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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00건

  1. 2020.03.03 차 좀벌레(⾐⿂蟲)
  2. 2020.03.03 보이차와 곰팡이
  3. 2020.03.03 보이차의 원료
  4. 2020.03.03 차화석 제조 과정
  5. 2020.03.01 활죽양자, 포랑산, 남나산 고수차 1
  6. 2020.03.01 진순아호(眞淳雅號)
  7. 2020.03.01 차순호 2
  8. 2020.03.01 차순호(⾞順號)1 1
  9. 2020.03.01 충시차(蟲屎茶)란?
  10. 2020.03.01 육보차(六堡茶) 흑차

차 좀벌레(⾐⿂蟲)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3. 21:38 Posted by 거목

어제에 이어 벌레 특집입니다.
어제는 다원에서 발생하는 벌레였다면 오늘 살펴볼 벌레는 완성된 제품에서 볼 수 있는 유형입니다.


래된 보이차의 포장을 보면 여기저기 헤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종이가 삭은 것처럼 보여서 일부 상인들은 보이차가 오래되어서 종이가 삭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이가 삭은 보이차야말로 건강한 보이차라고도 말합니다.ㅎㅎㅎ
물론 근거 없는 말입니다.
보이차 포장지에 구멍이 뚫린 것은 삭은 것이 아니라 좀벌레가 먹은 흔적입니다.
옷장, 책장에 서식하는 그 좀벌레 맞습니다.
주로 고온 다습하고 통풍이 안 되는 환경에서 잘 발생합니다.
보이차도 마찬가지로 위와 같은 환경에서 보관되면 쉽게 발생합니다.
2, 3년 내로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포장지, 내비, 대표 등 종이로 된 것은 다 갉아먹습니다.

색깔은 은빛을 띄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만 상인들은 좀벌레라고 부르기 보다 은어(銀魚)라고 부릅니다.
좀벌레는 뭔가 안 좋아 보이지만 은어라고 하면 신비스러워 보입니다.
노차 상술은 대만 사람들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좀벌레는 건조하고 통풍이 잘 되는 환경에서는 번식하지 못합니다.
종이 포장지, 내비에 구멍이 숭숭 뚫린 보이차를 들여왔다고 해도 건조한 환경과
통풍만 잘 시켜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아, 그리고 용주차는 좀벌레 똥이 아닙니다.
그건 다른 벌레 똥입니다.
좀벌레는 오로지 종이만 먹습니다.
차는 안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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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와 곰팡이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3. 21:00 Posted by 거목

다시 곰팡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보이차를 해괴하다가 파란색 곰팡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마셔도 되는지 불안해서 판매처에 문의를 하니
'푸른 곰팡이는 안전하다. 페니실린이 있지 않은가!'라고 했답니다.

푸른 곰팡이의 종류는 150여 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페니실린을 만드는 곰팡이는 두 종류인가.. 그럴 겁니다.
페니실린도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정제 과정을 거쳐서 얻고요,
페니실린을 만드는 곰팡이도 정제를 거치치 않고 그냥 먹었을 때
안전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이차에 피는 곰팡이가 무서운 것이 이런 점입니다.
어떤 곰팡이가 안전한지 육안으로는 확인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노란색 곰팡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이로운 금화인지, 해로운 Aspergillus flavus 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전차에 있는 금화(관돌산낭균)은 가공 과정에서 일부러 만드는 유익한 곰팡이입니다.
유익한 곰팡이가 발생하도록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고 관리를 철저하게 합니다.
보이차 보관 과정 중에서도 온도, 습도, 환경이 맞는다면 금화가 발생할 수 있지만,
피어 있는 곰팡이가 금화인지 육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지요.

가장 명료하게 생각한다면 보이차를 식품으로 보면 됩니다.
된장에 곰팡이가 피면 곰팡이는 덜어내고 멀쩡한 부분만 먹습니다.
식빵에 푸른 곰팡이가 피면 그냥 버립니다.
곰팡이 핀 부분만 버리고 드시는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귤껍질에 푸른 곰팡이가 피어도 어지간하면 버리지요.
반대로 안전한 곰팡이도 있습니다.
블루치즈의 곰팡이는 제조 과정에서 안전한 곰팡이를 넣어서 만듭니다.
마치 복전차의 금화를 만드는 것처럼 제조 과정 중에서 발생하는 안전한 곰팡이입니다.
통제가 가능한 환경에서 몸에 이로운 곰팡이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오래된 보이차를 신선이 마시는 영약이 아닌 그냥 식품, 음료로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보이차는 식품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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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의 원료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3. 20:51 Posted by 거목

어떤 분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국내 한 대학의 교수님이 보이생차는 고급 고차수로 만들고 숙차는 싸구려 대지차로 만드는 것이라고 글을 썼는데
맞는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생차도 저렴한 대지차로 만드는 제품이 많고 보이숙차 중에서는 고수차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올해 보이차를 만드는 원료인 쇄청모차의 거래 가격을 보면 가장 저렴한 차는 1kg에 20~25위안 사이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면 4000원 정도 하겠습니다. 물론 품질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원료는 생차로도 제작되고 숙차로도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노반장 순료로, 물론 고차수, 봄철 순료는 아닙니다만 노반장 지역의 모차로 만든 숙차도 있습니다.
올해 봄 맹해에 있는 중소 차창에서 만든 노반장 숙차 맛을 봤습니다만 아주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차창의 사장은 1kg에 8000위안을 받아야 본전이 된다고 하던데요,
발효할 때 미생물이 먹어치우는 양이 전체의 15% 정도 차지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병차로 제작하여 판매한다면 한 편에 8000위안 정도 가격이 된다고 합니다. 원료가 비싸서 완제품 가격도 비싸겠지요.
그 차창 사장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대익에서 만든 7572가 훨씬 맛이 좋았습니다.
물론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ㅎㅎ


가공 기술은 생차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생차의 가공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원칙을 지켜서 균일한 살청, 균일한 유념, 쇄청만 잘 지켜준다면 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생차의 품질은 원료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숙차는 다릅니다.
45~60일 동안 악퇴를 통해 차를 발효시킵니다. 발생하는 미생물의 종류와 수량을 잘 통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숙차의 핵심은 원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발효 기술에서 결정됩니다.
원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늦봄, 가을, 여름철의 소수차, 대지차로 만듭니다만
발효 기술만 좋다면 충분히 좋은 품질의 숙차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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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화석 제조 과정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3. 20:42 Posted by 거목

차화석은 도대체 어떤 가공을 거쳐 만드는지 궁금했는데요, 마침 관련된 논문을 하나 찾았습니다.
친절하게도 어떤 가공 과정을 거쳐 만드는지 자세하게 나왔습니다.
물론 과정을 알려줘도 쉽게 만들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 차화석 만드는 과정을 보겠습니다.
논문에서는 총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뭔가 복잡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랬는지 쇄청모차 제조과정까지
가공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차 제조과정은 모두 아는 방법이니 넘어가고요, 논문에서는 3단계 까지가 쇄청모차 제조과정입니다.
4단계는 발효입니다.
발효는 총 세 가지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첫 번째는 경발효입니다.
모차를 발효틀에 쌓아두고 발효를 진행합니다. 이때 일반적인 물이 아닌 ‘발효액’을 뿌린다고 합니다.
당연하겠지만 발효액의 성분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예측해본다면 섬유소를 분해하는 미생물, 혹은 섬유소분해효소일 가능성이 큽니다.
일정 수준까지 발효가 되면 뒤집어주는 번퇴를 해주고요, 경발효가 완료되면 작은 크기로 긴압을 해줍니다.
차화석의 긴압도를 보면 알겠지만 매우 강한 압력으로 긴압을 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긴압 후에 건조를 해줍니다.


두 번째 발효는 정형 성숙 발효입니다.
건조를 마친 작게 긴압한 차에 다시 발효액을 골고루 뿌려준 후 전용 발효틀에 놓고 발효를 진행합니다.
역시 단계별로 뒤집어 줘서 발효가 골고루 되게끔 해줍니다.


세 번째는 잡냄새 제거 발효입니다.
이 과정이 매우 긴데요, 약 5~6개월 정도 걸립니다. 1차, 2차 발효를 끝낸 단단하게 긴압된 차를 저온, 저습의 환경에서 발효를 시킵니다.
발효 속도는 매우 느려지지만 잡냄새가 제거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마치 입창차의 퇴창과 비슷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5단계는 골라내기입니다.

상태를 보고 부적합한 제품은 골라냅니다.


6단계는 다듬기입니다.
그라인더와 비슷한 기계로 갈아줍니다. 차화석의 작고 매끈한 외형은 여기에서 만들어집니다.


7단계는 먼지 제거입니다.
그라인더로 갈아낸 차화석에는 먼지라기보다는 차가루가 묻어 있습니다.
고온의 증기로 한 번 쪄내서 차가루와 먼지를 없애줍니다. 이때 수분이 소폭 증가합니다.


8단계는 건조입니다.

수증기로 쪄낸 차를 건조해줍니다. 반드시 저온으로 건조를 해줘야 한다고 합니다.


9단계는 마지막 검사와 포장입니다.
마지막으로 외형을 검사해서 부적합한 차는 골라냅니다. 가공이 완료된 차는 포장하여 판매합니다.


차화석 가공 과정을 보니 노차두와 비교해서 말도 안 되게 복잡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군요.
왜 이렇게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지 이해는 안 됩니다만,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러 형태의 보이차가 만들어지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리고 차화석은 반드시 고수차로 만든다, 특정 차산의 차로 만든다는 말은 근거 없는 말이었습니다.

 

차화석

 

얼마 전부터 차화석이라는 말을 듣고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제품이라고 하던데요, 저도 처음 들어본 제품이라 여러 자료를 찾아봤습니다만,
중국 내에서도 그다지 많은 자료가 없습니다.
차화석을 만드는 기술이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다들 추측만 하고 있으며 현재 제품을 생산하는 차창에서도 정확한 정보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알아본 정보를 모아서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매우 단단하다, 크기가 작다, 내포성이 좋다, 찹쌀향이 난다, 고수차?로 숙차를 만들 때 나온다,
숙차 발효 중 펙틴과 당류가 뭉쳐서 생기는 것을 다시 가공해서 만든다, 하지만 노차두는 아니다,
숙차의 부산물도 아니다, 10톤 모차를 가공하면 20킬로그램 정도 나온다 등..
일단 저 정보에서 유추해보면 차화석은 숙차를 만들 때 나온 차두를 매우 단단하게
긴압해서 만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차두는 아니라고 했지만, 발생 과정이 차두와 같습니다.
펙틴 성분이 흘러나와 어린 이파리끼리 뭉친 형태이지요.

고수차로 숙차를 만들 때 나온다고 합니다만, 고수, 소수 상관없이 나오는 게 정상입니다.
고수차라고 차두가 많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요.
고수차라는 말은 그냥 마케팅 용으로 하는 말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판매 가격 때문입니다.
10톤 고수차 모차를 발효했을 때, 20킬로그램 미만의 차화석이 만들어진다면 가격이 얼마나 될까요.
숙차의 부산물도 아니라고 강조를 합니다만, 정작 판매되는 가격은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습니다.
일부 제품은 빙도 고수차로 만든다고 선전도 합니다.
킬로그램에 우리나라 돈으로 몇 백만 원을 하는 빙도 고수차 10톤을 숙차로 발효를 시켜서 차화석 20킬로를 만든다면 가격이 어마어마하겠지요.
가격 계산도 나오지 않습니다만, 정작 차화석 판매 가격은 100그램에 몇 만원 단위입니다. ㅎ
찹쌀향은 운남에서 자라는 일종의 식물 이파리가 있습니다.
운남에서는 이 식물 이파리로 만든 차를 '찹쌀향차'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우리면 찹쌀향이 납니다.
차 화석에서 찹쌀향이 나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식물 이파리의 진액, 혹은 이파리 자체가 들어갔거나
차두를 고온으로 가공했을 때 당 성분이 전화되어서 구수한 캐러멜 향이 생긴 경우입니다.
정리해보면, 먼저 원료는 차두라고 여겨집니다.
고온으로 차두를 쪄서 적당히 부드러워졌을 때 매우 강한 긴압으로 다시 뭉쳐서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만듭니다.
이때 찹쌀향차를 섞거나, 아니면 고온에서 건조를 통해 캐러멜 향을 만들어냅니다.
건조를 마친 차화석은 잘게 깨서 상품화시킨다.
이런 가공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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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죽양자 야생 고차수 (2016년 3월)

중국 운남의 고차수 지역 중에 맹송고차산(勐宋古茶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겸리 주인장이 작년(2018년) 11월에 다녀온 곳이기도 합니다
맹해현 지도. 활죽양자는 화살 표시한 곳

맹송고차산 지역은 맹해현 맹송향에 위치한 고차수 군락으로서 맹해현에서 가장 오래된 고차구(古茶区) 중의 하나입니다. 동쪽으로 는 경홍시와 접하고 있고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남나산(南糯山)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맹송의 차나무 재배 역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남나산에 비해 결코 짧지 않은데, 이곳에서 최초로 차 나무를 심고 가꾼 것은 "납호족(拉祜族,라후족)"입니다. 납호족은 운남의 란창강(瀾滄江) 서쪽 지방에 주로 거주하며, 미얀마와 타이에도 분포해 있는 소수민족입니다.
이들이 먼저 들어와 차 재배를 한 후 한족이 합류하면서 지금의 맹송 고차수 지역은 한족과 소수민족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발 1,600미터 정도부터 분포하고 있으며, 맹해현의 최고봉이 바로 "활죽량자(滑竹梁子,화주량즈)"로서 해발 2,240미터에 달합니다. "양자(梁子,량즈)"는 중국어로 "고갯마루"라는 뜻인데, 운남의 산 지명에는 이 "량즈"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곳에 길고 매끄러운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를 활죽(滑竹)이라 하고, 가장 높은 산과 산을 연결하는 들보처럼 생긴 고갯마루를 의미하는 양자(梁子)와 결합하여 활죽양자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활죽양자의 고차수

이곳의 해발 1650m-2100m 사이에는 고차수와 야생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데 다원이 폭넓게 펼쳐있고, 햇빛을 보기 위해 차나무의 수고(樹高)가 높으며, 수령이 오래되었습니다.
해발고도가 이렇게 높은 곳에서 자라면, 일 년 내내 구름과 안개가 낀 데다가, 빗물이 가득 차서, 자연 생태 환경적으로 매우 좋습니다. 고차수 다원과, 숲, 그리고 목초가 조화로운 자연 생태환경을 조성하고 있으며, 특히 고차수는 병충해가 없어 약으로 방제하거나 비료를 주는 등의 관리가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약간의 손질만 가해주면 되는 거의 야생의 차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물론 100% 야생차가 될 수는 없습니다).
활죽양자는 하나의 차산을 의미하는 지역이 아닙니다. 이곳에는 보당(保塘)이 4개 마을(즉 保塘寨), 방용(蚌龍)이 3개 마을 등 7개의 마을이 각 차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합니족과 납호족, 그리고 한족이 거주하며 이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겸리의 활죽양자 야생고수차는 바로 이곳의 야생차나무에서 채취한 고차수 잎을 원료로 원미차창에서 2016년 3월에 만든 춘차입니다.

 

활죽양자 야생차 뒷면. 


포랑산 고차수 (2016년 3월)

 

포랑산(布朗山, 부랑산)은 신 6대 차산 지역인 운남성 서쌍판납주 맹해현(勐海縣)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맹해 지역의 대표적인 차산인 포랑산에는 포랑족(布朗族, 부랑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여기저기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는데, 특히 포랑족은 바로 중국(아마전 세계) 최초의 차 재배 민족인 복인(濮人)의 후예들입니다.
이들이 수천 년 동안 포랑산에서 아직도 차를 재배하며 살고 있는데, 이들이 살고 있는 포랑산의 마을들이 바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교목형 고차수 산지인 노반장(老班章), 신반장(新班章), 노만아(老曼峨) 등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란창강 서쪽의 고차수 산지(신육대차산)에서 활죽양자(화즈량즈) 아래 남나산(난눠산)산이 있고, 그 아래에 파사, 그리고 포랑산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포랑산의 원시삼림 속에 일군 소수민족의 다원

포랑산은 열대우림 기후로 무덥고, 원시삼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신 6대 차산의 대표적 차산입니다.
포랑산 지역의 고차수 분포는 매우 넓은데, 그중에서도 포랑산 반장촌위원회가 관할하는 노반장, 신반장, 노만아 3개 마을의 교목형 고차수 찻잎 생산량이 전체 포랑산 고차수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포랑산 고차수림

겸리의 포랑산 고차수는 이들 지역에서 수백 년 고차수를 선별하여 원미차창에서 만든 것으로서 포랑산 고차수 보이차의 품질은 매우 우수하고 찻잎이 견실하며, 독특한 꽃 향이 있습니다. 또한 마시고 난 뒤 여운이 길게 남는 것이 특징입니다.

포랑산 고수차 뒷면.

남나산 고차수 (2016년 3월)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활죽양자와 포랑산 사이에 남나산(南糯山, 난눠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평균 해발 1,400m, 연 강수량 1,500~1,750mm, 평균기온 16-18도로 보이차 생장에 매우 적합한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나산은 소수민족인 합니족(哈尼族, 하니족 혹은 아이니족)이 주로 거주하며, 산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데 ,합니족은 파마산이라고 하였으며, 한족은 순장산(筍醬山, 쉰장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또 남나산은 제갈공명의 '공명산'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제갈공명이 남나산에 있을 때 전염병이 돌았다 합니다. 이때 남나산의 찻잎으로 많은 사람을 구했는데, 그 이후부터 차나무를 많이 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나산에서 합니족들이 찻잎을 채취하고 있는 모습 

남나산에는 28개의 "자이"가 있습니다. 자이는 목책, 울타리를 뜻하는 채(寨)의 중국어로서 마을을 구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고차수가 나는 7개의 자이가 있는데, 해발이 높은 순서대로 두어이자이, 야코노자이, 야코신자이, 반파노자이, 꾸냥자이, 주린자이, 어떠자이가 있습니다.

남나산 반파노자이(반파노채)의 고차수림 

겸리의 남나산 고차수는 바로 이 반파노채(半坡老寨)에서 원미차창이 관리하는 고차수를 원료로 만든 고수차입니다. (坡를 중국어로는 포로 발음하여 반포노채라고도 함)
남나산(南糯山)의 종차(种茶), 즉 차 재배의 역사는 유구할 뿐만 아니라 그 명성도 높으며, 고차수 다원의 분표 면적도 약 12,000묘(亩)(1묘는 약 200평)로 서쌍판납 지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고차산(古茶山)입니다.
이와 같이 넓은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연유로 각 마을에서 생산된 차의 구감(口感)은 서로 달라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는데 반파노채의 차가 가장 유명합니다. 즉 서쌍판납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고차산이 남나산이며, 남나산에서 가장 유명한 마을이 바로 반파노채인 것입니다.

남나산 고수차 뒷면.

겸리가 특별히 그 원료와 제조 과정에 관해 전적인 신뢰를 지니고 있는 원미차창에서 2016년 맹해 지역의 유명한 고차수들을 원료로 하여 춘차를 만들었습니다.
활죽양자와 포랑산, 그리고 남나산. 모두 고차수 지역으로 역사와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곳입니다. 원미차창에서 같은 시기에 비슷한 다.수령대의 고차수로 만든 후 한 포장으로 내어 놓아 여기서도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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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급차의 재현이라는 모토로 보이차의 수많은 전설과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은 진순아호

통상 뒤에 호(號) 자가 들어가는 차를 "호급차(號級茶)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정의하면 1956년 이전에 개인 차창에서 만들어진 차를 말하는데, 당시 개인 차창들의 상호 뒤에 호(號) 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습니다.

100여 개가 넘는 이무(易武)의 유명 개인 차 상점 중에서도 복원창호(福元昌號), 동경호(同慶號), 송빙호(宋聘號), 차순호(車順號)가 가장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이른바 '보이차의 4대 천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밖에도 동흥호, 홍창호(홍태창호), 동창호, 정흥호, 경창호 등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최상급인 골동급(骨董級) 보이차로 대우합니다.
이들 골동 보이차는 중국의 국유화 정책에 따라 1956년 이후 모두 생산이 중단되었고, 그 명맥은 끊겼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과거 호급 보이차 제조 방법을 전승하여 후대에 다시 만든 차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진순아호(眞淳雅號)입니다. 진순아호는 호급 보이차 중에서도 송빙호의 제다 기법을 이어 받았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만의 여례진(呂禮臻)은 대만 차연합회 총회장과 세계 차 교류협회장을 역임한 자입니다. 그는 1994년 중국의 이무(易武)를 방문하여 전통 보이차의 복원을 위해 호급보이차 기술 보유자를 수소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동경호, 송빙호 등 소위 4대 천왕을 생산하던 차창 소유주와 기술자들이 모두 해외로 이주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버려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던 중 2년 후인 1996년 여례진은 송빙호 제작에 실제로 참여하여 그 기술을 보유한 장관수(張官壽)라는 사람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호급차 복원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여례진은 대만에 죽군공사(竹君公司)라는 차 제조 회사를 차리고 원료를 중국(이무)에서 가지고 와 장관수의 지도 아래 채엽부터 포장까지 전통 수공 제작 기법으로 차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마침내 그 제작에 성공하여 차의 이름을 진순아호라 짓고 옛 호급 보이차의 명성을 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1996년에 처음 만들어진 진순아호 

1996년에 처음 생산된 진순아호는 운남성 이무의 차엽을 기본으로 하여 만든 아주 우수한 고급 청병으로 평가받아 매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1996년판은 진품을 구하기 매우 어려울 정도로 귀하고 가격도 1편에 1,000만 원 이상을 호가합니다.
겸리에서는 2004년과 2005년에 이 진순아호를 구입할 기회가 있어 매입한 이후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겸리에서 직접 보관한 것으로 잡미잡향이 거의 없이 상태 매우 양호한 차입니다. 국내에서 진순아호를 오랫동안 보관하면서 직접 판매하고 있는 곳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과거 호급차의 명맥을 이은 유일한 차인 진순아호(2004년) 

1996년판 진순아호가 유명해지자 여러 버전의 진순아호가 생산되었는데, 죽군공사의 대리상들이 별도의 OEM 주문을 통해서 진순아호를 대량 생산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죽군공사가 직접 제작한 진순아호를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겸리에서 보관 중인 진순아호 2004년판과 2005년판은 모두 죽군공사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아래 사진의 내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죽군공사에서 사용한 전형적인 내비입니다. 갑신년(甲申年) 춘차라고 되어 있는데, 갑신년이 바로 2004년입니다. 

이무정산의 춘첨(春尖) 원료를 사용하여 전통 수공 방식으로 제다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겸리에서는 당시 진순아호의 2004년 판이 특히 찻잎의 상태가 매우 좋고 우수한 원료를 사용하여 몇 통 구입하였는데, 지금은 이 차가 구할 수 없는 귀한 차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차 후 탕색은 아주 이상적인 등황색이며 잡향이 거의 없이 아주 잘 보관되었고, 첫 탕에서부터 매우 부드러운 맛이 먼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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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호 2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21:11 Posted by 거목

차순호의 설립연대에 대한 두가지의 상이한 설과 관련된 자료

 

1.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유래 (1839년설)


청조(清朝) 도광(道光) 연간,"차마고도(茶马古道)"의 발원지인 이무고진(易武古镇)에서 현 차씨(车氏) 집안
의 원조인 차순래(车顺来)가 "차순호차장(车顺号茶庄)"을 설립하여, 자체 보유 차산(茶山)에서 채엽한 고품질의 대엽종(大叶种) 생태(生态) 다엽(茶叶)으로 여아차(女儿茶), 인두금과차(人头金瓜茶), 사건긴녕권차(纱
巾紧拧拳茶), 반구형타차(半*形沱茶), 칠자원병차(七子圆饼茶), 향죽긴압차(香竹紧压茶) 등의 제품을 수공
으로 제작하여 서장(西藏: 티벳), 신강(新疆), 항오대(港澳台: 홍콩/마카오/대만) 및 남양(南洋: 동남아시아)
각지로 판매하여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객상(客商)들로부터 아주 큰 관심을 끌었다.
1837년 차순래(车顺来)는 향시(乡试), 회시(会试)에 참가하여 공생(贡生: 과거제도 하에서 부(府), 주(州), 현
(縣)의 생원(秀材) 중에서 성적이 우수하거나 자격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경성(京城)의 국자감에서 공부하도록 한 자들을 지칭하거나 달리 거인(擧人)의 부방(副榜)[명청(明淸) 시대의 제도로,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거인(擧人)의 인원수에 제한이 있어 거인의 자격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에 해당함)이라는 학위(学位)를 취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은의 의미로 자신이(车顺号茶庄) 직접 만든 차를 조정(朝廷)에 바쳤는데 도광제(道光帝)가 이를 맛본 후 아주 흡족해 하며 이 차는 "맑고도 순수하며 (汤清醇), 맛이 두텁고도 진하며(味厚酽), 감칠 맛이 오래가고(回甘久), 가슴 속을 평안하게 해 주니(清心脾), 이야말로 좋은 차로다(乃铭中之瑞品也)!"라고 하며 연신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넉자를 써 주면서 이무차순호차장(易武车顺号茶庄)을 칭찬하고
또한 차순래(车顺来)에게 "예공진사(例贡进士)"라는 품계와 직위(品位)를 내려주었다.
황제의 명으로 품위(品位)를 받게 된 차순래(车顺来)가 두품정재(头品顶戴:청조 때 관(冠)에 주옥(朱玉)을 달
아 관직을 구별하였는데 이 관을 머리에 쓴 모습)하고 운남으로 돌아 와 황제의 명을 알리니, 운남 포정사(云南布政使: 포정사는 청조의 관제에서 종2품의 관직임)) 첩용(捷勇) 파도로(巴图鲁 : 청나라 때 무공이 있는 관원에게 내린 칭호로 간칭으로 巴图라고도 하는데 대략 용사(勇士)의 의미를 가짐. 巴图鲁 칭호를 가진 사람은 흔히 그 호칭 앞에 특별한 의미를 주기 위해 振勇, 勃勇, 克图托 등의 개사(介詞)를 붙였음)는 길이 7척3촌2분, 폭 1척8촌, 두께 1척5분 치수에 황금으로 글자를 입힌 "서공천조(瑞贡天朝)" 편액(金字大匾)을 만들도록 하였다.
예공진사(例贡进士) 차순래(车顺来)는 정중한 현판식을 거행하여 이 금편(金匾)을 대문 위에 걸고 등롱과 비단 띄를 매단 후 일주일 동안 주야로 잔치를 벌였는데, 이로써 이무차(易武茶)는 영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 현판 또한 운남 보이차 최고의 영예로 되었다.
이 후 수십년 동안 차순래(车顺来)는 황제의 뜻을 충실히 따라 해마다 자신이 만든 차를 경성(京城)에 공납(瑞贡)하였는데 이로 인해 차순호(车顺号)의 차들은 청 조정 및 황족(皇亲国戚)에게 있어 없으면 안될 어용음료(御用饮品)로 되었으며 또한 국내외적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서공천조(瑞贡天朝)" 편액(宝匾)의 유래는 사적(史籍) 정본(正本)에 의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 편액(宝匾)의 후계자(传人)나 가족들의 기록이나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이 편액(宝匾)은 당시 운남포정사사(云南布政使司)의 포정사(布政使)로 있던 첩용 파도
로((捷勇巴图) 상사(尚史)가 청궁(清宫)의 황족(皇亲国戚) 고관(达官) 귀인(贵人)들이 모두 보이차(普洱茶)
를 아주 즐기고, 도광(道光) 황제가 의방(倚邦)과 이무(易武)에서 온 공차(贡茶)를 마신 후 아주 기뻐하며 칭찬한 후 흥이 나서 바로 이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글귀를 친히 족자(条幅)에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운남순부(云南巡府)에서는 같은 족자 3폭(幅) (4폭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되어 있지 않음)을 하사해 주도록 조정에 주청하여 당시 보이부(普洱府) 관원(官员)의 보이공차(普洱贡茶) 구입(采办)에 책임을 지고 협조한 예공진사(例贡进士) 차순래(车顺来), 열공진사(列贡进士) 명예좌랑(修职佐朗) "안락호(安乐号)"차장(茶庄) 장주(庄主) 이개기(李开基), 그리고 달리 의방산(倚邦山) 두령(头目) 한 사람 도합 3인에게 이 족자를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하사받은 족자를 받아든 후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당지 최고의 명장에게 의뢰하여 족자의 글을 녹나무 횡편(楠木横匾)에 새겨 넣어 대대로 대청 위에 걸어 놓고 성은에 감사하였다.
이무 고차산(易武古茶山) 또한 이로 인해 "공차지향(贡茶之乡)"이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차순래(车顺来)는 성은(圣恩)에 감사하며 바로 "차순호(车顺号)" 차장(茶庄)을 열어, 공차(贡茶) 구입(采办)과 제다(制茶)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차순래(车顺来)의 후인(后人)들은 이 편액을 아주 아끼고 잘 보호하여 몇년에 한번씩 금분(金粉)을 다시 발라 처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편액(宝匾)은 비단 "차순호(车顺号)"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이무 보이차(易武普洱茶)의 빛나는 역사와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증거라 할 수 있다. "
서공천조(瑞贡天朝)"는 가장 좋은 찻잎(茶叶)을 써서, 극상품의 차를 만듦으로써, 이 상서로운 물품(祥瑞之物)을 조정에 공물로 봉납한다는 뜻이다. 중국(我国)에서는 고대(古代)로부터 고관(达官), 귀인(贵人), 문인(文
人), 묵객(墨客)들은 항상 찻잎(茶叶)을 서초(瑞草)라 칭송해 왔는데, 당(唐)나라 때 두목(杜牧)이 지은 시(诗)
중에는 "차는 좋은 풀 중의 으뜸으로 친다(茶称瑞草魁)"는 구절(诗句)이 나오기도 한다.
현판은 大匾系用楠木雕刻, 길이 약 2m, 폭 약 70cm, 두께 약 15cm(미실측)의 녹나무(楠木)에 조각하여 사용
하였다. 현판(匾)의 중앙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의 "서공천조(瑞贡天朝)" 네 글자를 써 넣었는데, 필적(笔迹)이 호방하고 힘이 있다 ;
현판(牌匾) 오른 쪽에는 "钦命头品顶戴云南等处承宣布政使司布政使捷勇巴图尚史为(황제로부터 두품정
재라는 명을 받은 바 이를 운남 등지에 포고한 포정사사 포정사 첩용파도로 상사가 씀)"라는 문구가 편형(扁形:가로 폭이 세로 폭에 비해 넓은 형상)의 송체자(宋体字样)로 새겨져 있으며, 현판(牌匾) 왼쪽의 낙관(落款)에는 세로로 "예공진사 차순래 세움(例贡进土车顺来立)"이라는 글을 해서(正楷) 소자로 적어 놓았는데, 때는 청(清) 도광(道光) 18년(서기 1839년)이었다.
청조(清朝) 도광(道光) 연간에 설립된 이무차순호(易武车顺号)는 근 200년의 역사를 가진 어용공차(御用贡
茶) 노자호(老字号)로, 차씨 집안의 세조(世祖) 차순래(车顺来)가 자신이 일일이 손으로 만든(自家全手工制
作生产) 다엽(茶叶) 제품을 황제가 사는 궁으로 올려보내는 중 구감(口感)상 그 맛과 향이 깨끗하고 진하게(香醇) 되었는데, 도광(道光) 황제가 이를 마셔보고 크게 기뻐하여(龙心大悦) "차(汤)가 청순하고(清纯), 맛이 두텁고 진하며(味厚酽), 회감이 오래 지속되어(回甘久), 이야말로 차중의 서품이로다(乃茗中之瑞品也)"라고 하며 연이어 칭찬하고는, 즉시 두품정재하고 운남으로 가운남 포정사사의 포정사(云南布政使司布政使) 첩용파도로(捷勇巴图鲁) 상사(史)의 감독 하에 길이 7척3촌2분, 폭 1척8촌, 두께 1촌5분의 나무판에 황금색의 "서공천조(瑞贡天朝)" 네 글자를 커다랗게 쓴 현판을 만들어 이를 "이무차순호(易武车顺号)"에 하사하도록 하고, 동시에 차순래(车顺来)에게 매년 규정에 따라 자신이 생산한 차 제품을 진공(进贡)하도록 명하였다.
차순호(车顺号)가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운남 보이차(云南普洱茶)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되면서, 보이
차(普洱茶)는 청조(清朝) 시기에 황족들이 서로 선물하는 고급 예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고 , 그 후 수많은 국가적 외교사절들에게도 선물로 주어졌다. "서공천조(瑞贡天朝)" 현판은 중국 다엽사(茶叶史)에 있어 황제로부터 하사받아 현재 온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편액으로서, 이는 운남 보이차(云南普洱茶)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는데 있어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
2. 서공천조(瑞贡天朝)의 유래 (1894년설)


예공진사 차순래의 차순호 다장은 이무정산 칠자병차를 공경하여 광서 20년(1894)에 '서공 천조' 편액을 받았다. 그래서 이무는 '공차의 고장'으로 불린다.
보이차가 대량으로 경성 즉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성의 궁정 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보이부지(普洱府志)》중에는 "보이차의 이름이 온 수도에 다 알려져 있으며 모든 경성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3. 易武茶对普洱茶的影响及其发展初探

"이무차가 보이차에 미치는 영향과 그 발전에 대한 탐구"                  이사정(李师程). 오진(吴进) 

중국의 차문화는 그 역사가 유구하고 차엽의 품종 또한 아주 다양하다. 다른 수많은 명차와 같이 보이차도 오랜 경쟁 과정 중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차류(茶類)로 되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있으며, 청조의 <신전운남통지(新篆云南通志)> 중에는 "보이(普洱)라는 이름은 중국차 중에서 특수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안휘(安徽)나 민절(闽浙:복건성 및 절강성 지역)에 비할 수 없다"고 하는 글이 보이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보이차 발전사에 대한 내외전문가 및 학자들의 심도있는 연구 중 운남의 소수민족들이 찻잎을 음료로 만든 것이 20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남이 세계적으로 차나무의 원산지이자, 난창강 유역의 사모(思茅: 현 普洱), 서쌍판납 등 지역은 차나무 기원의 중심지로서 운남이 차의 고향임을 확인하고 있다.
운남산 차의 역사는 한말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청조(清朝) 도광(道光)년간에 편찬된 <보이부지(普洱府志)> 중에는 이 지역의 차나무를 "무후유종(武侯遗种)"이라 하여, 촉한 건흥 3년(서기 225년) 제갈공명이 남중(南中) 평정시 차업(茶業)을 번창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780년 전의 일이다.
정식으로 문헌상에 기록된 내용 중 가장 이른 것은 당조(唐朝) 함통5년(864년) 번작(樊绰)이 지은 <만서(蛮
书)> 제7권에 "(이 곳의) 차는 은생성(银生城) 경내의 여러 산악 지대에서 나오는데 (찻잎을) 흩어져서 수거해오나 차엽의 채취와 차를 제조하는 방식에 어떤 법도는 없다(茶出银生城界诸山,散收无采造法)"고 기록하고 있다.
* 은생(银生) : 중국 서남부 변방에 있는 무량(无量) 및 애뢰(哀牢) 양산맥의 서북방에서 동남방으로 난창강(澜沧江)과 원강(元江)의 한 지류인 예사강(礼社江)을 따라 마치 한쌍의 거대한 푸른 용이 웅크리고 있는듯 조심스레 몸을 감추고 있는 이 지역 중의 한 산간에 있는 고성(古城). 은생성(银生城)은 당조 초기 남조국(南诏国) "은생절도(银生节度)"의 부치소(府治所) 소재지였다. 당시 남조국에 있던 7 절도(节度) 중 은생절도(银生节度)가 관장하는 지역이 가장 넓었으며, 그 관할구 내에 현 임창시(临沧市)의 대부분 지역과 보이(普洱), 서쌍판납주 전역 및 태국(泰国)의 경매(景迈) 지역, 라오스의 풍사리(丰沙里), 월남의 내주(莱州) 및 미얀마의 경동(景栋)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이차(普洱茶) 생산이 명확히 기재된 문헌은 명조(明朝) 만력(万历) 47년(1619년) 지방지리학자(方志学
家) 사조석(谢肇浙)이 편찬한 <전략(滇略)>으로,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모두 보차(普茶)를 마신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의 보차(普茶)란 곧 보이차(普洱茶)이다. 보이차(普洱茶)라는 이름은 명말(明末) 방이지(方以智)의 <
물리소식(物理小识)>에 "보이차는 증기로 쪄서 경단 모양으로 만들어 티벳(西番)으로 보내진다"라는 기록에 처음으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청(清)나라 때에는 1799년에 단췌(檀萃)가 쓴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에는 "티벳에서 음용하고 있는 보차(普茶)는 당(唐)나라 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차"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사료(史料)들로부터, 원래 고대에 만들어져서 한(汉)나라 때 이미 널리 보급되었고 명(明)나라 때에 그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청(清)나라 시기에 극성기를 맞았던 보이차(普洱茶)는 보이(普茶)에서 그 차엽(茶叶)이 집산(集散)되고 교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원산지는 육대차산이라는 역사를 가진명차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보이차의 전통을 널리 알리고 이무차가 다시 빛나는 이름을 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통적인 보이차의 원산지인 육대차산의 으뜸인 이무 지역에서 나온 이무차가 보이차 및 그 발전 과정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보이차(普洱茶) 발전사에서 이무차(易武茶)가 가지는 특수한 지위
(1) 이무(易武)는 보이차의 고향이다.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의 기록에 의하면; "보차(普茶)라는 이름
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며.... 여섯 곳의 차산이 소속되어 있는 보이(普洱)에서 산출되는데, 이 육차산이란 첫번 째가 유락(攸乐), 두번째가 혁등(革登), 세번째가 의방(倚邦), 네번째가 망지(莽枝), 다섯번째가 만단(蛮端), 여섯번째가 만살(曼撒)로서, 그 주위가 팔백리에 이르고 산에 올라가 차를 만드는 이의 수가 수십만명에 이르며...


(2) 이무차산은 그 면적과 생산량이 모두 육차산 중 으뜸이다.


(3) 이무(易武)는 보이공차(普洱贡茶)의 고향이다. 이무는 차로 인해 흥성하였으며,
청조(淸朝) 옹정(雍正) 2년(1724년) 이무(易武)에 몰려드는 차상(茶商)과 공인(工匠)이 수십만에 이르러 "산
마다 다원이 있고 어디든 인가가 있다(山山有茶园,处处有人家)"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되어 이런저런 문제가 끊이지 않자 청조(淸朝)에서는 "외지 상인이 입산하여 차 만드는 행위를 엄히 금함(严禁客商入山作茶)"이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옹정(雍正) 13년(1735년) 에는 "차인(茶引)"제도 - 차상이 관청으로부터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차업을 영위하도록 한 제도 -에 의해 차를 구매하도록 함으로써 차상(茶商)이 다시 들어오게 되고, 주로 원병차(또는 원보차(园宝茶)라고도 부름)를 생산하였는데, 7병(饼)을 1통으로 판매하였으므로 "칠자병차" 또는 "칠자보차"라고 하였으며, 이를 대량으로 보이(普洱)로 운송하여 이 곳에서 중개 판매하였다.
보이에서 차엽 무역을 관리하는 관리(官吏)들은 보이차를 궁정으로 헌상하였는데 황궁의 환심을 얻기 위해 공품(贡品)을 따로이 분류하였다. <보이부지(普洱府志)>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청 건륭(乾隆)9년(1744年) 보이차는 궁정에서 <공차안책(贡茶案册)>에 정식으로 등재되었으며, 공차 품종으로는 "아엽(芽叶), 단차(团茶)"로 하도록 규정되었고, 보이부(普洱府)는 매년 공차 구입용 특별 계정에서 그 비용을 지불한다.
보이공차는 선통(宣统)3년(1911년)까지 167년간 황실에 납품되었다. 공차의 차엽은 초기에는 육대차산에서 채엽하였으나 점차 이무차산에서 주로 채엽하게 되었고, 그 가공 또한 초기에는 사모청(思茅厅)에서 전용으로 설치한 "차점(茶店)"에서 하였으나 차츰 차상이 설립하고 관부에서 감독하는 차장(茶庄)이 주로 담당하게 되어, 공차를 가공하는 차장은, 이무(易武) 차상 이개기(李开基)의 "안락(安乐)"호 차장이나 차순래(车顺来)의 "차순(车顺)"호 차장 등과 같이, 일시에 커다란 명성을 얻었는데, 황실에 헌납해 올린 "이무정산칠자병차"가 광서(光绪)20년(1894)에 황제로부터 친히 "서공천조(瑞贡天朝)"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이개기(李开基), 차순래(车顺来)는 황제로부터 "예공진사(例贡进士)"라는 품직에 봉해졌는데 그 중 이개기(李开基)는 이부(吏部) 칙명으로 수직좌랑(修职佐郎)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무(易武)는 공차지향(贡茶之乡)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보이차가 대량으로 경성 즉 자금성으로 들어간 후 경성의 궁정 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아 그 이름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으며, 《보이부지(普洱府志)》중에는 "보이차의 이름이 온 수도에 다 알려져 있으며 모든 경성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있다"라고 기재하고 있다.


2. 이무차(易武茶)는 현재 전통보이차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차이다.


개혁개방의 빛나는 성과에 의해 보이차는 홍콩, 대만, 광동 등의 지역은 물론 한국, 일본, 싱가폴 등 동남아 국가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음용 및 수장자가 추지약무(趋之若骛: 수많은 오리떼가 한번에 날아오르는 양상)의 현상을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보이차에 대한 시장에서의 논의가 분분한 실정으로, 이를테면 보이녹차, 보이홍차 등등을 법규로 정하고 있어 업계 내의 인사들도 심히 난처한 실정이다.
보이차(普洱茶)란 무었인가? 2002년 6원 서쌍판납에서 개최된 '보이차 국제학술 연토회' 상에서 내외의 전문가및 학자들은 보이차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즉, 보이차(普洱茶)란 운남 난창강 유역의 차나무 원산지에서 산출되는 역사적 명차로서, 운남대엽종 차수(茶树)의 선엽(鲜叶)으로 만든 쇄청모차(晒青毛茶)를 완만하게 자연발효시키거나 또는 인공적으로 속성 후발효시켜 만든 특정한 종류의 차류(茶类)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보이차는 복제할 수 없는 지역적인 명차로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보이차를 만듦에 있어 중요한 원산지를 가지고 있는 이무차(易武茶)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통보이차의 특색을 보유 견지하고 있으며 보이차 애호가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2004년 4월 맹랍현(勐腊县)에서는 이무(易武), 의방(倚邦), 만쇄(曼洒), 만장(曼庄), 혁등(革登) 등의 고차
산 탐방을 위해 운남성 내외의 차업 전문가 및 학자 10여인을 초청하였다.
실지 답사 후의 보고에 의하면, 맹랍현(勐腊县) 경내의 5대 고차산은 그 실태가 모두 서로 달라, 혁등(革登) 차산은 모두 경작지로 바뀌어 이미 차나무를 찾아볼 수 없고, 의방(倚邦)과 만쇄(曼洒) 차산은 비록 차산 전체에 잔여 차수(茶树)가 일부 남아있으나 대부분이 6~700묘 정도의 소규모 차수림(茶树林)에 차나무는 단 몇 주 정도 밖에 없을 정도로 차나무가 희소하고 차나무의 수세(树势:성장도) 또한 쇠약한 실정이다.
한편 만장(曼庄) 차산의 차수는 그 성장도가 비교적 양호하고 밀도 또한 비교적 높으며(매묘당 약 100주) 면적 또한 현재 1000여묘 정도 된다. 위 4대 차산의 고다원(古茶园)은 모두 3200묘 정도로 연산 16톤 정도의 차를 생산할 수있다.
이에 비해 이무(易武) 차산에는 7000여묘(만랍(曼腊) 1000묘 포함)의 고다원(古茶园)이 있으며 연 90톤의 차
를 생산할 수 있어 고다원(古茶园)의 면적 및 그 생산량이 여타 4대 차산 총합의 수배에 달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무(易武)야말로 명백히 전통보이차의 생산 기지라 할 것이다.
현재 이무에는 칠자병차를 개별적으로 제조하는 차방(茶坊)이 30여곳 정도 있으나 대부분이 쇄청모차를 만들어 산차(散茶) 형태로 외지 차상(茶商)이 구입해 가므로 차농(茶农)의 수입 및 지방세 상의 손실이 매우 크고, 차산업이 회복 중이나 그 발전 속도는 완만하고 해내외(海内外)에 떨치고 있는 보이차의 고향이라는 평판에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 소개:
이사정(李师程) : 이무 차산의 차엽세가(茶叶世家) 출신으로, 그 증조부 이개기(李开基)는 "안락(安乐)"호 차
장(茶庄)을 열어 헌차입공(献茶入贡)시 "서공천조(瑞贡天朝)" 금편을 하사받았으며 광서제(光绪帝)로부터
"예공진사(例贡进士)"의 관직에 봉해지고 이부(吏部)에서 "수직좌랑(修职佐郎)"에 임명되었다. 이사정은 어릴 때부터 차산문화(茶山文化)에 대한 훈도(熏陶)를 받아왔으며, 차문화 연구와 차산업 발전에 진력해 오고 있다.
중국공산당 곤명(昆明)시위원회 부서기, 중국공산당 사모(思茅)지역위원회 서기, 중국공산당 운남성위원회 당교(党校) 상무부교장 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차엽문화절(茶叶文化节)의 창설자이다. "보이차엽절(普洱茶叶
节)"은 그가 사모(思茅)지역위원회 서기 재직시 주관한 행사였다. 현재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协) 운남성위원회상임위원, 운남성 정협 문사위원회(文史委员会) 주임, 중국공산당 운남성위원회 당교(党校) 운남행정학원 교수직을 맡아 있다. 또한 곤명민족차문화촉진회 명예이사장 직도 겸하고 있다.


오진(吴进) : 현 운남성 정협 문사위원회 판공실 부주임
운남이무정산다엽유한공사(云南易武正山茶叶有限公司)는 2006년에 성립되었으며, 운남성기술질량감독국
의 관심과 지도하에 운남민족차문화연구회 주관으로 20여 이무고진(易武古镇)의 차창, 차장 등 28개소가 주주로 공동발기하여 설립된 차장연합체이다.
공사(公司)는 성과 신을 근본으로 하고(诚信为本), 품질을 첫째 목표로 하여(质量第一), 차문화를 전파하여(传播文化) 대중에 서비스하고(服务大众), 조화로운 발전(和谐发展)을 경영이념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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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호(⾞順號)1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20:54 Posted by 거목

2003년판 차순호 

보이차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게 하였던 차가 바로 차순호(車順號)입니다. 동경호와 함께 보이차를 대표하는 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들이 바로 보이차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차인 호급(號級) 보이차입니다. 1900년대 초 청나라 말기에 그동안 황실에 차를 바치던 공차(貢茶) 제도가 사라진 후부터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거의 대부분 호(號)로 끝나기에 당시의 차를 속칭 호급차(號級茶)로 부릅니다.
호급 보이차 중에서 가장 유명한 호급차가 차순호와 동경호 이외에 복원창호(福元昌號)와 송빙호(宋聘號)가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이차의 4대 천왕(四大天王)입니다
이외에도 동흥호, 홍창호(홍태창호), 동창호, 정흥호, 경창호 등 100여 개가 넘는 호급차들이 최상급인 골동급(骨董級) 보이차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급차를 생산하던 개인 차창은 1956년 중국의 국유화 정책에 따라 모두 없어지고, 호급차 자체도 지금은 거의 구할 수 없을 뿐아니라 가격도 1편에 1억 원이 넘습니다.

차순호의 유래


다른 모든 호급차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차순호 역시 수많은 창건 연대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비교적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차순호와 관련해 전해지고 있어 그 창건 연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차순호의 창시자는 차순래(車順來)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무에 개인 차창을 연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험에 합격하자 감사의 의미로 황궁에 자신이 만든 차를 직접 긴압하여 바쳤습니다.

차순호 본가 고택 전경 

그런데 이 차를 음용한 황실에 소문이 펴지게 되고, 결국 황제까지 음용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그 맛에 반해 차순래에게 '서공천조(瑞貢天朝)'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그로 하여금 공차(貢茶)를 생산하게 하였습니다.

차순호 본가에 있는 편액. 그러나 이 편액은 황제가 내려준 편액이 아니라 2006년에 대만 사람들이 다시 만들어준 것임. 

황제에게 편액을 직접 하사받는 동시에 황실에 공품을 독점적으로 받치게 되면서 차순호는 일약 보이차의 가장 중요한 차장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차순호는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보이차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차순호 고택에 전해지는 보이차 긴압석. 아마 이 긴압석으로 황실에 직접 긴압하여 바쳤을 것으로 추정. 

차순호 고택에 전해지는 보이차 긴압석. 아마 이 긴압석으로 황실에 직접 긴압하여 바쳤을 것으로 추정.
차순래가 황제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보이차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한 이 시기에 관해 중국의 거의 모든 자료에서는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 재위 기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순래가 차창을 개설한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험을 보았으니 차순호의 창건 연대도 도광제 재위기간으로 추정하고 있고, 대부분의 국내 자료에서도 이렇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순래의 후손 중의 한 명인 차지결이란 분이 만든 차순호에도 황제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해를 1839년으로 표시하고 있어 차순호의 설립 연대를 도광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2009년 차순호 차장의 차순호 칠자원차 

위의 사진에서 보면 편액 위에 조그만 글씨로 '1839년 도광황제 어사(御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차순호의 1800년대 초 설립 설과 차순호 설립 200주년, 혹은 170주년 등 많은 설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순래에게는 3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3남인 차덕삼(車德三1880~1935)이 이무에서 가장 중요한 차창으로 발전한 가업을 승계하여 차순호를 운영합니다.
그런데 차덕삼은 1880년 생으로서 1800년대 초에 부친이 차순호를 설립하였다면 연대가 이상하게 됩니다. 차순래가 1837년에 과거를 보았다 하고 그 조금 전에 차순호를 창립하였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인데, 차순래가 20살에 차순호를 창립했다 해도 그로부터 약 50년 후에 막내인 차덕삼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입니다.
이렇게 본대면 차순호의 설립 연대는 1800년대 후반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고, 구체적으로 청나라 광서제(光緖帝, 재위 1875∼1908) 시기의 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광서제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나 양어머니이자 숙모인 서태후가 섭정을 하다가 1898년 경부터 직접 통치(親政)를 하게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 27세입니다. 친정 이전이라도 적어도 성년이 되어 차를 품평할 수 있다면 광서제의 나이 20세가 되는 1890년 전후까지는 그 시기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차순호의 성립연대는 1894년설, 혹은 1901년설 등으로 하는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서공천조(瑞貢天朝)' 편액의 유래에 대해 혼동이 많은 것은 그것이 사료(史料)에 의해 의해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주로 이 편액의 후계자나 가족들의 기록, 그리고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차순호는 차덕삼의 장남인 차순래의 3대손 준의(遵義 1911-1963)에게 이어지고 다시 4대손 순예(循禮 1931-2004), 5대손 지신(智新 1948~)으로 이어지며 가업은 계속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차지결(車智潔 ?)이라는 분은 바로 5대손 차지신의 동생입니다.

그런데 차순호의 역사에서 매우 불행한 사태가 5대손인 차지신과 차지결 형제 사이에 발생합니다. 바로 과거 차순호의 영광을 가져온 황제의 편액을 둘러싼 투쟁인데, 일설에는 차지결이(혹은 친척이라는 설도 있음) 무장한 사람들을 이끌고 본가에 가서 형이 보관하고 있던 편액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고 합니다.
이때가 2005년으로 그 편액을 빼앗은 사람은 경홍(景洪)에서 이무 차순호 차창을 내고 본인이 진정한 차순호의 승계자로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지신은 편액을 빼앗겼으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대만의 차인들이 곤명(昆明)에서 복제품을 만들어 2006년 본가에 걸어주었느데, 현재 볼 수 있는 편액이 바로 이것입니다.

2018년 11월 차순호 본가. 가운데 파란 옷을 입은 사람이 겸리 대표자 

현재 차순호는 장손인 차지신이 본가인 차순호 고택에 살며 '이무차씨지신고택방(易武車氏智新古宅坊)'이라는 차창을, 그 동생인 차지결은 '이무차순호차장(易武車順號茶莊)'이라는 차창을 운영하며 각각 차순호의 정통을 잇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서공천조' 편액은 동생인 차지결이 소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고, 이들의 친척이 소유하고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마도 공개하면 자신이 탈취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감추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누가 과거 가장 중요한 호급차의 하나였던 차순호의 그 전통 제다 방법을 전수받은 진정한 차순호의 계승자인가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겸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차순호는 2003년에 만들어진 차입니다.
호급차의 명맥이 끊어진 이후 많은 곳에서 호급차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동일한 이름으로 호급차를 만들어 왔는데, 차순호 역시 마찬가지로 차 씨 가문 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곳에서 만들어 왔습니다.
겸리의 차순호는 '이무차씨차장(易武車氏茶莊)'이라는 차창에서 만들었는데, 이 차창이 과거 차 씨 가문에서 설립한 곳인지의 여부도 확한 정보가 없습니다.
차 씨 가문은 중국 공산당 정부가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모든 차창을 국유화 한 1956년 이후 2002년까지 차순호를 판매하지 않았고, 집에서 마실 산차만 생산하였습니다. 자가소비 이외에 정부 관리들이 방문하거나 특별히 중앙정부에 상납할 것들만 만들다가 2003년 부터 소량의 고차수 보이병차를 전통 방법으로 생산하여 판매하였습니다. (이 전통 제다법이 현대까지도 계승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연구 과제입니다)
2003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차 씨 가문의 차순호가 어떠한 것이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겸리의 보이차가 공교롭게도 2003년도에 구입한 것으로서 혹시 이때의 차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정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겸리의 이 차순호에 대한 정보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상급 원료로 만들어져 당시 가격으로도 매우 고가에 구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호급보이차들 중에서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차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송빙호의 경우만이 그 제다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만에서 '진순아호'라는 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 진순아호 참조
따라서 옛날의 호급 보이차의 이름을 가지고 시중에 나와 있는 차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겸리의 이 차순호도 어떠한 경로로 만들어진 차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래된 보이차인 것만은 틀림없으며, 이무 차산이 가지고 있는 특질, 곧 광서 황제가 묘사한 차순호 고유의 맛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서 황제는 차순호를 어떻게 평가하였을까요?


차순호의 특징


단지 황제가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차순호가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막 즉위한 황제가 시골구석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게 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로 편액을 하사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광서 황제는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황제였습니다. 그는 차순호를 시음하고 다음과 같은 평을 하였습니다. .
"찻물이 맑고 진하고(湯清醇), 맛은 투텁고 깊으며(味厚釅), 회감이 오래 유지되니(回甘久), 마음과 몸을 정화시켜준다(清心脾). 과연 서품(매우 뛰어난 차)이로다!(乃茗中之瑞品也!)"
<청심비(清心脾)는 심장과 비장을 맑게 해준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으로 해석하였으며, 심장과 비장에 스며든다(沁心脾)로 품평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호급차가 보이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희소성 뿐 아니라 바로 보이차에 대한 표준을 세운 것이라고 할 때, 광서 황제의 차순호에 대한 평가 속에 보이차가 가져야 할 차의 기준이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탕 색이 맑고 진하며, 맛이 두텁고 깊으려면 차의 원료가 어떠해야 하는가? 막 재배한 대지차나 재배차가 이러한 색과 맛이 나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지차의 경우에 갓 만들어진 차의 탕 색이 흐리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지차의 어린순에 있는 솜털의 영향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탕 색이 진하려면 차의 내재 성분이 충만된 고수차여야 합니다. 이것이 고차수의 운남 대엽종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보이차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원칙일 것입니다.

차순호 우린차. 맑으면서도 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일반적으로 이무차산의 차의 품질은 찻물이 유하고 순활하며, 구감이 맑고 답니다. (易武茶湯水柔和順滑,口感清甜) 이무정산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함이 입안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맛은 두텁고 깊다는 '미후엄(味厚釅 )'의 경지입니다.
이무 차산의 차는 또한 고삽미가 비교적 적고 회감이 상대적으로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苦澀感較弱,回甘較好).
회감(回甘)은 단맛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으로 이는 바로 단맛을 느끼게 되는 당(糖) 맛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회감은 차를 마신 후 약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난후 다시 입안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단맛을 의미하며, 당(糖) 맛은 보다 직접적이고 바로 느낄 수 있는 단맛을 의미합니다.
찻잎 속에 있는 성분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시간적 간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맛을 바로 느끼지 못하고 일정 시간, 그러나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른 시간 내에 느껴지는 이 회감이야말로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이 회감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오래간다는 것, 즉 황제가 언급한 '회감구(回甘久)'의 상황은 차 안의 성분들이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즉 내포성이 매우 좋다는 것인데, 이는 탕 색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그 맛이 매우 오랫동안 성분 사이의 일정한 조합에 의해 회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의미도 됩니다.
따라서 회감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차가 가지고 있는 성분이 매우 중요한데, 이 역시 이무의 차산이 가지고 있는 원료의 특징입니다.

차순호 황금색 엽저. 이무차산의 특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차 
차순호 엽저 말린 것.이무의 어린 잎을 위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음.

차순호 뿐 아니라 이무에 존재했던 수많은 호급차 차창들이 이러한 이무 차산의 고차수가 가지고 있는 특질에 매우 충실한 차였기에 오늘날까지 골동 보이차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이 광서 황제가 '서공천조'를 하사하게 된 동기로 되었다고 판단되며, 이는 오늘날 소위 고차수 보이차가 구현하여야 할 핵심가치일 것입니다.
보이차를 공급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가치가 차를 제조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고, 수요하는 소비자 측면에서는 이러한 기준으로 만들어진 차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차를 만날 때 비로서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청심비(清心脾)'의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러한 차야말로 진정한 '서품(瑞品)'으로의 자격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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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시차(蟲屎茶)란?

차 이야기/보이차 이야기 2020. 3. 1. 19:55 Posted by 거목

 70년대 보이차로 만든 충시차 


충시차(蟲屎茶)란?


차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사실 차를 처음 재배하고, 자신들의 일상생활 속에 중요한 필수품으로서 차를 포함시킨 사람들은 소수민족들입니다.차와 관련한 이들의 생활 풍습이나 민속 중 차 벌레의 배설물을 모아 햇볕에 말리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건조한 후 물에 섞어 마시곤 하였던 차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시차(蟲屎茶)라고 하는 것으로, 육보차로 유명한 광서성이나 귀주성 등에서 묘족(苗族)과 요족(瑤族) 등이 이러한 차를 만들어 음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화향나무(化香樹 : 일명 백차나무)에서 자라는 화향아(化香蛾)라는 곤충이 그 나무의 잎을 먹고 배설한 배설물을 솥에서 덖어 차로 만들었는데, 후에는 보이차에서도 찻잎을 갉아먹고 배설한 것을 모아 차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벌레의 배설물(蟲屎)이라는 이름 대신에 아주 조그만 과립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의주라는 뜻을 가진 용주차(龍珠茶)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화향나무와 안길 백차나무


그런데 이 화향나무라는 것이 어떤 나무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화향나무를 검색하면 거의 충시차와 관련된 것뿐이고, 화향나무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백차나무라고도 하는 데에서 힌트를 얻자면, 1982년 절강성(浙江省) 안길현(安吉縣)의 해발 800m 산속에서 발견된 야생 백차나무와 같은 종(種)의 나무가 아닌가 하고 추측합니다. 그 당시 수령 100년이 넘은 이 나무가 안길 백차의 어머니가 되는 백차조(白茶祖)입니다. 물론 안길 백차는 백차가 아니라 안길의 이 백차나무에서 생산되는 녹차를 말합니다.

1982년에 발견된 안길 백차나무

원래 안길의 백차는 약 1,800년 전 한나라 영제(靈帝) 때 ‘편하고 좋은 고장’이라는 뜻으로 ‘안길(安吉)’라는 지명을 하사받았을 때부터 기록에 나오는 차입니다.
《다경(茶經)》을 편찬한 육우도 이 안길 백차를 마셔보고 감탄하며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 이 차를 만나 더 이상 여한이 없다"라고 크게 외치고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우가 가져온 차를 마신 옥황상제는 백차나무를 모두 하늘로 가져오게 했는데, 실제로 이후 수백 년 동안 안길 백차가 사라져 버리
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백차나무가 사라지니까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육우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대비하여 인간 세상을 위해 백차나무 씨 한 톨을 몰래 산속에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이 백차나무는 수백 년 동안 사라졌다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송나라 인종(仁宗·재위 1022~1063) 때의 일입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상서로운 기운을 가진 백색의 어린잎차가 백성 앞에 나타났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야생의 백차나무로서 험준한 계곡 사이에서 겨우 한
두 그루만 자생하는 매우 희귀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충시차와 관련하여, 백차나무라고도 하는 화향나무에서 자라는 곤충이 만들어 낸 그 독특한 차를 처음 만들었던 것도 바로 이 시기, 즉 송나라 때인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에 백차나무가 안길 지역에 다시 나타난 시기와 일치합니다.
물론 처음 충시차가 만들어졌던 화향나무가 이 백차나무와 같은 종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향나무를 백차나무라고도 하고, 그 백차나무가 다시 기록에 나타난 시기와 충시차가 처음 만들어졌던 시기가 일치하는 점 등을 미루어 이러한 추정이 전혀 무리가 가는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백차나무는 다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 번의 등장과 소멸을 반복하는 이 독특한 나무는 송나라 시기에 이렇게 잠시 나타난 후 다시 사라졌다가 무려 800년의 침묵을 깨고 1930년에 야생 차나무 수십 그루와 함께 세상에 다시 나왔고, 1982년에 안길에서 수령 약 100년의 백차나무가 발견됨으로써 세상의 이목을 다시 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추측건대, 이 백차나무는 육우 시대 이후 꾸준히 존재하여 왔지만, 그 희소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충시차의 유래


충시차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광서성과 귀주성의 특산 차입니다. 특히 계림의 특산 차입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생산을 하던 곳이 이들 지역이라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러한 벌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충시차를 만들어 음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위의 안길 같은 지역이 그러한 곳입니다.
처음 충시차는 묘족(苗族)과 요족(瑤族)이 충차(蟲茶)에 차와 벌꿀을 섞어 마시는 것으로 시작됐다 합니다. 이곳 농민들이 야생 등나무나 찻잎, 화향나무 등의 줄기와 잎을 쌓아놓으면 작고 검은 벌레들이 와서 먹고 싼 배설물과 남은 차 줄기를 체로 칩니다. 그리고 체로 걸러진 가루를 솥에 넣고 볶아서 말린 후, 꿀과 찻잎과 배설물을 각각 1:1:5의 비율로 섞어 다시 볶아서 충시차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충시차가 처음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1. 귀주성(貴州省) 적수(赤水)시 대동고진 동패산 전설
"옛날 산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화향나무를 삶아서 먹었는데, 그나마 생엽이 떨어져 어느 날 쌓아둔 화향나무에 벌레가 생긴 것을 보고 벌레의 배설물까지 끓여서 마시게 되었는데 의외로 향기가 좋아 좋아서 그 후로 충시차를 마시게 되었다."
2. 호남성 성보현의 묘족 전설
"호남성 성보현에 사는 묘족들이 봉건 통치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하고 진압하게 되는데 묘족들은 산속에서 숨어 살게 되었다. 극심한 가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화향나무의 나뭇잎에 벌레 먹은 잎과 배설물을 끓여 마셨는데 맛이 좋아서 그 후 계속해서 마시게 되었다."


위의 두 가지 유래에서 보듯 충시차는 처음부터 부유층의 사치품으로서가 아니라 먹을 것 없는 가난한 민중들의 식량 대용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맛과 약효가 뛰어남이 알려지자 점차 부유층이 즐겨 마시는 사치품으로 변해갔습니다.


보이차와 충시차


위에서 보았듯이 충시차는 화향나무와 관련이 있는 차입니다. 그러나 충시차가 워낙 희소하여 그 제조 방법이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충시차를 광범하게 즐겼던 가난한 소수 민족들은 그것이 비록 화향나무가 아니어도 자신들이 늘 마시던 찻잎에서 생긴 벌레를 이용하여 차를 마시는 방법을 오랫동안 이어왔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로 충시로 만들어지는 것의 재료는 야생 등나무와 찻잎 등으로, 이들을 포개어 놓고 밀폐 혹은 반 밀폐되 공간에 둔 채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서 나방과 같은 것이 나타나 그 벌레가 찻잎과 등나무 잎 등을 먹고는 나오는 배설물을 모아 꿀이나 찻잎, 충시 등을 넣어가열 시켜 차로 복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간혹 오래된 보이차에 보면 그 보이차를 먹고 구슬처럼 매달려 있는 벌레를 볼 수 있는데, 이를 다충(茶蟲)이라 하고, 일본에서는나방 벌레의 유충인 아(蛾)라고도 하는데 일생 동안 찻잎만 먹는다고 합니다.
이를 차처럼 마시면 마치 아주 오래된 보이차 맛을 느낄 수 있어서 홍콩이나 광동 같은 곳에서 보이차를 창고에 넣어 둔 채 보관을 하다 그 창고를 정리하는 시점에 이런 것이 발견되면 차를 만들어 마시곤 하였던 것이 근래에 충시차를 보급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질 좋은 상품(上品)의 충시차는 적어도 30년 이상 보관된 노 보이차(특히 타차나 병차)에서 발견되며, 보이차 한편에서 아주 조금만 나와 붓으로 쓸어 담는데, 그 양이 무척 적어 매우 희귀한 차로 취급됩니다. 또한 농약 등 약성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자연히 충시차는 유기농 차, 혹은 오래된 차에서만 나온다는 인식이 더해져 더 귀한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일생동안 차를 먹으며 자란 다충벌레의 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주목하고, 이것을 위장약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벌레의 배 안에는 소화를 위한 강력한 효소가 대량으로 분비되고 있고, 이 효소들은 다른 잡균의 번식을 막기 위한 천연 항생 물질을 만들었는데, 옛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충시차가 이러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보이차에서 나온 충시차의 맛은 오래된 노차나 숙차와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고급차로 분류되어 현재는 구하기 힘든 차로 되었습니다.


충시차의 특징


1. 보이차 충시차는 보이 생차의 색보다 조금 진한 색을 띠고 있으며 배설물의 냄새는 없고 거꾸로 차향이 좀 더 강합니다. 맛은 산미와 함께 꿀맛 즉 밀(蜜) 향이 좀 더 강해서 보이차보다 좀 더 단 느낌이 있습니다. 차 벌레의 유충이 차옆을 먹는 소화 과정에서 효소에 의해서 아미노산이 증가했기 때문에 생차보다는 숙차의 맛에 가깝습니다.

진한 색을 띠고 있는 충시차 

2. 이시진(李時珍)이라는 사람이 1578년에 저술한 중국 명나라의 대표적인 한의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충시차에 대해서 "차도 되고 약도 되며 차와 비슷하나 차가 아니기도 하다(亦茶亦藥 似茶非茶)"면서, “열의 해소를 돕고, 독을 풀어내며, 비위를 튼튼하게 하고 소화를 도우며, 또한 설사에 좋으며(지사 止瀉), 잇몸의 출혈과 병에 좋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차를 마시면 눈이 맑아지고 장이 튼튼해지며, 피로가 풀려 그 옛날 쓸만한 약이 없던 시절에 약 대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충시차는 위를 건강하게 하고(건위 健胃) 장을 편하게 하는(정장 整腸) 효과가 있어 예로부터 위장약 등으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충시차에 다른 잡균의 번식을 막는 효소와 천연 항생 물질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4. 충시차에는 단백질, 지방, 당류, 인, 철, 아연 등과 함께 인체에 필요한 필수아미노산 8종을 모두 함유한 18종의 아미노산이 전체의 1/3 이나 됩니다. 충시를 한데 모아서 잘게 가루로 만들어 전다법으로 우린 충시차는 오래된 보이차의 달고 부드러운 맛에 깊고 진한 한약의 탕색으로 시큼한 맛 그리고 과일향이 납니다.
5. 겸리의 충시차는 70년대의 오래된 보이차에서 추출한 충시차입니다. 차를 우린 충시차의 맛은 골동 보이차의 맛 그대로이며, 아주 담백한 맛으로 진하게 마셔보았는데도 거북한 맛이 나지 않습니다.

충시차를 우릴 때는 다관에 직접 넣지 않고 우림망에 싸서 넣어 우리거나 거름망으로 이용함
거름망으로 우릴 때에는 핸드드립으로 커피 내리듯이 원을 그리면서 우려줌 


이렇게 우린 충시차의 맛은 골동 보이차의 맛 그대로입니다.

 

  충시차 혹은 용주차

 

두 가지 말은 같은 말입니다.
용주는 용의 구슬, 즉 여의주라는 뜻이고요, 충시는 말 그대로 벌레 똥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대상을 일컫는 말인데 느낌 차이가 많이 납니다.
한때 대만의 상인들은 충시는 오래된 골동차에만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벌레가 생겨 충시가 만들어진 차는 더 비싸게 판매했고
충시만 모아서 다시 비싼 가격으로 팔았습니다.


전에 마셔볼 기회는 있었습니다만, 절대 안 마셨습니다.
충시에 얼마큼 좋은 성분이 있는지는 몰라도 제 감수성으로는 먹기 어려워서 말이지요.
제 비위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식용 벌레는 먹어도 벌레 똥은 안 먹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돼지 똥을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무튼, 대만의 상인들의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습니다.
보이차에 생기는 벌레의 정체는 작은 나방의 애벌레입니다.
고온, 다습, 통풍이 안 되는 환경에서 발생하는데 빨리 생기면 1~2년 사이에도 발견됩니다.
벌레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하얀색 점액이 붙습니다.
이 점액이 마르면 마치 거미줄과 비슷한 모양의 타래 형태의 선이 생깁니다.
그 벌레는 보이차에 붙어살면서 차를 실컷 갉아먹고 검은색, 갈색의 작은 입방체의 똥을 쌉니다.
그 똥을 모아서 파는 것이 충시차입니다.
무슨 불로장생의 명약처럼 과장해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 효과가 있으면 팔지 않고 자신이 마셨겠지요.
벌레 똥을 여의주라니...

육보차(六堡茶) 흑차

차 이야기/흑차 2020. 3. 1. 00:17 Posted by 거목

중국의 광서성 장족자치구에서 만든 흑차의 일종을 말합니다. 광서성의 오주시 창오현 육보향(장족자치구)에서 생산한 차여서 육보차라고 합니다.
장족(壯族)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중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으로서 현재 약 16백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특히 육보향에 있는 흑석산(⿊⽯⼭)은 육보차의 노반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차기(茶氣)가 좋아 최고로 유명한 차산입니다.
육보차는 이처럼 육보향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차 이름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여섯가지 보물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아엽, 노엽, 줄기, 차씨껍질, 차꽃 등 위 5가지는 차로 만들어 우려 마시고 나머지 한 가지인 차씨는 기름을 짜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육보차는 청나라 가경황제(1796 ~ 1820) 시절, 전국의 명차로 선정되었으며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차입니다.
최근 대형 차창에서 생산되는 육보차는 90% 이상이 육보 숙차입니다. 육보 숙차는 지하 창고에서 발효를 시킨 후에 건조해서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반면 육보 생차는 현지 차농이 농가에서 소량 생산한 다음에 바로 자연 건조로 후발효가 진행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광서성 육보차

* 육보차의 제다방법
제법은 원료가공과 증제의 두 과정으로 나뉘는데, 신선한 잎을 볕에 바랜 후에 초청[炒⾭, 솥에서 덖어서 살청(殺⾭)] 유념, 퇴적발효, 홍건(紅乾 : 탄화를 쬐어 건조)의 공정으로 모차[⽑茶 ; 황차(荒茶)]를 만들고, 정제는 모차를 증기로 부드럽게 하여 긴압(緊壓)하고 자연건조 시킵니다. 육보차는 국곰팡이 냄새가 있고 오랜것일수록 고급으로 평가됩니다.
채엽 - 탄청 - 살청 - 초유념 - 퇴민(쌓아 놓는것. 1일 2~2.5kg) - 복유념 - 건조(송시명화. 홍건) - 정제가공 등급분류 - 초증 - 악퇴(15~30일) - 긴압(바구니) - 진화(3년 동안 동굴이나 발효실)
긴압방법 : 모차를 훈증하여 부드럽게 한 뒤에 대바구니에 넣어 긴압
진화의 조건 : 긴압한 차를 습도 75% ~ 90%, 온도 23~28℃로 깨끗한 동굴 또는 숙성실에서 3년 동안 진화(陳化) 과정을 거쳐 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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