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순호의 설립연대에 대한 두가지의 상이한 설과 관련된 자료
1.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유래 (1839년설)
청조(清朝) 도광(道光) 연간,"차마고도(茶马古道)"의 발원지인 이무고진(易武古镇)에서 현 차씨(车氏) 집안
의 원조인 차순래(车顺来)가 "차순호차장(车顺号茶庄)"을 설립하여, 자체 보유 차산(茶山)에서 채엽한 고품질의 대엽종(大叶种) 생태(生态) 다엽(茶叶)으로 여아차(女儿茶), 인두금과차(人头金瓜茶), 사건긴녕권차(纱
巾紧拧拳茶), 반구형타차(半*形沱茶), 칠자원병차(七子圆饼茶), 향죽긴압차(香竹紧压茶) 등의 제품을 수공
으로 제작하여 서장(西藏: 티벳), 신강(新疆), 항오대(港澳台: 홍콩/마카오/대만) 및 남양(南洋: 동남아시아)
각지로 판매하여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객상(客商)들로부터 아주 큰 관심을 끌었다.
1837년 차순래(车顺来)는 향시(乡试), 회시(会试)에 참가하여 공생(贡生: 과거제도 하에서 부(府), 주(州), 현
(縣)의 생원(秀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자격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경성(京城)의 국자감에서 공부하도록 한 자들을 지칭하거나 달리 거인(擧人)의 부방(副榜)[명청(明淸) 시대의 제도로,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거인(擧人)의 인원수에 제한이 있어 거인의 자격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에 해당함)이라는 학위(学位)를 취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 자신이(车顺号茶庄) 직접 만든 차를 조정(朝廷)에 바쳤는데 도광제(道光帝)가 이를 맛본 후 아주 흡족해 하며 이 차는 "맑고도 순수하며 (汤清醇), 맛이 두텁고도 진하며(味厚酽), 감칠 맛이 오래가고(回甘久), 가슴 속을 평안하게 해 주니(清心脾), 이야말로 좋은 차로다(乃铭中之瑞品也)!"라고 하며 연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넉자를 써 주면서 이무차순호차장(易武车顺号茶庄)을 칭찬하고
또한 차순래(车顺来)에게 "예공진사(例贡进士)"라는 품계와 직위(品位)를 내려주었다.
황제의 명으로 품위(品位)를 받게 된 차순래(车顺来)가 두품정재(头品顶戴:청조 때 관(冠)에 주옥(朱玉)을 달
아 관직을 구별하였는데 이 관을 머리에 쓴 모습)하고 운남으로 돌아 와 황제의 명을 알리니, 운남 포정사(云南布政使: 포정사는 청조의 관제에서 종2품의 관직임)) 첩용(捷勇) 파도로(巴图鲁 : 청나라 때 무공이 있는 관원에게 내린 칭호로 간칭으로 巴图라고도 하는데 대략 용사(勇士)의 의미를 가짐. 巴图鲁 칭호를 가진 사람은 흔히 그 호칭 앞에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해 振勇, 勃勇, 克图托 등의 개사(介詞)를 붙였음)는 길이 7척3촌2분, 폭 1척8촌, 두께 1척5분 치수에 황금으로 글자를 입힌 "서공천조(瑞贡天朝)" 편액(金字大匾)을 만들도록 하였다.
예공진사(例贡进士) 차순래(车顺来)는 정중한 현판식을 거행하여 이 금편(金匾)을 대문 위에 걸고 등롱과 비단 띄를 매단 후 일주일 동안 주야로 잔치를 벌였는데, 이로써 이무차(易武茶)는 영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 현판 또한 운남 보이차 최고의 영예로 되었다.
이 후 수십년 동안 차순래(车顺来)는 황제의 뜻을 충실히 따라 해마다 자신이 만든 차를 경성(京城)에 공납(瑞贡)하였는데 이로 인해 차순호(车顺号)의 차들은 청 조정 및 황족(皇亲国戚)에게 있어 없으면 안될 어용음료(御用饮品)로 되었으며 또한 국내외적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서공천조(瑞贡天朝)" 편액(宝匾)의 유래는 사적(史籍) 정본(正本)에 의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 편액(宝匾)의 후계자(传人)나 가족들의 기록이나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이 편액(宝匾)은 당시 운남포정사사(云南布政使司)의 포정사(布政使)로 있던 첩용 파도
로((捷勇巴图) 상사(尚史)가 청궁(清宫)의 황족(皇亲国戚) 고관(达官) 귀인(贵人)들이 모두 보이차(普洱茶)
를 아주 즐기고, 도광(道光) 황제가 의방(倚邦)과 이무(易武)에서 온 공차(贡茶)를 마신 후 아주 기뻐하며 칭찬한 후 흥이 나서 바로 이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글귀를 친히 족자(条幅)에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운남순부(云南巡府)에서는 같은 족자 3폭(幅) (4폭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되어 있지 않음)을 하사해 주도록 조정에 주청하여 당시 보이부(普洱府) 관원(官员)의 보이공차(普洱贡茶) 구입(采办)에 책임을 지고 협조한 예공진사(例贡进士) 차순래(车顺来), 열공진사(列贡进士) 명예좌랑(修职佐朗) "안락호(安乐号)"차장(茶庄) 장주(庄主) 이개기(李开基), 그리고 달리 의방산(倚邦山) 두령(头目) 한 사람 도합 3인에게 이 족자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하사받은 족자를 받아든 후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당지 최고의 명장에게 의뢰하여 족자의 글을 녹나무 횡편(楠木横匾)에 새겨 넣어 대대로 대청 위에 걸어 놓고 성은에 감사하였다.
이무 고차산(易武古茶山) 또한 이로 인해 "공차지향(贡茶之乡)"이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차순래(车顺来)는 성은(圣恩)에 감사하며 바로 "차순호(车顺号)" 차장(茶庄)을 열어, 공차(贡茶) 구입(采办)과 제다(制茶)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차순래(车顺来)의 후인(后人)들은 이 편액을 아주 아끼고 잘 보호하여 몇년에 한번씩 금분(金粉)을 다시 발라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편액(宝匾)은 비단 "차순호(车顺号)"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이무 보이차(易武普洱茶)의 빛나는 역사와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서공천조(瑞贡天朝)"는 가장 좋은 찻잎(茶叶)을 써서, 극상품의 차를 만듦으로써, 이 상서로운 물품(祥瑞之物)을 조정에 공물로 봉납한다는 뜻이다. 중국(我国)에서는 고대(古代)로부터 고관(达官), 귀인(贵人), 문인(文
人), 묵객(墨客)들은 항상 찻잎(茶叶)을 서초(瑞草)라 칭송해 왔는데, 당(唐)나라 때 두목(杜牧)이 지은 시(诗)
중에는 "차는 좋은 풀 중의 으뜸으로 친다(茶称瑞草魁)"는 구절(诗句)이 나오기도 한다.
현판은 大匾系用楠木雕刻, 길이 약 2m, 폭 약 70cm, 두께 약 15cm(미실측)의 녹나무(楠木)에 조각하여 사용
하였다. 현판(匾)의 중앙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의 "서공천조(瑞贡天朝)" 네 글자를 써 넣었는데, 필적(笔迹)이 호방하고 힘이 있다 ;
현판(牌匾) 오른 쪽에는 "钦命头品顶戴云南等处承宣布政使司布政使捷勇巴图尚史为(황제로부터 두품정
재라는 명을 받은 바 이를 운남 등지에 포고한 포정사사 포정사 첩용파도로 상사가 씀)"라는 문구가 편형(扁形:가로 폭이 세로 폭에 비해 넓은 형상)의 송체자(宋体字样)로 새겨져 있으며, 현판(牌匾) 왼쪽의 낙관(落款)에는 세로로 "예공진사 차순래 세움(例贡进土车顺来立)"이라는 글을 해서(正楷) 소자로 적어 놓았는데, 때는 청(清) 도광(道光) 18년(서기 1839년)이었다.
청조(清朝) 도광(道光) 연간에 설립된 이무차순호(易武车顺号)는 근 200년의 역사를 가진 어용공차(御用贡
茶) 노자호(老字号)로, 차씨 집안의 세조(世祖) 차순래(车顺来)가 자신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自家全手工制
作生产) 다엽(茶叶) 제품을 황제가 사는 궁으로 올려보내는 중 구감(口感)상 그 맛과 향이 깨끗하고 진하게(香醇) 되었는데, 도광(道光) 황제가 이를 마셔보고 크게 기뻐하여(龙心大悦) "차(汤)가 청순하고(清纯), 맛이 두텁고 진하며(味厚酽), 회감이 오래 지속되어(回甘久), 이야말로 차중의 서품이로다(乃茗中之瑞品也)"라고 하며 연이어 칭찬하고는, 즉시 두품정재하고 운남으로 가운남 포정사사의 포정사(云南布政使司布政使) 첩용파도로(捷勇巴图鲁) 상사(史)의 감독 하에 길이 7척3촌2분, 폭 1척8촌, 두께 1촌5분의 나무판에 황금색의 "서공천조(瑞贡天朝)" 네 글자를 커다랗게 쓴 현판을 만들어 이를 "이무차순호(易武车顺号)"에 하사하도록 하고, 동시에 차순래(车顺来)에게 매년 규정에 따라 자신이 생산한 차 제품을 진공(进贡)하도록 명하였다.
차순호(车顺号)가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운남 보이차(云南普洱茶)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되면서, 보이
차(普洱茶)는 청조(清朝) 시기에 황족들이 서로 선물하는 고급 예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고 , 그 후 수많은 국가적 외교사절들에게도 선물로 주어졌다. "서공천조(瑞贡天朝)" 현판은 중국 다엽사(茶叶史)에 있어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현재 온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편액으로서, 이는 운남 보이차(云南普洱茶)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는데 있어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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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유래 (1894년설)
예공진사 차순래의 차순호 다장은 이무정산 칠자병차를 공경하여 광서 20년(1894)에 '서공 천조' 편액을 받았다. 그래서 이무는 '공차의 고장'으로 불린다.
보이차가 대량으로 경성 즉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성의 궁정 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보이부지(普洱府志)》중에는 "보이차의 이름이 온 수도에 다 알려져 있으며 모든 경성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3. 易武茶对普洱茶的影响及其发展初探
"이무차가 보이차에 미치는 영향과 그 발전에 대한 탐구" 이사정(李师程). 오진(吴进)
중국의 차문화는 그 역사가 유구하고 차엽의 품종 또한 아주 다양하다. 다른 수많은 명차와 같이 보이차도 오랜 경쟁 과정 중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차류(茶類)로 되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있으며, 청조의 <신전운남통지(新篆云南通志)> 중에는 "보이(普洱)라는 이름은 중국차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안휘(安徽)나 민절(闽浙:복건성 및 절강성 지역)에 비할 수 없다"고 하는 글이 보이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보이차 발전사에 대한 내외전문가 및 학자들의 심도있는 연구 중 운남의 소수민족들이 찻잎을 음료로 만든 것이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남이 세계적으로 차나무의 원산지이자, 난창강 유역의 사모(思茅: 현 普洱), 서쌍판납 등 지역은 차나무 기원의 중심지로서 운남이 차의 고향임을 확인하고 있다.
운남산 차의 역사는 한말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청조(清朝) 도광(道光)년간에 편찬된 <보이부지(普洱府志)> 중에는 이 지역의 차나무를 "무후유종(武侯遗种)"이라 하여, 촉한 건흥 3년(서기 225년) 제갈공명이 남중(南中) 평정시 차업(茶業)을 번창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780년 전의 일이다.
정식으로 문헌상에 기록된 내용 중 가장 이른 것은 당조(唐朝) 함통5년(864년) 번작(樊绰)이 지은 <만서(蛮
书)> 제7권에 "(이 곳의) 차는 은생성(银生城) 경내의 여러 산악 지대에서 나오는데 (찻잎을) 흩어져서 수거해오나 차엽의 채취와 차를 제조하는 방식에 어떤 법도는 없다(茶出银生城界诸山,散收无采造法)"고 기록하고 있다.
* 은생(银生) : 중국 서남부 변방에 있는 무량(无量) 및 애뢰(哀牢) 양산맥의 서북방에서 동남방으로 난창강(澜沧江)과 원강(元江)의 한 지류인 예사강(礼社江)을 따라 마치 한쌍의 거대한 푸른 용이 웅크리고 있는듯 조심스레 몸을 감추고 있는 이 지역 중의 한 산간에 있는 고성(古城). 은생성(银生城)은 당조 초기 남조국(南诏国) "은생절도(银生节度)"의 부치소(府治所) 소재지였다. 당시 남조국에 있던 7 절도(节度) 중 은생절도(银生节度)가 관장하는 지역이 가장 넓었으며, 그 관할구 내에 현 임창시(临沧市)의 대부분 지역과 보이(普洱), 서쌍판납주 전역 및 태국(泰国)의 경매(景迈) 지역, 라오스의 풍사리(丰沙里), 월남의 내주(莱州) 및 미얀마의 경동(景栋)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이차(普洱茶) 생산이 명확히 기재된 문헌은 명조(明朝) 만력(万历) 47년(1619년) 지방지리학자(方志学
家) 사조석(谢肇浙)이 편찬한 <전략(滇略)>으로,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모두 보차(普茶)를 마신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의 보차(普茶)란 곧 보이차(普洱茶)이다. 보이차(普洱茶)라는 이름은 명말(明末) 방이지(方以智)의 <
물리소식(物理小识)>에 "보이차는 증기로 쪄서 경단 모양으로 만들어 티벳(西番)으로 보내진다"라는 기록에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청(清)나라 때에는 1799년에 단췌(檀萃)가 쓴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에는 "티벳에서 음용하고 있는 보차(普茶)는 당(唐)나라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차"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사료(史料)들로부터, 원래 고대에 만들어져서 한(汉)나라 때 이미 널리 보급되었고 명(明)나라 때에 그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청(清)나라 시기에 극성기를 맞았던 보이차(普洱茶)는 보이(普茶)에서 그 차엽(茶叶)이 집산(集散)되고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원산지는 육대차산이라는 역사를 가진명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보이차의 전통을 널리 알리고 이무차가 다시 빛나는 이름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통적인 보이차의 원산지인 육대차산의 으뜸인 이무 지역에서 나온 이무차가 보이차 및 그 발전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보이차(普洱茶) 발전사에서 이무차(易武茶)가 가지는 특수한 지위
(1) 이무(易武)는 보이차의 고향이다.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의 기록에 의하면; "보차(普茶)라는 이름
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며.... 여섯 곳의 차산이 소속되어 있는 보이(普洱)에서 산출되는데, 이 육차산이란 첫번 째가 유락(攸乐), 두번째가 혁등(革登), 세번째가 의방(倚邦), 네번째가 망지(莽枝), 다섯번째가 만단(蛮端), 여섯번째가 만살(曼撒)로서, 그 주위가 팔백리에 이르고 산에 올라가 차를 만드는 이의 수가 수십만명에 이르며...
(2) 이무차산은 그 면적과 생산량이 모두 육차산 중 으뜸이다.
(3) 이무(易武)는 보이공차(普洱贡茶)의 고향이다. 이무는 차로 인해 흥성하였으며,
청조(淸朝) 옹정(雍正) 2년(1724년) 이무(易武)에 몰려드는 차상(茶商)과 공인(工匠)이 수십만에 이르러 "산
마다 다원이 있고 어디든 인가가 있다(山山有茶园,处处有人家)"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되어 이런저런 문제가 끊이지 않자 청조(淸朝)에서는 "외지 상인이 입산하여 차 만드는 행위를 엄히 금함(严禁客商入山作茶)"이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옹정(雍正) 13년(1735년) 에는 "차인(茶引)"제도 - 차상이 관청으로부터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차업을 영위하도록 한 제도 -에 의해 차를 구매하도록 함으로써 차상(茶商)이 다시 들어오게 되고, 주로 원병차(또는 원보차(园宝茶)라고도 부름)를 생산하였는데, 7병(饼)을 1통으로 판매하였으므로 "칠자병차" 또는 "칠자보차"라고 하였으며, 이를 대량으로 보이(普洱)로 운송하여 이 곳에서 중개 판매하였다.
보이에서 차엽 무역을 관리하는 관리(官吏)들은 보이차를 궁정으로 헌상하였는데 황궁의 환심을 얻기 위해 공품(贡品)을 따로이 분류하였다. <보이부지(普洱府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청 건륭(乾隆)9년(1744年) 보이차는 궁정에서 <공차안책(贡茶案册)>에 정식으로 등재되었으며, 공차 품종으로는 "아엽(芽叶), 단차(团茶)"로 하도록 규정되었고, 보이부(普洱府)는 매년 공차 구입용 특별 계정에서 그 비용을 지불한다.
보이공차는 선통(宣统)3년(1911년)까지 167년간 황실에 납품되었다. 공차의 차엽은 초기에는 육대차산에서 채엽하였으나 점차 이무차산에서 주로 채엽하게 되었고, 그 가공 또한 초기에는 사모청(思茅厅)에서 전용으로 설치한 "차점(茶店)"에서 하였으나 차츰 차상이 설립하고 관부에서 감독하는 차장(茶庄)이 주로 담당하게 되어, 공차를 가공하는 차장은, 이무(易武) 차상 이개기(李开基)의 "안락(安乐)"호 차장이나 차순래(车顺来)의 "차순(车顺)"호 차장 등과 같이, 일시에 커다란 명성을 얻었는데, 황실에 헌납해 올린 "이무정산칠자병차"가 광서(光绪)20년(1894)에 황제로부터 친히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이개기(李开基), 차순래(车顺来)는 황제로부터 "예공진사(例贡进士)"라는 품직에 봉해졌는데 그 중 이개기(李开基)는 이부(吏部) 칙명으로 수직좌랑(修职佐郎)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무(易武)는 공차지향(贡茶之乡)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보이차가 대량으로 경성 즉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성의 궁정 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보이부지(普洱府志)》중에는 "보이차의 이름이 온 수도에 다 알려져 있으며 모든 경성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2. 이무차(易武茶)는 현재 전통보이차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차이다.
개혁개방의 빛나는 성과에 의해 보이차는 홍콩, 대만, 광동 등의 지역은 물론 한국, 일본, 싱가폴 등 동남아 국가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음용 및 수장자가 추지약무(趋之若骛: 수많은 오리떼가 한번에 날아오르는 양상)의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보이차에 대한 시장에서의 논의가 분분한 실정으로, 이를테면 보이녹차, 보이홍차 등등을 법규로 정하고 있어 업계 내의 인사들도 심히 난처한 실정이다.
보이차(普洱茶)란 무었인가? 2002년 6원 서쌍판납에서 개최된 '보이차 국제학술 연토회' 상에서 내외의 전문가및 학자들은 보이차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즉, 보이차(普洱茶)란 운남 난창강 유역의 차나무 원산지에서 산출되는 역사적 명차로서, 운남대엽종 차수(茶树)의 선엽(鲜叶)으로 만든 쇄청모차(晒青毛茶)를 완만하게 자연발효시키거나 또는 인공적으로 속성 후발효시켜 만든 특정한 종류의 차류(茶类)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보이차는 복제할 수 없는 지역적인 명차로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보이차를 만듦에 있어 중요한 원산지를 가지고 있는 이무차(易武茶)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통보이차의 특색을 보유 견지하고 있으며 보이차 애호가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2004년 4월 맹랍현(勐腊县)에서는 이무(易武), 의방(倚邦), 만쇄(曼洒), 만장(曼庄), 혁등(革登) 등의 고차
산 탐방을 위해 운남성 내외의 차업 전문가 및 학자 10여인을 초청하였다.
실지 답사 후의 보고에 의하면, 맹랍현(勐腊县) 경내의 5대 고차산은 그 실태가 모두 서로 달라, 혁등(革登) 차산은 모두 경작지로 바뀌어 이미 차나무를 찾아볼 수 없고, 의방(倚邦)과 만쇄(曼洒) 차산은 비록 차산 전체에 잔여 차수(茶树)가 일부 남아있으나 대부분이 6~700묘 정도의 소규모 차수림(茶树林)에 차나무는 단 몇 주 정도 밖에 없을 정도로 차나무가 희소하고 차나무의 수세(树势:성장도) 또한 쇠약한 실정이다.
한편 만장(曼庄) 차산의 차수는 그 성장도가 비교적 양호하고 밀도 또한 비교적 높으며(매묘당 약 100주) 면적 또한 현재 1000여묘 정도 된다. 위 4대 차산의 고다원(古茶园)은 모두 3200묘 정도로 연산 16톤 정도의 차를 생산할 수있다.
이에 비해 이무(易武) 차산에는 7000여묘(만랍(曼腊) 1000묘 포함)의 고다원(古茶园)이 있으며 연 90톤의 차
를 생산할 수 있어 고다원(古茶园)의 면적 및 그 생산량이 여타 4대 차산 총합의 수배에 달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무(易武)야말로 명백히 전통보이차의 생산 기지라 할 것이다.
현재 이무에는 칠자병차를 개별적으로 제조하는 차방(茶坊)이 30여곳 정도 있으나 대부분이 쇄청모차를 만들어 산차(散茶) 형태로 외지 차상(茶商)이 구입해 가므로 차농(茶农)의 수입 및 지방세 상의 손실이 매우 크고, 차산업이 회복 중이나 그 발전 속도는 완만하고 해내외(海内外)에 떨치고 있는 보이차의 고향이라는 평판에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 소개:
이사정(李师程) : 이무 차산의 차엽세가(茶叶世家) 출신으로, 그 증조부 이개기(李开基)는 "안락(安乐)"호 차
장(茶庄)을 열어 헌차입공(献茶入贡)시 "서공천조(瑞贡天朝)" 금편을 하사받았으며 광서제(光绪帝)로부터
"예공진사(例贡进士)"의 관직에 봉해지고 이부(吏部)에서 "수직좌랑(修职佐郎)"에 임명되었다. 이사정은 어릴 때부터 차산문화(茶山文化)에 대한 훈도(熏陶)를 받아왔으며, 차문화 연구와 차산업 발전에 진력해 오고 있다.
중국공산당 곤명(昆明)시위원회 부서기, 중국공산당 사모(思茅)지역위원회 서기, 중국공산당 운남성위원회 당교(党校) 상무부교장 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차엽문화절(茶叶文化节)의 창설자이다. "보이차엽절(普洱茶叶
节)"은 그가 사모(思茅)지역위원회 서기 재직시 주관한 행사였다. 현재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协) 운남성위원회상임위원, 운남성 정협 문사위원회(文史委员会) 주임, 중국공산당 운남성위원회 당교(党校) 운남행정학원 교수직을 맡아 있다. 또한 곤명민족차문화촉진회 명예이사장 직도 겸하고 있다.
오진(吴进) : 현 운남성 정협 문사위원회 판공실 부주임
운남이무정산다엽유한공사(云南易武正山茶叶有限公司)는 2006년에 성립되었으며, 운남성기술질량감독국
의 관심과 지도하에 운남민족차문화연구회 주관으로 20여 이무고진(易武古镇)의 차창, 차장 등 28개소가 주주로 공동발기하여 설립된 차장연합체이다.
공사(公司)는 성과 신을 근본으로 하고(诚信为本), 품질을 첫째 목표로 하여(质量第一), 차문화를 전파하여(传播文化) 대중에 서비스하고(服务大众), 조화로운 발전(和谐发展)을 경영이념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