 다엽사(茶叶史)에 있어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현재 온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편액으로서, 이는 운남 보이차(云南普洱茶)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는데 있어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
2.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유래 (1894년설)


예공진사 차순래의 차순호 다장은 이무정산 칠자병차를 공경하여 광서 20년(1894)에 '서공 천조' 편액을 받았다. 그래서 이무는 '공차의 고장'으로 불린다.
보이차가 대량으로 경성 즉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성의 궁정 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보이부지(普洱府志)》중에는 "보이차의 이름이 온 수도에 다 알려져 있으며 모든 경성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3. 易武茶对普洱茶的影响及其发展初探

"이무차가 보이차에 미치는 영향과 그 발전에 대한 탐구"                  이사정(李师程). 오진(吴进) 

중국의 차문화는 그 역사가 유구하고 차엽의 품종 또한 아주 다양하다. 다른 수많은 명차와 같이 보이차도 오랜 경쟁 과정 중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차류(茶類)로 되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있으며, 청조의 <신전운남통지(新篆云南通志)> 중에는 "보이(普洱)라는 이름은 중국차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안휘(安徽)나 민절(闽浙:복건성 및 절강성 지역)에 비할 수 없다"고 하는 글이 보이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보이차 발전사에 대한 내외전문가 및 학자들의 심도있는 연구 중 운남의 소수민족들이 찻잎을 음료로 만든 것이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남이 세계적으로 차나무의 원산지이자, 난창강 유역의 사모(思茅: 현 普洱), 서쌍판납 등 지역은 차나무 기원의 중심지로서 운남이 차의 고향임을 확인하고 있다.
운남산 차의 역사는 한말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청조(清朝) 도광(道光)년간에 편찬된 <보이부지(普洱府志)> 중에는 이 지역의 차나무를 "무후유종(武侯遗种)"이라 하여, 촉한 건흥 3년(서기 225년) 제갈공명이 남중(南中) 평정시 차업(茶業)을 번창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780년 전의 일이다.
정식으로 문헌상에 기록된 내용 중 가장 이른 것은 당조(唐朝) 함통5년(864년) 번작(樊绰)이 지은 <만서(蛮
书)> 제7권에 "(이 곳의) 차는 은생성(银生城) 경내의 여러 산악 지대에서 나오는데 (찻잎을) 흩어져서 수거해오나 차엽의 채취와 차를 제조하는 방식에 어떤 법도는 없다(茶出银生城界诸山,散收无采造法)"고 기록하고 있다.
* 은생(银生) : 중국 서남부 변방에 있는 무량(无量) 및 애뢰(哀牢) 양산맥의 서북방에서 동남방으로 난창강(澜沧江)과 원강(元江)의 한 지류인 예사강(礼社江)을 따라 마치 한쌍의 거대한 푸른 용이 웅크리고 있는듯 조심스레 몸을 감추고 있는 이 지역 중의 한 산간에 있는 고성(古城). 은생성(银生城)은 당조 초기 남조국(南诏国) "은생절도(银生节度)"의 부치소(府治所) 소재지였다. 당시 남조국에 있던 7 절도(节度) 중 은생절도(银生节度)가 관장하는 지역이 가장 넓었으며, 그 관할구 내에 현 임창시(临沧市)의 대부분 지역과 보이(普洱), 서쌍판납주 전역 및 태국(泰国)의 경매(景迈) 지역, 라오스의 풍사리(丰沙里), 월남의 내주(莱州) 및 미얀마의 경동(景栋)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이차(普洱茶) 생산이 명확히 기재된 문헌은 명조(明朝) 만력(万历) 47년(1619년) 지방지리학자(方志学
家) 사조석(谢肇浙)이 편찬한 <전략(滇略)>으로,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모두 보차(普茶)를 마신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의 보차(普茶)란 곧 보이차(普洱茶)이다. 보이차(普洱茶)라는 이름은 명말(明末) 방이지(方以智)의 <
물리소식(物理小识)>에 "보이차는 증기로 쪄서 경단 모양으로 만들어 티벳(西番)으로 보내진다"라는 기록에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청(清)나라 때에는 1799년에 단췌(檀萃)가 쓴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에는 "티벳에서 음용하고 있는 보차(普茶)는 당(唐)나라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차"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사료(史料)들로부터, 원래 고대에 만들어져서 한(汉)나라 때 이미 널리 보급되었고 명(明)나라 때에 그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청(清)나라 시기에 극성기를 맞았던 보이차(普洱茶)는 보이(普茶)에서 그 차엽(茶叶)이 집산(集散)되고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원산지는 육대차산이라는 역사를 가진명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보이차의 전통을 널리 알리고 이무차가 다시 빛나는 이름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통적인 보이차의 원산지인 육대차산의 으뜸인 이무 지역에서 나온 이무차가 보이차 및 그 발전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보이차(普洱茶) 발전사에서 이무차(易武茶)가 가지는 특수한 지위
(1) 이무(易武)는 보이차의 고향이다.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의 기록에 의하면; "보차(普茶)라는 이름
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며.... 여섯 곳의 차산이 소속되어 있는 보이(普洱)에서 산출되는데, 이 육차산이란 첫번 째가 유락(攸乐), 두번째가 혁등(革登), 세번째가 의방(倚邦), 네번째가 망지(莽枝), 다섯번째가 만단(蛮端), 여섯번째가 만살(曼撒)로서, 그 주위가 팔백리에 이르고 산에 올라가 차를 만드는 이의 수가 수십만명에 이르며...


(2) 이무차산은 그 면적과 생산량이 모두 육차산 중 으뜸이다.


(3) 이무(易武)는 보이공차(普洱贡茶)의 고향이다. 이무는 차로 인해 흥성하였으며,
청조(淸朝) 옹정(雍正) 2년(1724년) 이무(易武)에 몰려드는 차상(茶商)과 공인(工匠)이 수십만에 이르러 "산
마다 다원이 있고 어디든 인가가 있다(山山有茶园,处处有人家)"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되어 이런저런 문제가 끊이지 않자 청조(淸朝)에서는 "외지 상인이 입산하여 차 만드는 행위를 엄히 금함(严禁客商入山作茶)"이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옹정(雍正) 13년(1735년) 에는 "차인(茶引)"제도 - 차상이 관청으로부터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차업을 영위하도록 한 제도 -에 의해 차를 구매하도록 함으로써 차상(茶商)이 다시 들어오게 되고, 주로 원병차(또는 원보차(园宝茶)라고도 부름)를 생산하였는데, 7병(饼)을 1통으로 판매하였으므로 "칠자병차" 또는 "칠자보차"라고 하였으며, 이를 대량으로 보이(普洱)로 운송하여 이 곳에서 중개 판매하였다.
보이에서 차엽 무역을 관리하는 관리(官吏)들은 보이차를 궁정으로 헌상하였는데 황궁의 환심을 얻기 위해 공품(贡品)을 따로이 분류하였다. <보이부지(普洱府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청 건륭(乾隆)9년(1744年) 보이차는 궁정에서 <공차안책(贡茶案册)>에 정식으로 등재되었으며, 공차 품종으로는 "아엽(芽叶), 단차(团茶)"로 하도록 규정되었고, 보이부(普洱府)는 매년 공차 구입용 특별 계정에서 그 비용을 지불한다.
보이공차는 선통(宣统)3년(1911년)까지 167년간 황실에 납품되었다. 공차의 차엽은 초기에는 육대차산에서 채엽하였으나 점차 이무차산에서 주로 채엽하게 되었고, 그 가공 또한 초기에는 사모청(思茅厅)에서 전용으로 설치한 "차점(茶店)"에서 하였으나 차츰 차상이 설립하고 관부에서 감독하는 차장(茶庄)이 주로 담당하게 되어, 공차를 가공하는 차장은, 이무(易武) 차상 이개기(李开基)의 "안락(安乐)"호 차장이나 차순래(车顺来)의 "차순(车顺)"호 차장 등과 같이, 일시에 커다란 명성을 얻었는데, 황실에 헌납해 올린 "이무정산칠자병차"가 광서(光绪)20년(1894)에 황제로부터 친히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이개기(李开基), 차순래(车顺来)는 황제로부터 "예공진사(例贡进士)"라는 품직에 봉해졌는데 그 중 이개기(李开基)는 이부(吏部) 칙명으로 수직좌랑(修职佐郎)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무(易武)는 공차지향(贡茶之乡)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보이차가 대량으로 경성 즉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성의 궁정 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보이부지(普洱府志)》중에는 "보이차의 이름이 온 수도에 다 알려져 있으며 모든 경성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2. 이무차(易武茶)는 현재 전통보이차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차이다.


개혁개방의 빛나는 성과에 의해 보이차는 홍콩, 대만, 광동 등의 지역은 물론 한국, 일본, 싱가폴 등 동남아 국가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음용 및 수장자가 추지약무(趋之若骛: 수많은 오리떼가 한번에 날아오르는 양상)의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보이차에 대한 시장에서의 논의가 분분한 실정으로, 이를테면 보이녹차, 보이홍차 등등을 법규로 정하고 있어 업계 내의 인사들도 심히 난처한 실정이다.
보이차(普洱茶)란 무었인가? 2002년 6원 서쌍판납에서 개최된 '보이차 국제학술 연토회' 상에서 내외의 전문가및 학자들은 보이차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즉, 보이차(普洱茶)란 운남 난창강 유역의 차나무 원산지에서 산출되는 역사적 명차로서, 운남대엽종 차수(茶树)의 선엽(鲜叶)으로 만든 쇄청모차(晒青毛茶)를 완만하게 자연발효시키거나 또는 인공적으로 속성 후발효시켜 만든 특정한 종류의 차류(茶类)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보이차는 복제할 수 없는 지역적인 명차로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보이차를 만듦에 있어 중요한 원산지를 가지고 있는 이무차(易武茶)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통보이차의 특색을 보유 견지하고 있으며 보이차 애호가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2004년 4월 맹랍현(勐腊县)에서는 이무(易武), 의방(倚邦), 만쇄(曼洒), 만장(曼庄), 혁등(革登) 등의 고차
산 탐방을 위해 운남성 내외의 차업 전문가 및 학자 10여인을 초청하였다.
실지 답사 후의 보고에 의하면, 맹랍현(勐腊县) 경내의 5대 고차산은 그 실태가 모두 서로 달라, 혁등(革登) 차산은 모두 경작지로 바뀌어 이미 차나무를 찾아볼 수 없고, 의방(倚邦)과 만쇄(曼洒) 차산은 비록 차산 전체에 잔여 차수(茶树)가 일부 남아있으나 대부분이 6~700묘 정도의 소규모 차수림(茶树林)에 차나무는 단 몇 주 정도 밖에 없을 정도로 차나무가 희소하고 차나무의 수세(树势:성장도) 또한 쇠약한 실정이다.
한편 만장(曼庄) 차산의 차수는 그 성장도가 비교적 양호하고 밀도 또한 비교적 높으며(매묘당 약 100주) 면적 또한 현재 1000여묘 정도 된다. 위 4대 차산의 고다원(古茶园)은 모두 3200묘 정도로 연산 16톤 정도의 차를 생산할 수있다.
이에 비해 이무(易武) 차산에는 7000여묘(만랍(曼腊) 1000묘 포함)의 고다원(古茶园)이 있으며 연 90톤의 차
를 생산할 수 있어 고다원(古茶园)의 면적 및 그 생산량이 여타 4대 차산 총합의 수배에 달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무(易武)야말로 명백히 전통보이차의 생산 기지라 할 것이다.
현재 이무에는 칠자병차를 개별적으로 제조하는 차방(茶坊)이 30여곳 정도 있으나 대부분이 쇄청모차를 만들어 산차(散茶) 형태로 외지 차상(茶商)이 구입해 가므로 차농(茶农)의 수입 및 지방세 상의 손실이 매우 크고, 차산업이 회복 중이나 그 발전 속도는 완만하고 해내외(海内外)에 떨치고 있는 보이차의 고향이라는 평판에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 소개:
이사정(李师程) : 이무 차산의 차엽세가(茶叶世家) 출신으로, 그 증조부 이개기(李开基)는 "안락(安乐)"호 차
장(茶庄)을 열어 헌차입공(献茶入贡)시 "서공천조(瑞贡天朝)" 금편을 하사받았으며 광서제(光绪帝)로부터
"예공진사(例贡进士)"의 관직에 봉해지고 이부(吏部)에서 "수직좌랑(修职佐郎)"에 임명되었다. 이사정은 어릴 때부터 차산문화(茶山文化)에 대한 훈도(熏陶)를 받아왔으며, 차문화 연구와 차산업 발전에 진력해 오고 있다.
중국공산당 곤명(昆明)시위원회 부서기, 중국공산당 사모(思茅)지역위원회 서기, 중국공산당 운남성위원회 당교(党校) 상무부교장 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차엽문화절(茶叶文化节)의 창설자이다. "보이차엽절(普洱茶叶
节)"은 그가 사모(思茅)지역위원회 서기 재직시 주관한 행사였다. 현재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协) 운남성위원회상임위원, 운남성 정협 문사위원회(文史委员会) 주임, 중국공산당 운남성위원회 당교(党校) 운남행정학원 교수직을 맡아 있다. 또한 곤명민족차문화촉진회 명예이사장 직도 겸하고 있다.


오진(吴进) : 현 운남성 정협 문사위원회 판공실 부주임
운남이무정산다엽유한공사(云南易武正山茶叶有限公司)는 2006년에 성립되었으며, 운남성기술질량감독국
의 관심과 지도하에 운남민족차문화연구회 주관으로 20여 이무고진(易武古镇)의 차창, 차장 등 28개소가 주주로 공동발기하여 설립된 차장연합체이다.
공사(公司)는 성과 신을 근본으로 하고(诚信为本), 품질을 첫째 목표로 하여(质量第一), 차문화를 전파하여(传播文化) 대중에 서비스하고(服务大众), 조화로운 발전(和谐发展)을 경영이념으로 한다.

'차 이야기 > 보이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활죽양자, 포랑산, 남나산 고수차  (1) 2020.03.01
진순아호(眞淳雅號)  (0) 2020.03.01
차순호(⾞順號)1  (1) 2020.03.01
충시차(蟲屎茶)란?  (0) 2020.03.01
보이차는 어떤 차일까요?  (0) 2020.02.29

차순호(⾞順號)1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20:54 Posted by 거목

2003년판 차순호 

보이차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게 하였던 차가 바로 차순호(車順號)입니다. 동경호와 함께 보이차를 대표하는 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들이 바로 보이차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차인 호급(號級) 보이차입니다. 1900년대 초 청나라 말기에 그동안 황실에 차를 바치던 공차(貢茶) 제도가 사라진 후부터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거의 대부분 호(號)로 끝나기에 당시의 차를 속칭 호급차(號級茶)로 부릅니다.
호급 보이차 중에서 가장 유명한 호급차가 차순호와 동경호 이외에 복원창호(福元昌號)와 송빙호(宋聘號)가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이차의 4대 천왕(四大天王)입니다
이외에도 동흥호, 홍창호(홍태창호), 동창호, 정흥호, 경창호 등 100여 개가 넘는 호급차들이 최상급인 골동급(骨董級) 보이차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급차를 생산하던 개인 차창은 1956년 중국의 국유화 정책에 따라 모두 없어지고, 호급차 자체도 지금은 거의 구할 수 없을 뿐아니라 가격도 1편에 1억 원이 넘습니다.

차순호의 유래


다른 모든 호급차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차순호 역시 수많은 창건 연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비교적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차순호와 관련해 전해지고 있어 그 창건 연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차순호의 창시자는 차순래(車順來)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무에 개인 차창을 연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험에 합격하자 감사의 의미로 황궁에 자신이 만든 차를 직접 긴압하여 바쳤습니다.

차순호 본가 고택 전경 

그런데 이 차를 음용한 황실에 소문이 펴지게 되고, 결국 황제까지 음용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그 맛에 반해 차순래에게 '서공천조(瑞貢天朝)'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그로 하여금 공차(貢茶)를 생산하게 하였습니다.

차순호 본가에 있는 편액. 그러나 이 편액은 황제가 내려준 편액이 아니라 2006년에 대만 사람들이 다시 만들어준 것임. 

황제에게 편액을 직접 하사받는 동시에 황실에 공품을 독점적으로 받치게 되면서 차순호는 일약 보이차의 가장 중요한 차장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차순호는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보이차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차순호 고택에 전해지는 보이차 긴압석. 아마 이 긴압석으로 황실에 직접 긴압하여 바쳤을 것으로 추정. 

차순호 고택에 전해지는 보이차 긴압석. 아마 이 긴압석으로 황실에 직접 긴압하여 바쳤을 것으로 추정.
차순래가 황제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보이차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한 이 시기에 관해 중국의 거의 모든 자료에서는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 재위 기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순래가 차창을 개설한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험을 보았으니 차순호의 창건 연대도 도광제 재위기간으로 추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국내 자료에서도 이렇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순래의 후손 중의 한 명인 차지결이란 분이 만든 차순호에도 황제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해를 1839년으로 표시하고 있어 차순호의 설립 연대를 도광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2009년 차순호 차장의 차순호 칠자원차 

위의 사진에서 보면 편액 위에 조그만 글씨로 '1839년 도광황제 어사(御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차순호의 1800년대 초 설립 설과 차순호 설립 200주년, 혹은 170주년 등 많은 설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순래에게는 3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3남인 차덕삼(車德三1880~1935)이 이무에서 가장 중요한 차창으로 발전한 가업을 승계하여 차순호를 운영합니다.
그런데 차덕삼은 1880년 생으로서 1800년대 초에 부친이 차순호를 설립하였다면 연대가 이상하게 됩니다. 차순래가 1837년에 과거를 보았다 하고 그 조금 전에 차순호를 창립하였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인데, 차순래가 20살에 차순호를 창립했다 해도 그로부터 약 50년 후에 막내인 차덕삼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입니다.
이렇게 본대면 차순호의 설립 연대는 180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고, 구체적으로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재위 1875∼1908) 시기의 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광서제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나 양어머니이자 숙모인 서태후가 섭정을 하다가 1898년 경부터 직접 통치(親政)를 하게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 27세입니다. 친정 이전이라도 적어도 성년이 되어 차를 품평할 수 있다면 광서제의 나이 20세가 되는 1890년 전후까지는 그 시기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차순호의 성립연대는 1894년설, 혹은 1901년설 등으로 하는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서공천조(瑞貢天朝)' 편액의 유래에 대해 혼동이 많은 것은 그것이 사료(史料)에 의해 의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 편액의 후계자나 가족들의 기록, 그리고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차순호는 차덕삼의 장남인 차순래의 3대손 준의(遵義 1911-1963)에게 이어지고 다시 4대손 순예(循禮 1931-2004), 5대손 지신(智新 1948~)으로 이어지며 가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차지결(車智潔 ?)이라는 분은 바로 5대손 차지신의 동생입니다.

그런데 차순호의 역사에서 매우 불행한 사태가 5대손인 차지신과 차지결 형제 사이에 발생합니다. 바로 과거 차순호의 영광을 가져온 황제의 편액을 둘러싼 투쟁인데, 일설에는 차지결이(혹은 친척이라는 설도 있음) 무장한 사람들을 이끌고 본가에 가서 형이 보관하고 있던 편액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이때가 2005년으로 그 편액을 빼앗은 사람은 경홍(景洪)에서 이무 차순호 차창을 내고 본인이 진정한 차순호의 승계자로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지신은 편액을 빼앗겼으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대만의 차인들이 곤명(昆明)에서 복제품을 만들어 2006년 본가에 걸어주었느데, 현재 볼 수 있는 편액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8년 11월 차순호 본가. 가운데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겸리 대표자 

현재 차순호는 장손인 차지신이 본가인 차순호 고택에 살며 '이무차씨지신고택방(易武車氏智新古宅坊)'이라는 차창을, 그 동생인 차지결은 '이무차순호차장(易武車順號茶莊)'이라는 차창을 운영하며 각각 차순호의 정통을 잇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서공천조' 편액은 동생인 차지결이 소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이들의 친척이 소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마도 공개하면 자신이 탈취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감추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누가 과거 가장 중요한 호급차의 하나였던 차순호의 그 전통 제다 방법을 전수받은 진정한 차순호의 계승자인가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겸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차순호는 2003년에 만들어진 차입니다.
호급차의 명맥이 끊어진 이후 많은 곳에서 호급차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동일한 이름으로 호급차를 만들어 왔는데, 차순호 역시 마찬가지로 차 씨 가문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곳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겸리의 차순호는 '이무차씨차장(易武車氏茶莊)'이라는 차창에서 만들었는데, 이 차창이 과거 차 씨 가문에서 설립한 곳인지의 여부도 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차 씨 가문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모든 차창을 국유화 한 1956년 이후 2002년까지 차순호를 판매하지 않았고, 집에서 마실 산차만 생산하였습니다. 자가소비 이외에 정부 관리들이 방문하거나 특별히 중앙정부에 상납할 것들만 만들다가 2003년 부터 소량의 고차수 보이병차를 전통 방법으로 생산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이 전통 제다법이 현대까지도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연구 과제입니다)
2003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차 씨 가문의 차순호가 어떠한 것이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겸리의 보이차가 공교롭게도 2003년도에 구입한 것으로서 혹시 이때의 차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정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겸리의 이 차순호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상급 원료로 만들어져 당시 가격으로도 매우 고가에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호급보이차들 중에서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차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송빙호의 경우만이 그 제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만에서 '진순아호'라는 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 진순아호 참조
따라서 옛날의 호급 보이차의 이름을 가지고 시중에 나와 있는 차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겸리의 이 차순호도 어떠한 경로로 만들어진 차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래된 보이차인 것만은 틀림없으며, 이무 차산이 가지고 있는 특질, 곧 광서 황제가 묘사한 차순호 고유의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서 황제는 차순호를 어떻게 평가하였을까요?


차순호의 특징


단지 황제가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차순호가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막 즉위한 황제가 시골구석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편액을 하사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광서 황제는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황제였습니다. 그는 차순호를 시음하고 다음과 같은 평을 하였습니다. .
"찻물이 맑고 진하고(湯清醇), 맛은 투텁고 깊으며(味厚釅), 회감이 오래 유지되니(回甘久), 마음과 몸을 정화시켜준다(清心脾). 과연 서품(매우 뛰어난 차)이로다!(乃茗中之瑞品也!)"
<청심비(清心脾)는 심장과 비장을 맑게 해준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으로 해석하였으며, 심장과 비장에 스며든다(沁心脾)로 품평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호급차가 보이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희소성 뿐 아니라 바로 보이차에 대한 표준을 세운 것이라고 할 때, 광서 황제의 차순호에 대한 평가 속에 보이차가 가져야 할 차의 기준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탕 색이 맑고 진하며, 맛이 두텁고 깊으려면 차의 원료가 어떠해야 하는가? 막 재배한 대지차나 재배차가 이러한 색과 맛이 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지차의 경우에 갓 만들어진 차의 탕 색이 흐리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지차의 어린순에 있는 솜털의 영향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탕 색이 진하려면 차의 내재 성분이 충만된 고수차여야 합니다. 이것이 고차수의 운남 대엽종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보이차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원칙일 것입니다.

차순호 우린차. 맑으면서도 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일반적으로 이무차산의 차의 품질은 찻물이 유하고 순활하며, 구감이 맑고 답니다. (易武茶湯水柔和順滑,口感清甜) 이무정산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함이 입안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맛은 두텁고 깊다는 '미후엄(味厚釅 )'의 경지입니다.
이무 차산의 차는 또한 고삽미가 비교적 적고 회감이 상대적으로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苦澀感較弱,回甘較好).
회감(回甘)은 단맛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으로 이는 바로 단맛을 느끼게 되는 당(糖) 맛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회감은 차를 마신 후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난후 다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단맛을 의미하며, 당(糖) 맛은 보다 직접적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단맛을 의미합니다.
찻잎 속에 있는 성분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시간적 간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맛을 바로 느끼지 못하고 일정 시간, 그러나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느껴지는 이 회감이야말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이 회감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래간다는 것, 즉 황제가 언급한 '회감구(回甘久)'의 상황은 차 안의 성분들이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내포성이 매우 좋다는 것인데, 이는 탕 색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그 맛이 매우 오랫동안 성분 사이의 일정한 조합에 의해 회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회감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차가 가지고 있는 성분이 매우 중요한데, 이 역시 이무의 차산이 가지고 있는 원료의 특징입니다.

차순호 황금색 엽저. 이무차산의 특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차 
차순호 엽저 말린 것.이무의 어린 잎을 위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음.

차순호 뿐 아니라 이무에 존재했던 수많은 호급차 차창들이 이러한 이무 차산의 고차수가 가지고 있는 특질에 매우 충실한 차였기에 오늘날까지 골동 보이차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이 광서 황제가 '서공천조'를 하사하게 된 동기로 되었다고 판단되며, 이는 오늘날 소위 고차수 보이차가 구현하여야 할 핵심가치일 것입니다.
보이차를 공급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차를 제조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고, 수요하는 소비자 측면에서는 이러한 기준으로 만들어진 차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차를 만날 때 비로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청심비(清心脾)'의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러한 차야말로 진정한 '서품(瑞品)'으로의 자격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차 이야기 > 보이차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순아호(眞淳雅號)  (0) 2020.03.01
차순호 2  (0) 2020.03.01
충시차(蟲屎茶)란?  (0) 2020.03.01
보이차는 어떤 차일까요?  (0) 2020.02.29
운남성 포랑산 300살 차나무  (0) 2020.02.29

충시차(蟲屎茶)란?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19:55 Posted by 거목

 70년대 보이차로 만든 충시차 


충시차(蟲屎茶)란?


차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사실 차를 처음 재배하고, 자신들의 일상생활 속에 중요한 필수품으로서 차를 포함시킨 사람들은 소수민족들입니다.차와 관련한 이들의 생활 풍습이나 민속 중 차 벌레의 배설물을 모아 햇볕에 말리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건조한 후 물에 섞어 마시곤 하였던 차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시차(蟲屎茶)라고 하는 것으로, 육보차로 유명한 광서성이나 귀주성 등에서 묘족(苗族)과 요족(瑤族) 등이 이러한 차를 만들어 음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화향나무(化香樹 : 일명 백차나무)에서 자라는 화향아(化香蛾)라는 곤충이 그 나무의 잎을 먹고 배설한 배설물을 솥에서 덖어 차로 만들었는데, 후에는 보이차에서도 찻잎을 갉아먹고 배설한 것을 모아 차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벌레의 배설물(蟲屎)이라는 이름 대신에 아주 조그만 과립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의주라는 뜻을 가진 용주차(龍珠茶)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화향나무와 안길 백차나무


그런데 이 화향나무라는 것이 어떤 나무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화향나무를 검색하면 거의 충시차와 관련된 것뿐이고, 화향나무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백차나무라고도 하는 데에서 힌트를 얻자면, 1982년 절강성(浙江省) 안길현(安吉縣)의 해발 800m 산속에서 발견된 야생 백차나무와 같은 종(種)의 나무가 아닌가 하고 추측합니다. 그 당시 수령 100년이 넘은 이 나무가 안길 백차의 어머니가 되는 백차조(白茶祖)입니다. 물론 안길 백차는 백차가 아니라 안길의 이 백차나무에서 생산되는 녹차를 말합니다.

1982년에 발견된 안길 백차나무

원래 안길의 백차는 약 1,800년 전 한나라 영제(靈帝) 때 ‘편하고 좋은 고장’이라는 뜻으로 ‘안길(安吉)’라는 지명을 하사받았을 때부터 기록에 나오는 차입니다.
《다경(茶經)》을 편찬한 육우도 이 안길 백차를 마셔보고 감탄하며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 이 차를 만나 더 이상 여한이 없다"라고 크게 외치고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우가 가져온 차를 마신 옥황상제는 백차나무를 모두 하늘로 가져오게 했는데, 실제로 이후 수백 년 동안 안길 백차가 사라져 버리
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백차나무가 사라지니까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육우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대비하여 인간 세상을 위해 백차나무 씨 한 톨을 몰래 산속에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이 백차나무는 수백 년 동안 사라졌다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송나라 인종(仁宗·재위 1022~1063) 때의 일입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백색의 어린잎차가 백성 앞에 나타났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야생의 백차나무로서 험준한 계곡 사이에서 겨우 한
두 그루만 자생하는 매우 희귀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충시차와 관련하여, 백차나무라고도 하는 화향나무에서 자라는 곤충이 만들어 낸 그 독특한 차를 처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 시기, 즉 송나라 때인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에 백차나무가 안길 지역에 다시 나타난 시기와 일치합니다.
물론 처음 충시차가 만들어졌던 화향나무가 이 백차나무와 같은 종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향나무를 백차나무라고도 하고, 그 백차나무가 다시 기록에 나타난 시기와 충시차가 처음 만들어졌던 시기가 일치하는 점 등을 미루어 이러한 추정이 전혀 무리가 가는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백차나무는 다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 번의 등장과 소멸을 반복하는 이 독특한 나무는 송나라 시기에 이렇게 잠시 나타난 후 다시 사라졌다가 무려 800년의 침묵을 깨고 1930년에 야생 차나무 수십 그루와 함께 세상에 다시 나왔고, 1982년에 안길에서 수령 약 100년의 백차나무가 발견됨으로써 세상의 이목을 다시 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추측건대, 이 백차나무는 육우 시대 이후 꾸준히 존재하여 왔지만, 그 희소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충시차의 유래


충시차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서성과 귀주성의 특산 차입니다. 특히 계림의 특산 차입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생산을 하던 곳이 이들 지역이라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러한 벌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충시차를 만들어 음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위의 안길 같은 지역이 그러한 곳입니다.
처음 충시차는 묘족(苗族)과 요족(瑤族)이 충차(蟲茶)에 차와 벌꿀을 섞어 마시는 것으로 시작됐다 합니다. 이곳 농민들이 야생 등나무나 찻잎, 화향나무 등의 줄기와 잎을 쌓아놓으면 작고 검은 벌레들이 와서 먹고 싼 배설물과 남은 차 줄기를 체로 칩니다. 그리고 체로 걸러진 가루를 솥에 넣고 볶아서 말린 후, 꿀과 찻잎과 배설물을 각각 1:1:5의 비율로 섞어 다시 볶아서 충시차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충시차가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1. 귀주성(貴州省) 적수(赤水)시 대동고진 동패산 전설
"옛날 산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화향나무를 삶아서 먹었는데, 그나마 생엽이 떨어져 어느 날 쌓아둔 화향나무에 벌레가 생긴 것을 보고 벌레의 배설물까지 끓여서 마시게 되었는데 의외로 향기가 좋아 좋아서 그 후로 충시차를 마시게 되었다."
2. 호남성 성보현의 묘족 전설
"호남성 성보현에 사는 묘족들이 봉건 통치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하고 진압하게 되는데 묘족들은 산속에서 숨어 살게 되었다.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화향나무의 나뭇잎에 벌레 먹은 잎과 배설물을 끓여 마셨는데 맛이 좋아서 그 후 계속해서 마시게 되었다."


위의 두 가지 유래에서 보듯 충시차는 처음부터 부유층의 사치품으로서가 아니라 먹을 것 없는 가난한 민중들의 식량 대용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맛과 약효가 뛰어남이 알려지자 점차 부유층이 즐겨 마시는 사치품으로 변해갔습니다.


보이차와 충시차


위에서 보았듯이 충시차는 화향나무와 관련이 있는 차입니다. 그러나 충시차가 워낙 희소하여 그 제조 방법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시차를 광범하게 즐겼던 가난한 소수 민족들은 그것이 비록 화향나무가 아니어도 자신들이 늘 마시던 찻잎에서 생긴 벌레를 이용하여 차를 마시는 방법을 오랫동안 이어왔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로 충시로 만들어지는 것의 재료는 야생 등나무와 찻잎 등으로, 이들을 포개어 놓고 밀폐 혹은 반 밀폐되 공간에 둔 채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서 나방과 같은 것이 나타나 그 벌레가 찻잎과 등나무 잎 등을 먹고는 나오는 배설물을 모아 꿀이나 찻잎, 충시 등을 넣어가열 시켜 차로 복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간혹 오래된 보이차에 보면 그 보이차를 먹고 구슬처럼 매달려 있는 벌레를 볼 수 있는데, 이를 다충(茶蟲)이라 하고, 일본에서는나방 벌레의 유충인 아(蛾)라고도 하는데 일생 동안 찻잎만 먹는다고 합니다.
이를 차처럼 마시면 마치 아주 오래된 보이차 맛을 느낄 수 있어서 홍콩이나 광동 같은 곳에서 보이차를 창고에 넣어 둔 채 보관을 하다 그 창고를 정리하는 시점에 이런 것이 발견되면 차를 만들어 마시곤 하였던 것이 근래에 충시차를 보급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질 좋은 상품(上品)의 충시차는 적어도 30년 이상 보관된 노 보이차(특히 타차나 병차)에서 발견되며, 보이차 한편에서 아주 조금만 나와 붓으로 쓸어 담는데, 그 양이 무척 적어 매우 희귀한 차로 취급됩니다. 또한 농약 등 약성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자연히 충시차는 유기농 차, 혹은 오래된 차에서만 나온다는 인식이 더해져 더 귀한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일생동안 차를 먹으며 자란 다충벌레의 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하고, 이것을 위장약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벌레의 배 안에는 소화를 위한 강력한 효소가 대량으로 분비되고 있고, 이 효소들은 다른 잡균의 번식을 막기 위한 천연 항생 물질을 만들었는데, 옛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충시차가 이러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보이차에서 나온 충시차의 맛은 오래된 노차나 숙차와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고급차로 분류되어 현재는 구하기 힘든 차로 되었습니다.


충시차의 특징


1. 보이차 충시차는 보이 생차의 색보다 조금 진한 색을 띠고 있으며 배설물의 냄새는 없고 거꾸로 차향이 좀 더 강합니다. 맛은 산미와 함께 꿀맛 즉 밀(蜜) 향이 좀 더 강해서 보이차보다 좀 더 단 느낌이 있습니다. 차 벌레의 유충이 차옆을 먹는 소화 과정에서 효소에 의해서 아미노산이 증가했기 때문에 생차보다는 숙차의 맛에 가깝습니다.

진한 색을 띠고 있는 충시차 

2. 이시진(李時珍)이라는 사람이 1578년에 저술한 중국 명나라의 대표적인 한의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충시차에 대해서 "차도 되고 약도 되며 차와 비슷하나 차가 아니기도 하다(亦茶亦藥 似茶非茶)"면서, “열의 해소를 돕고, 독을 풀어내며, 비위를 튼튼하게 하고 소화를 도우며, 또한 설사에 좋으며(지사 止瀉), 잇몸의 출혈과 병에 좋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를 마시면 눈이 맑아지고 장이 튼튼해지며, 피로가 풀려 그 옛날 쓸만한 약이 없던 시절에 약 대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충시차는 위를 건강하게 하고(건위 健胃) 장을 편하게 하는(정장 整腸) 효과가 있어 예로부터 위장약 등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충시차에 다른 잡균의 번식을 막는 효소와 천연 항생 물질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 충시차에는 단백질, 지방, 당류, 인, 철, 아연 등과 함께 인체에 필요한 필수아미노산 8종을 모두 함유한 18종의 아미노산이 전체의 1/3 이나 됩니다. 충시를 한데 모아서 잘게 가루로 만들어 전다법으로 우린 충시차는 오래된 보이차의 달고 부드러운 맛에 깊고 진한 한약의 탕색으로 시큼한 맛 그리고 과일향이 납니다.
5. 겸리의 충시차는 70년대의 오래된 보이차에서 추출한 충시차입니다. 차를 우린 충시차의 맛은 골동 보이차의 맛 그대로이며, 아주 담백한 맛으로 진하게 마셔보았는데도 거북한 맛이 나지 않습니다.

충시차를 우릴 때는 다관에 직접 넣지 않고 우림망에 싸서 넣어 우리거나 거름망으로 이용함
거름망으로 우릴 때에는 핸드드립으로 커피 내리듯이 원을 그리면서 우려줌 


이렇게 우린 충시차의 맛은 골동 보이차의 맛 그대로입니다.

 

  충시차 혹은 용주차

 

두 가지 말은 같은 말입니다.
용주는 용의 구슬, 즉 여의주라는 뜻이고요, 충시는 말 그대로 벌레 똥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대상을 일컫는 말인데 느낌 차이가 많이 납니다.
한때 대만의 상인들은 충시는 오래된 골동차에만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벌레가 생겨 충시가 만들어진 차는 더 비싸게 판매했고
충시만 모아서 다시 비싼 가격으로 팔았습니다.


전에 마셔볼 기회는 있었습니다만, 절대 안 마셨습니다.
충시에 얼마큼 좋은 성분이 있는지는 몰라도 제 감수성으로는 먹기 어려워서 말이지요.
제 비위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식용 벌레는 먹어도 벌레 똥은 안 먹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돼지 똥을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튼, 대만의 상인들의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습니다.
보이차에 생기는 벌레의 정체는 작은 나방의 애벌레입니다.
고온, 다습, 통풍이 안 되는 환경에서 발생하는데 빨리 생기면 1~2년 사이에도 발견됩니다.
벌레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하얀색 점액이 붙습니다.
이 점액이 마르면 마치 거미줄과 비슷한 모양의 타래 형태의 선이 생깁니다.
그 벌레는 보이차에 붙어살면서 차를 실컷 갉아먹고 검은색, 갈색의 작은 입방체의 똥을 쌉니다.
그 똥을 모아서 파는 것이 충시차입니다.
무슨 불로장생의 명약처럼 과장해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효과가 있으면 팔지 않고 자신이 마셨겠지요.
벌레 똥을 여의주라니...

보이는 합니족 언어로 '수만채(水灣寨, 작은 호수 옆에의 마을)"

 

보이차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봤지만 보이차는 무슨 차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한국소비자가 많지 않다.  그럼 보이차는 도대체 어떤 차일까?

보이차는 운남성 보이지역의 이름으로 정의한 차(茶)다.

운남성에서 생산된 차는 모두 보이지역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보이차라고 하였으며 보이는 합니족 언어로 '수만채(水灣寨, 작은 호수 옆에의 마을)라고 하며 보(普)는 마을의 뜻이고 이(洱)는 작은 호수의 뜻이다. 보이라는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다르며 당(唐)나라의 남조국(南詔)시대에 ‘보일검(步日瞼), 남송(南宋)에 ’보일부(步日部), 원(元)나라에 ‘보일(普日)’, 명(明)나라에 ‘보이(普耳)’과 ‘普洱’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명나라(1620년)에 ‘전략(滇略)’에서 ‘보차(普茶)’가 처음 소개 되었고 명나라 말년(1660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普洱茶出云南’라고 소개한 후부터 지역명을 ‘普洱’로 사용하고 보이지역에서 집산하는 운남차를 ‘普洱茶’라고 하였다.

청나라 관청인 보이부(普洱府)의 현재 모습

운남차가 황실의 공차가 되는 것이 주(周)나라부터 이었고 보이차를 마시는 기록은 당(唐)나라부터 이었다. 그 후에 송(宋)나라와 명(明)나라를 거쳐서 청(淸)나라에서 전성기와 쇠퇴기를 지냈다. 그 이후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과도기를 거쳐 1948년에 중국의 전통(고대) 보이차가 사라졌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華國) 성립하여 1985년까지 홍차, 녹차와 보이숙차만 생산되어 전량 수출하였고 1993년까지 중국에서 개인간의 차거래가 불법이었다.  2000년부터 차시장의 출현으로 보이차가 제 2의 전성기에 들어섰다. 우리는 보이차의 제 2전성기를 '현대 보이차의전성기'라고 한다.  

고대 보이차의 전성기--청나라의 전기와 중기(1660년~1870년)

서쌍판납주 보이 고차산 지도(우측 고6대차산 : 이무, 만전 ,망지, 의방, 혁등, 유락)

당시 고육대차산(古六大茶山)에 집집마다 차를 재배하고 판매하였다. 매년 춘차를 구매하러 온 상인들이 대거 차산에 찾아온다.

차마고도

차산에서 보이차와 관련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10만명 이상, 보이차를 각 지역으로 운송하는 말이 매년 5만필 이상 수요하였다.

고육대차산의 차가 차마고도를 따라 베이징과 티베트 이외에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나라에 판매되었고 1902년에 프랑스는 보이차 때문에 사모(思茅, 스마우, 현재의 보이시)에서 영사관을 설립하였다.

 

보이차의 쇠퇴—세금으로 쇠퇴하는 청나라 후기 보이차 생산(1871년~1910년)

청나라 후기에 청정부가 보이차에 부가되는 세금을 지나치게 올리면서 보이차 사업을 하는 상인들이 어쩔 수 없이 보이차사업을 포기하였고 보이차를 재배하는 농민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반 농사를 하게 되어 차나무들이 벌목되거나 황폐되었다.

보이차 생산의 재개—우여곡절의 중화민국 보이차 생산(1911년~1948년)

청나라 멸망한 후에 중화민국정부의 노력으로 보이차가 국제 차시장에 진출하였지만 1930년대에 인도차와 스리랑카차의 국제시장 진입으로 경쟁이 심했다. 1939년 2차세계대전 일본군의 침략으로 보이차생산이 중단되었다가 1941년부터 보이차 생산을 재개하여 인도, 미얀마와 태국에 수출되었다. 민국시기(1911년~1948년)에 생산되는 보이차는 호자차(號字茶)라고 하며 수량이 매우 한정되어서 현재 매우 귀한 보이차가 되었다.

현대 보이차 생산의 시작--중국 계획경제 하의 보이차 생산(1950년~1985년)

1950년부터 1985년까지 중국의 시장경제 체제하에 운남성의 홍차, 녹차과 보이차 생산은 활발하게 진행하였지만 차는 시장에서 자유 거래할 수 없었으며 모든 차 생산의 목적은 오직 수출에 있었다. 1973년에 보이차 숙차 기술 개발되기 전에 보이차 생산은 유명무실(有名無實)하였고 홍차와 녹차만 생산하였다. 

현대 보이차의 전성기—2000년~현재

1978년 12월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수립에 따라 중국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차의 개인 간의 거래는 1993년에 되어서야 전면적으로 허락되었지만 사실상 국내서 보이차 시장이 바로 형성하지 못하고 2000년 8월 8일에 보이차의 고향인 곤명에서 첫번째 차시장이 문을 열었다. 

보이차의 재2전성기에 들어가게 하는 계기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것이었다. 당시 홍콩의 보이차 상인은 사업을 정리하고 떠나기 위하여 창고에 깊숙히 보관하였던 100년 이상의 보이차 노차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 보이차들이 대만의 상인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들이 보이차에 대한 열광으로 대만, 홍콩, 마카오과 중국 대륙에서 보이차 바람을 불기 시작하였다. 보이차 중의 황제라고 불리는 노반장 보이차의 가격은 10년 사이에 1000배이나올랐고 곤명차창의 7542칠자병차도 400배나 올랐다.

보이차 시장의 급성장에 따라 많은 가짜의 보이차가 시장에 유통하게 되었다. 보이차 시장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2004년에 중앙정부, 2006년에 운남성정부가 법을 통하여 보이차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으며, 2008년에 운남성정부가 다시 수정하였다.

중국정부 정의한 보이차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

2008년 운남성의 정책 DB53/103-2008에 따르면 보이차는 운남성의 곤명시(昆明市), 초웅주(楚雄州), 옥계시(玉溪市), 홍하주(紅河州), 문산주(文山州), 보이시(普洱市), 서쌍판납주(西双版納州), 대리주(大理州), 보산시(保山市), 덕굉주(德宏州), 임창시(臨滄市)관할한 해발 1,000m~2,100m, 경사도가 25°이하의 PH4.5~6.0의 홍토(紅土, Laterite)과 황양토(黃壤土, Yellow soil) 지역에서 생산된 운남대엽종(Camellia sinensisvar. assamica(Mast.) Kitamura)찻잎을 사용하여 만든 차다. 

운남성 보이차 생산지역중에서 적경, 여강, 소통, 곡정 지역은 운남성에 속하지만 차를 재배하지 않거나 소량이어서 법으로 이지역들을 보이차 산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보이차는 대부분 '서쌍판납주', '보이시', '임창시'와 '보산시' 4대 보이차 산지의 차다.

 

별이 쏟아진다. 비박(bivouac)용 미니텐트에 홀로 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더 이상 그려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별이 가득하다. 부랑족(布朗族)이 집에서 담근 알코올도수 70도에 육박하는 위미주(玉米酒)를 그들과 밤새 마셨는데도 잠은 오지 않는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니 인공의 불빛 한 점 없는 칠흑이다. 어둠 속에서도 사람을 압도하는, 원시림이 뿜어내는 거대한 자연의 기가 느껴진다. 한여름 밤이지만 소름이 돋는다. 이곳은 중국 윈난(雲南)의 차산(茶山).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보이차(普茶)를 접한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다. 보이차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새삼 무슨 마력에 이끌려 윈난의 차산을 헤집고 다니고 있는지 나도 내가 궁금하다. 차와 차산, 그리고 차산 사람을 보고 싶어 윈난 탐방을 작심하고 돌아온 게 1년 만이다.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차를 즐기는 나는 업무차 중국에 가는 길에 짬을 내어 차산지를 일부러 찾아갔다. 하지만 이번처럼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할애하여 차산을 주 목적으로 작정한 것은 처음이다.
   
   관광코스처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규모 인공차밭이 아닌 고차수와 야생 차나무가 숨 쉬는 깊은 차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험로를 대비한 사륜구동 차량 확보가 필요했다. 또 차산에 밝은 사람이 동행해야만 한다. 여러 사람과 일정을 맞춘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는 차산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기에는 끊기기 일쑤이며 이곳은 탐방 목적과 부합하지 않기에 기동력을 갖추는 게 필수였다.
   
   생업이 있는 분들이고 현지의 날씨도 고려해야 하다 보니 봄에 출발하려던 여정이 여름에도 별 진전이 없었다. 해를 넘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디데이만 정하고 모든 것은 현지에서 추진하자’고 결심했다. 1년 남짓 세운 계획을 버리고 무작정 출발하였다. ‘차의 세계’라는 강호에 포진한 수많은 고수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초보다.
   
   3년 전 처음 방문하였을 때처럼 오늘도 밤을 하얗게 새우기도 전에 산골의 수탉은 때 이른 아침을 재촉한다. 새벽안개에 젖은 부랑산의 아침은 환상이었다. 상큼한 바람이 안겨주는 신선한 공기는 불면에 시달린 머리를 어느새 맑게 만들어버린다. 300년 이상 된 고차수(古茶樹)와 함께 살아가는 야생란의 자태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한다.
   

▲ 만신롱라오차이의 300년 넘은 고차수의 야생란.

부랑산은 신6대 차산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차산. 최근 몇 년 사이에 보이차의 원료가 되는 생엽(生葉) 가격이 가파르게 수직상승하고 있는 뜨거운 지역이다. 고차수(古茶樹)로 만든 생차(生茶) 중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라오반장(老班章)을 비롯하여 신반장(新班章), 라오만어(老曼峨) 등 유명 차산을 품고 있는 부랑산에서도 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라오반장보다 훨씬 더 거친 험로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 만신롱라오차이(曼興龍老寨)다. 험한 길 덕에 아직도 건강한 차산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인 차상과 대형 차창(茶廠·전통수공제조 차공장)이 아직은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길이 험하다는 건 단순히 오가기가 힘들다는 뜻이 아니다. 어린 잎을 따고 적절한 시간 이내에 위조(萎凋)와 살청(殺靑), 그리고 유념(捻)과 쇄청건조(灑菁乾燥)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만신롱 차농의 제다(製茶)기술은 믿고 맡기기에는 편차가 너무 심하여 균일한 제품을 만들 수 없다. 소량의 고차수를 위하여 1차 가공시설인 초제소를 지어 전문 기술자를 상주시킬 경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경제성이 없다. 만신롱의 차농들은 고차수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차와 대수차원을 760묘(1묘는 약 660㎡)나 소유하고 있어 이들을 고차수와 함께 사라고 요구한다. 중국인 전문가들도 이곳 고차수를 탐하지만 차산에 쉽게 손을 못 대고 있다.
   
   만신롱라오차이를 여러 차례 방문한 나는 지난 3월 평소에 잘 아는 고수차 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차창의 중국인 사장을 만났다. 그와 숙식을 함께하며 짧은 중국어(만신롱이라는 단어와 엄지손가락)로 집요하게 설득하여 차창의 직원을 만신롱으로 파견하여 차농 구애 작전에 돌입하게 만들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차농들의 요구가 너무 높아 경제성도 없었을 뿐더러 나름 고수차가 전문인 차창 사장의 체면과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사흘간의 냉각기를 가진 후 나는 차창 사장에게 말했다. “진짜 자존심이 다치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이다. 돈이 필요하면 우선 주겠다. 올해 못하면 내년에도 할 수 없으니 진정 고수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뜻을 세웠을 때 같이 하자!” 그는 현실적인 논리와 어려움을 장시간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의 짧은 중국어 실력이 오히려 고마운 하루였다. 그가 한참을 진지하게 나를 설득하고 나면 나의 대답은 변함없이 한 마디였다. “그래도 하자.” 말로 안 되자 그는 평소처럼 술을 권하였다. 대낮부터 마오타이를 한 병씩 비우던 우리 사이였지만 그 순간은 단 한 잔도 마시지 않고 굳은 표정을 고수하였다. 다음 날 그는 차창 직원과 만신롱을 잘 아는 부랑족 현지인을 섭외하여 차산으로 보냈다. 결과는 고차수만을 구매하는 데 어렵게 성공하였다. 그가 당한 것인지 내가 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며칠 전 지인을 통해 내가 고집한 만신롱의 차가 선주문 형식으로 모두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인으로서 윈난의 고차수 차산을 하나 개발해냈다는 뿌듯함에 좋았다. 나로서는 자그마한 쾌거다.


   

  •  승인 2016.04.05 09:47 ▲ 남곡 김중경

보이차를 음용하다 보면 백호, 금호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다른 종류의 찻잎을 사용한 보이차일까요?

지난번 국가표준조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이차는 운남성 지리표지보호 범위 내에서 자라는 운남대엽종(Camellia Yunnansis) 쇄청모차를 원료로 특정한 가공 공정을 통해서 생산된 차(茶)입니다.

따라서 다른 지역이나 다른 종류의 찻잎으로 만든 차에는 보이차라는 용어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보이차에 있는 백호, 금호라는 명칭은 무엇일까요?

 

보이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 발효가 진행되는 후발효차이므로 보관 환경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보이차의 후발효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3요소로 온도·습도·산소 3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보이차 발효의 대표적 곰팡이류인 ‘아스페르질러스니가’는 온도와 습도가 높을수록 활성이 증대되어 발효가 촉진되게 됩니다.

또한 이는 호기성균(好氣性箘)이라 산소 공급이 많을수록 발효가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보이차를 보관하기 위한 장소는 일단 통풍이 잘 되는 곳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산소 공급이 원활하기 때문입니다. 찻잎의 최종 가공 과정인 쇄청 시 함수율을 9~13%로 조절하는 궁극적 이유도 발효균의 활동에 필요한 습도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함입니다.

잎이 피기 전의 찻잎인 아(芽)를 둘러싼 흰털들을 백호(白毫) 혹은 은호(銀毫)라고 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백호(白毫)가 잘 발효되면 금색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에 이를 금호(金毫)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보이차가 좋은 환경에서 상당 기간 동안 풍부한 산소공급으로 진화하며 발효를 진행해 왔다는 증거입니다.

▲ 사진은 2009년도에 맹고융씨 차창에서 출시된 고운지음(古韻知音)이라는 청병입니다.

후발효와 산소의 연관성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 일부러 포장을 벗겨서 매장에 진열해 두었는데 같은 나이의 청병들에 비해 진화가 현저히 빠릅니다. 산소와의 접촉이 많을수록 발효가 빠르다는 걸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입니다.

▲ 사진은 동일차창에서 생산된 차들을 대상으로 서로 다른 조건에서 보관해 변화 정도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물론 객관적 비교가 되기 위해선 보관 환경이 동일해야 하는데 이 차들은 생산되자마자 제 차방(茶房)으로 왔습니다. 왼쪽 제품이 2009년 산인데 오른쪽의 2007년 산에 비해 훨씬 갈변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왼쪽 차가 늦게 생산되었지만 일찍 포장을 벗긴 상태에서 전시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빠른 발효가 이루어 졌습니다, 산소 접촉이 많을수록 진화의 정도가 빠르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즉 좋은 품질의 차를 좋은 환경에서 잘 보관하면 백호가 금호가 됩니다.

이렇듯 보이차는 좋은 환경에서 잘 보관하며 숙성되면 시각적으로도 훌륭하게 진화하게 됩니다.

 

이래서 대면 수업이 필요한 것인가 보다. 그래서 어떻하라고요?

오래된 보이차가 좋다면서요, 발효가 많이 진행된 것이 좋은 보이차라면서요. 그런대 왜 보이차는 포장지에 꽁꽁싸서 죽순 껍질로 또 포장의 하여 공기가 통하는 항아리에 보관하라면서요. 이렇게 벗겨서 진열해 놓은 것이 발효가 빨리 된다면 집에서 보관할 때에도 벗겨서 책장에 널어 두어야하는거 아닌가요? 그 때마다 이야기가 다르니 원.

  •  승인 2016.03.27 12:16 ▲ 남곡 김중경

요즘 보이차에 대한 관심이 많아 지면서 다양한 종류의 보이차가 수입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매니아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황편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황편”은 노차수(老茶樹)의 노엽(老葉)을 말합니다. 많은 노엽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누런빛을 띠기 때문입니다. “황편”은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다(製茶)기준에 따라 원료를 골라내는 과정에서 찻잎이 푸석푸석하고 크고 유념(揉捻)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을 찻잎의 생산표준에 따라 골라내는데, 이것을 일러 “황편”이라 합니다. 황편의 품질 자체는 원료가 되는 차의 품질과 일치하는데, 대부분의 황편은 제3엽으로 단지 외형이 예쁘지 않아 골라낸 것이지 품질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황편은 잎 조직이 두툼하고 실해서 그 맛이 달고 깊고 풍부하면서 내포성도 좋습니다.

쓰지도 떫지도 않으며 향은 독특한 황편은 여린 잎으로 만든 생차처럼 위를 상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차수의 황편은 당해 연도에도 맛이 있지만 오래될수록 더욱 향기롭고 진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황편은 변화가 빠르고, 시원하고 매끈하며 회감이 빠르게 돌아오며, 향기는 그윽하니 깊고 난향이 납니다.

황편은 1아 2엽에 비해 비록 늙고 찻잎 색이 엷기는 하지만 당도는 이들에 비해 훨씬 높습니다. 보관이 잘된 노황편은 차의 기운과 향기, 깊고 풍부한 맛은 물론이거니와 매끈매끈한(滑润) 맛을 가집니다. 재배차는 정기적으로 채엽 관리를 하기에 대부분 노황편이 생기지 않기에, 대부분의 황편은 노차수와 야생차의 차나무에서 만들어 집니다. 노차수 찻잎은 나뭇가지가 크고 높은데 양은 적어서 채엽 또한 쉽지 않습니다.

새로 나온 햇가지는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위쪽 잎들을 주로 성장시킵니다. 활발한 광합성을 통해 차나무에 필요한 영양물질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보기 좋은 비쥬얼을 가진 1아 2엽의 고급 찻잎을 선호하기에 1아 2엽을 주로 채엽해 차를 만듭니다. 3엽은 채엽하지 않기 때문에 노엽화 되어 노황편이 생깁니다. 상품 가치가 없기 때문에 채엽에서 제외되었던 찻잎입니다. 예전에는 이 찻잎들이 채엽이 되어 가공되면 누렇게 보여 황편이라고 하여 모차의 선별 과정에서 골라내 제외시켰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황편의 맛과 고혈압 당뇨와 같은 성인병 등에 그 효능이 많다고 알려지면서 요즘은 황편차를 선호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황편은 정상적으로 다 자라서 늙은 찻잎이 아니라 早老葉입니다.
정상적으로 다 자라고 늙은 老葉과 마찬가지로 누런(黃) 빛을 띠지만, 찻잎 속의 물질에 있어서 老葉과 黃片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황편차에 대해 중국 바이두백과(百度百科)에 실린 글이 있어 번역했습니다.

普洱茶老黄片

所谓“黄片”,说白了就是老茶树上的老叶子,因为多数老叶时间长了会泛黄,“黄片”因此得名。其实是指在原料筛选拣工序中,因条索疏松、粗大,在揉捻过程中不成条的部分,按照生产标准拣出来的这部分茶箐,俗称为“黄片”。黄片的品质和所选原料茶箐的品质是一致的,就我有限的所知大部分黄片基本都是第三叶。只是因外形不佳而被拣出,但并不意味着品质不好。相反,老黄片由于叶片组织厚实,反以甘醇厚的滋味和持久耐泡见长。 黄片的冲泡,可以稍增加一点投茶量,最关键的是水一定要开,泡的时间一定要够,否则滋味就不能够充分展现。至于投多少茶和泡多长时间,就需要根据自己的口味摸索一下了。茶友们也可以试试将黄片茶煮来喝,更加能体现黄片茶的香滑柔甜的特性。

보이차노황편

이른바 “황편”은 노차수(老茶樹)의 노엽(老葉)을 말한다. 왜냐하면 많은 노엽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누런빛을 띠기 때문이다. “황편”은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다 기준에 따라 원료를 골라내는 과정에서 찻잎이 푸석푸석하고 크고 유념(揉捻)이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을 찻잎의 생산표준에 따라 골라내는데, 이것을 일러 “황편”이라 한다. 황편의 품질 자체는 원료가 되는 차밭의 품질과 일치하는데, 대부분의 황편은 제3엽이다. 단지 외형이 예쁘지 않아 골라낸 것이지 품질이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노황편은 잎 조직이 두툼하고 실해서 그 맛이 달고 깊고 풍부하면서 내포성도 좋다. 황편을 우릴 때는 찻잎 양을 조금 더 넣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은 반드시 팔팔 끓이고 시간을 넉넉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맛이 충분히 우러나지 않는다. 차의 양이나 우리는 시간은 개인의 기호에 따라 어느 정도가 좋을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다우들과 황편을 끓여서도 마셔봤는데, 황편차의 향과 맛의 특성이 더욱 잘 드러났다.

黄片口感不苦不涩,香味独特,而且不像嫩叶生茶那么伤胃,所以,如果是古树黄片,在当年非常好喝,它也具有越陈越香醇的品质特征,特别是陈化的老黄片,更加迷人,当然有个前提,必须是古树的黄片。

황편의 맛은 쓰지도 떫지도 않으며 향은 독특하다. 게다가 여린 잎으로 만든 생차처럼 위를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런 이유로) 고차수의 황편은 당해 연도에도 맛이 있지만 오래될수록 더욱 향기롭고 진해지는 특징이 있다. 특히 오래된 황편은 더욱 매력적인데, 반드시 고차수의 황편이라야 한다.

如今在茶圈子里所讲的“老黄片”,有一种说法是:上世纪80年代中期,古镇易武也与版纳的其他茶山一样,贯彻执行上级的文件精神:改造低产茶园,栽种高产优良茶种茶树。一夜之间,许多百年以上树龄的古茶树惨遭砍伐,茶农们把砍伐倒的茶树上稍嫩点的老叶采回家里,制作成当地人爱喝的粗毛茶——老帕卡,也就是今天令人称道的大老黄片茶。另外的一种说法更为贴近现实:老黄片并非某几座茶山专有,但凡茶区,茶农们采摘茶叶后,在杀青和筛捡时会将一部分看样不好的叶片捡出来,而在进入揉捻工序时,嫩的芽叶会卷成条索,有些稍老的卷不起来,仍然是伸展的一大片,这就是现在通常所说的“老黄片”了。

오늘날 차 업계에서 말하는 “노황편”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지난 1980년대 중기 옛 이무(易武) 또한 판납(版纳)의 여러 차산과 마찬가지로 상부기관의 지시로 생산량이 적은 다원을 개조하여 생산량이 높은 우량의 차나무를 심었다. 하룻밤 사이에 수령이 백 년 이상의 수많은 고차수가 참혹하게 베어졌다. 차농들은 베어진 차나무의 조금 여린 노엽을 따서 돌아와 현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粗毛茶(=老帕卡; 오늘날 사람들이 노황편차라고 말하는 것)를 만들었다. 또 다른 설이 있는데, 이것이 더 현실적이다. 노황편은 몇몇 특정 차산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차구에서 차농들이 채엽을 한 다음 살청하고 체로 거르는 과정에서 보기에 좋지 않은 찻잎이 발견되고, 유념할 때 여린 잎은 잘 말리는데 반해 조금 늙은 잎은 잘 말리지 않아 여전히 크게 펼쳐져 있는데, 이것을 통상 “노황편”이라고 한다.

 

按照以上的两种说法,老黄片一般都不是被主动采摘下来的,因此要喝到成规模、有产量及品质保证的老黄片还真是不容易。

이상의 두 가지 설에 의하면 노황편은 굳이 일부러 채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규모와 생산량, 품질이 보증된 노황편을 마시기란 정말 쉽지 않다.

 

老黄片口感不苦不涩,香味独特,而且不像嫩叶生茶那么伤胃。所以,老黄片无须陈放,在当年就可以痛痛快快地喝,就我喝过的几款不同年份的老黄片来讲,它也具有越陈越香醇的品质特征。当然有个前题,必须是足够树龄的老黄片。

노황편의 맛은 쓰지도 떫지도 않고 향은 독특하면서도 여린 잎의 생차처럼 위를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노황편은 굳이 장식할 필요도 없이 그 해에 시원시원하게 마시면 된다. 내가 마셔본 몇 가지 생산연도가 다른 노황편으로 말하자면, 오래된 것일수록 향기롭고 깨끗하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그것은 반드시 수령이 오래된 노황편이라는 전제가 따른다.

 

如果有一天,你喝到一款没有条索,叶面黄绿各色都有,但汤色却橙黄显亮,口感细腻顺滑,特有的香味从第一泡延续至十五、六泡才渐渐弱下去的普洱茶,那么恭喜你,你尝到的绝对是很好的老黄片。这就是真正的幸福了。

만약 어느 날 당신이 条索이 없고 잎 표면이 황록색이며 탕색은 맑은 등황색이고, 맛은 섬세하고 순하고 매끄러우며, 특별한 향이 처음 우릴 때부터 열대여섯 번 우릴 때까지 지속되다가 점점 약해지는 보이차를 마시게 된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정말 좋은 노황편을 맛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이상이 중국 바이두백과(百度百科)에 실린 보이차노황편(普洱茶老黄片)입니다.

아직 차맛에 대한 충분한 변별력을 가지지 못한 분들 중에서 중국측 상인들의 이야기를 절대 신봉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에서 보듯 문화는 그 문화를 수용하는 측의 풍토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굳건한 문화적 바탕 위에서 ‘외래문화의 주체적으로 수용할 때에 그 것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 더 차원 높은 문화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가 해골물에서 깨달음을 얻어 중도에 유학을 포기했지만 당나라 유학을 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어 불교의 대중화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근거없는 국수주의(國粹主義)와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극복은 ‘차국토(차국토)’를 만들기 위한 초석입니다.

이 땅의 차문화 발전을 위해 지나친 국수주의(國粹主義)도 경계해야할 대상이지만 세심하지 못한 사대주의(事大主義)도 분명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출처 : 공감신문(http://www.gokorea.kr)



출처 : 공감신문(http://www.gokorea.kr)

 

 

  •  승인 2016.03.22 14:21▲ 남곡 김중경

농가의 잎을 수매하여 만든 어떤 [고수차]의 엽저를 분석해 본 뒤 [2014년 天下元茶-易武正山 괄풍채 고수차]의 엽저 비교를 통해 진정한 고수차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떤 차]를 우린 뒤 엽저를 쏟아 놓은 모습입니다. 한 눈에도 각기 다른 태생, 각기 다른 가공 방법에 의해 가공한, 다양한  차청들이 뒤섞여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형별로 일부를 추려내어 찍은 사진인데, 번호 순서와 상관 없이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1), 4) 그 중에서도 가장 정상적으로 가공된 잎입니다.

6))채엽 후 잎 속의 산화 효소가 작동되기 전에 살청을 빨리해야 산화효소의 활성을 막아 후발효에 좋은 원료를 확보할 수 있는데, 살청이 지체 돼 산화가 진행된 찻잎입니다. 앞으로 후발효에 도움이 안 되는 놈입니다.

2)위조(시들리기)과정에서 한꺼번에 너무 많이 겹치게 널거나 혹 시간을 너무 길게 놓으면 찻잎이 떠서 상하게 됩니다. 요론 놈은 시간이 가도 차품이 좋아지지 않고 차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데만 한 몫 하게 되지요.

5)보이차는 녹차류와 달리 후발효를 위해 저온 살청을 합니다. 그래서 살청을 하는 데는 숙련된 기술자뿐 아니라 찻잎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열된 솥에 물을 뿌리거나 젖은 수건 등으로 닦아가면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각 농가마다 열악한 환경에서 개념 없이 만들다 보면 그림처럼 태워먹기 일쑤죠. 이런 잎들은 후발효를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를 우렸을 때 심한 연미(탄 냄새)의 원인이 되어 차품을 떨어뜨리게 되죠.

3)번, 5)번과 동일한 원인에서 빌생된 잎들이라 역시 후발효엔 어울리지  않는 잎들입니다.   

이제 고수차인 [2014년천하원차]의 엽저 사진입니다.

1)일단 한 지역의 고차수에서 채엽을 했기 때문에 잘라낸 줄기의 마디가 일정합니다.  

2)나무의 생육 조건이 좋아 풍부한 영양 공급으로 인해 엽맥이 뚜렷하고 잎이 두껍습니다. 

3)시솽반나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살청 기술자를 산지에 직접 초빙하여 한 달 반 가량 숙식을 함께 하여 채엽 즉시 위조-살청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고온 살청으로 인한 폐해가 전혀 없습니다.

이후 유념-쇄청-증압성형-말리기까지 가장 교과서적인 제작을 한 과정이 엽저에 100% 반영돼 나옵니다.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사항만 체크해 보아도 교목차를 구입하면서 불필요한 대가를 치루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보이차 본래의 맛과 향이 잘 보전된 고수차는 신뢰가 높은 판매점에서 구입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